[서평 - 김지환] "하청사회", 양청호, 생각비행, 2017

“컵에 물이 다 차면 물이 밖으로 흘러내려야 하는데, 다 차는 순간 마법처럼 그 컵이 더 커진다.”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한국 경제는 ‘지대 추구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의 핵심에는 ‘지대 추구’의 특권이 존재하며, 수십 년간 이를 용인해 온 잘못된 정치와 행정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7년 9월 4일 정기국회 교섭단체 연설 중에서


▲ “하청사회: 지속가능한 갑질의 조건”, 양정호, 생각비행, 2017. (표지 제공 = 생각비행)

하청사회, 무한 갑질의 현장
 

최저임금 1만 원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데, 2018년 최저임금을 현 최저임금에서 16.4퍼센트 올린 7530원으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언론은 하나같이 떠들썩하게 영세 자영업자 걱정을 늘어놓는다. 자영업자의 깊은 신음소리는 나날이 올라가는 임차료 때문이건만, 그건 하나의 상수로 넣고 비용절감은 인건비로 전가한다. 가게 주인은 ‘조물주 위 건물주’에 신음하고, 아르바이트생은 저임금에 신음한다.

미스터피자 회장의 파행과 갑질은 불매운동을 불러왔다. 불매운동은 고스란히 가맹점주에게 직접 피해를 끼친다. 정작 사과 당사자는 하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사과할 때, 가맹점주는 석고대죄를 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가맹본부, 임원의 위법,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일어난 손해를 가맹점주가 배상받을 수 있도록 가맹계약서에 배상책임을 의무적으로 기재하겠다고 했다.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조치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이래저래 전방위적 ‘갑질’사회다. 저자가 말하는 ‘하청사회’는 갑질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양극화가 심화된 한국의 하청사회는 극소수의 갑만 더 많은 이익을 챙기고 대다수의 을은 더 많은 희생을 당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설계의 두 가지 핵심장치로 ‘지대추구행위’와 ‘외주화’를 지목한다. “이를 통해 하청사회에서는 모든 이익을 독식하는 갑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대폭 줄어드는 반면 을이 져야 할 위험과 손해는 날로 늘어난다.”(24)

지대의 덫에 걸린 한국사회

‘지대’란 좁게는 토지 사용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지만, 넓게는 토지뿐 아니라 어떤 생산요소든 공급이 고정되면 그것에 지급되는 보수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세입자가 건물주에게 매달 내는 월세 역시 일종의 지대다. 건물주는 단지 건물을 소유함으로써 일하지 않고도 고정 수익을 챙긴다.

지대를 기반으로 한 지대추구행위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지 않고서 비생산적 방식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노력이며, 더 넓게 보면 기득권을 통해 경쟁을 회피하면서 얻는 초과이익을 가리킨다. “미국 유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E. K. 헌트는 이를 ‘보이지 않는 발’이라고 일컬었다. 공정한 경쟁으로 적정한 가격이 형성되어 다수에게 이익을 준다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은유와 상반되는 이 현상을 기발하게 개념화한 것이다.”(30)

갑의 지대추구 행위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 현상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주변부 지역에 문화생산자들이 모여 가치를 높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때 건물주는 임대료를 인상해 문화생산자는 물론이거니와 원주민도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말 그대로 지대가 인상되어 그 지역에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은 손해를 보고 건물 소유주에게 이익이 몰리는 것이다.”(65) 30여 년 전 상습적 수해로 그닥 살고 싶지 않은 동네로 소문난 망원동의 요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 131번과 7번 버스가 다녔던 ‘망리단길’은 연남동에 이어 요즘 한창 떠오른다. 한때 좀 썰렁했던 이 지역도 슬슬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지대추구의 양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혈연과 지연에 기초한 연고주의는 갈수록 약해지지만, 학벌은 취업과 사회적 성취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지대’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아직도 처음 만들어진 '여고괴담'의 충격적인 대사를 잊지 못한다. “야, 떡볶이 집을 해도 서울대를 나와야 더 잘된다.” 게다가 유명세도 엄청난 ‘지대’로 작동한다. 저자는 유명 강사 최진기 사건과 가수 조영남 사건을 통해 지대추구의 폐혜를 거론한다. 또 프랜차이즈 대표의 가맹점주에 대한 횡포도 대표적인 갑질적 지대추구 행위로 봐야 한다. 

2016년 5월 구의역 김군 스크린도어 사망 사건은 지금도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사건은 하청사회의 양대축을 다 드러냈다. 김군이 다니던 회사인 은성PSD 임직원은 서울메트로 출신으로, “서울메트로라는 ‘지대’의 보호를 받은 셈”(31)이며, 그들이 지대의 보호를 받는 동안 김군의 ‘위험의 외주화’로 노출되어 희생당했다.

▲ 한 하청노동자 청년의 스크린도어 사망 사건은 지금도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위험의 외주화, 노동의 위기

지금 한국 하청사회는 노동자 절대 다수가 열악한 ‘을’의 처지에 놓여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소수의 ‘갑’이 저지르는 온갖 ‘갑질’을 감내해야 한다. 이토록 험악한 하청사회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 노동시장이 급변하면서 을은 더욱 취약해진 반면 갑은 갈수록 막강해져서 마침내 ‘슈퍼 갑’으로 거듭나면서 공고해졌다.

‘갑질’이란 갑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을에게 자행하는 부당행위다. 원청과 하청 사이에 널리 알려진 부당행위 또는 ‘불공정 하도급거래’에는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구두발주, 하도급대금 부당감액 등’이 있다. 갑질은 단지 갑이 ‘우위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하위에 있는 을을 ‘밟고 서는 것’을 포함한다. 갑은 갑질을 통해 스스로의 우월한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지대 또는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갑은 을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쥐어짜 내면서 더욱 많은 사회적 부를 움켜쥔다. 그런 불균형과 불공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가 있다. “2009년에 삼성전자가 사상 최초로 매출 100조 원, 영업이익 10조 원을 돌파한 때였다. 당시 초유의 이익을 거둔 삼성전자가 한 일은 협력업체들에 대한 납품단가를 일률적으로 30퍼센트씩 삭감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재벌과 대기업의 이익이 커질수록 사회 전체로 그 이익이 분산된다는 소위 ‘낙수효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23)

저자는 ‘외주’ 또는 ‘하청’이라는 제도는 적법과 편법의 안전한 영토 안에서 갑의 손실을 극소화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갑은 스스로 감수해야 할 여러 위험을 을에게 떠안기기 때문에, 외주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의 외주화’로 귀결된다. “산업안전보건대상을 받은 대기업들이 있다. 그런데 산업재해 통계는 대기업 원청자가 아닌 이들의 하청업체의 산재사고로 들어간다. 원청업체의 산재사고는 줄지만 하청노동자의 산재사망률은 증가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원청업체에서는 산재사고를 줄이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87)

하청사회의 폐해는 노동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하청 노동자는 몸이 아파도 결근할 수 없다. 한두 차례 결근은 노동의 기회 자체가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에, 외주화는 그만큼 노동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준다. 영국의 영시간 계약 노동은 극단적인 양상을 보여 준다. 화물차 운전기사나 야쿠르트 아주머니를 포함한 이른바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노동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문제는 노동자도 아니고 사업주도 아니며 노동자의 특성과 개인사업자 특성을 모두 지닌 이런 직종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이다.

▲ 지난 8월 20일 STX조선해양에서 도색 작업을 하고 있던 하청노동자 4명이 폭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진 출처 = YTN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각성한 을은 갑의 횡포를 좌시하지 않는다

지난 8월 20일 STX조선해양에서 건조 중이던 배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이 사고로 숨진 4명은 모두 하청노동자였다. 벌써 올해만 해도 노동절에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 6명이 죽은 사건부터 해서 몇 번째 사고인지 모른다. 하지만 당장 뚜렷한 개선책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청사회는 헬게이트이자 그 자체가 헬조선이다. 하청사회는 갑은 계속 갑의 위치를, 을은 계속 을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작동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갑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을들이 서로 무한경쟁하면서 하청사회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물론 을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있지만, 개인에 불과한 을은 그것이 너무 복잡하고 모호해서 잘 이용하지 못한다. 을이 ‘을들’로 뭉쳐 힘과 뜻을 모으지 않은 채, 혼자만으로는 갑과 대등한 협상이 불가능하다. “‘을들이 법률과 제도 사이에서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한다면, 과연 갑이 하청사회를 현 상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현재와 같은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개인으로 쪼개어져 균열된 일터에 홀로 남은 을들이 외주 또는 하청이라는 제도를 직시하고 그 너머에서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을들’을 발견하고 손잡지 않으면 안 된다.”(85)

저자는 먼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긍정적 변화를 기대하고, 아울러 연대를 호소한다. 현재의 하청사회는 ‘적폐’의 근원적 온상이다. 하청사회를 완화하고 극복하는 것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대다수 을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가 지적한 법적 대응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갑은 한없이 두텁고 어찌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를 쓰고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의 많은 노동자가 부당해고 같은 실질적 불법 행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향한 투쟁’도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다. 또 개선을 위해 국가의 적절한 역할을 견인해 내는 것도 중요하겠다. 지난 겨울 촛불은 어느 노랫말처럼 “미친 대통령 하나 끌어내리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명시해야 한다. 촛불은 한국 사회를 밑동부터 바꿔야 한다는 요청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하청사회 또한 주요한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각성한 을은 더 이상 갑의 폭주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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