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 글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은 필자가 2017년 4월에 실린  ‘지금여기 연중 기획 - 교회 내 민주주의’를 읽고 보내 온 글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이 글을 쓴 익명 필자의 신원에 대해 별도로 확인했으나, 필자의 요청에 따라 밝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글에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가치와 다르거나, 필자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도 있지만, 평소 드러나지 않던 교회의 일면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 편집자

 

1. 주교의 임명 및 임기 문제

2. 주교의 절대적인 권력 문제

3. 주교의 최고의 갑질 문제

4. 주교의 가시적인 성과 중시 문제

5. 주교들 견제 문제

6. 한국 교회의 모습

7. 개선 방안

 

2017년 4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교회 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세 개의 글이 시리즈로 실렸다. 모두 주교에 관련되는 글들이었으며, 교회 내 민주주의는 주교들과 직결된다는 의미였으며 상당히 타당하고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세 가지 글 이후에도 주교들과 관련된 국내외의 글이 5-6편 더 실려 있다. 주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데 현재 문제가 많다는 의도일 것이다.

이 글은 그 글들에 이어지는 속편이라 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이고 심각한 내용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교회의 참된 개선과 쇄신을 위해 인고 끝에 글을 쓰게 되었다.

교회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서는 그 안의 구성원인 주교, 사제, 신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특히 주교는 마치 운전수와 같아 그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 비록 비위에 거슬리는 점들이 있다 할지라도, 쇄신과 개선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교회언론에 교회 ‘내부적으로’ 허심탄회하게 말하고자 한다. 되도록 독자들이 어느 특정 교구를 지칭하는지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랄한 표현을 줄이기 위해서 많은 수정을 가하였다. 익명으로 글을 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1. 주교의 임명 및 임기 문제

현재 주교 임명 제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7년 4월 27일자 내용을 참조하기 바람) 간단히 요약하자면, 세 명의 후보를 선발하고 또 세 명 중에 한 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데에는, 현 교구장과 교황대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교구장의 후보 추천은 잘못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다양한 의견과 연구를 거쳐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적합한 인물을 추천해야 하지만, 정치적으로 혹은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나 자기와 비슷한 만만한 사람을 정략적으로 추천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 후보는 당연히 자격이 미달된다. 교황대사는 가까이서 같이 살지 않기에 후보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 따라서 교황대사가 추천하는 후보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멀리 있는 교황은 교황대사의 추천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주 제시되는 의견이지만, 교구장 임기는 최초 5년으로 하되 평가 등을 통해서 문제가 없을 경우에 5년 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0년이면 마음을 비우고 물러나야 다른 주교가 또 교구장에 임명됨으로써 새로운 발전과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 “10년 되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훌륭한 주교도 있다. (물론 이 약속을 지켜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보통 수준의 주교, 나아가서 아주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주교 혹은 자격이 모자라는 무능한 주교가 그 보장된 임기인 75세까지 교구장직에 있을 경우에, 그 교회는 정체됨은 물론 나아가서 그 교회의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된다.

 

2. 주교의 절대적인 권력 문제

교구장 주교는 각자의 교구 내에서 입법권과 사법권과 행정권을 한꺼번에 다 쥐고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임기인 75세까지 휘두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주교를 견제할 수단이 전혀 없다. 교회 내에는 나라의 경우와 같이 제대로 된 언론, 촛불, 야당, 국회, 특검, 헌재, 탄핵 등의 역할을 할 곳이 없다. 거기에다 성령까지 받았다고 생각하니 ‘절대에 절대’다. 자주 지적되듯이, 견제가 제대로 없는 절대 권력에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일단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견제 수단이 없으니 둑이 터지는 파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주교는 교회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고, 자신의 권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고, 또 그 권력이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라도 잊기 쉽다. 아주 위험천만한 착각이고 망각이다. 대통령은 제한된 권한과 권력을 봉사하도록 국민들로부터 임시적으로 위임 받았음에 비해, 주교들(교황 포함)은 ‘절대적인’ 권한과 권력을 ‘봉사하도록’ 신자들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임시적으로’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경계하고 잘못을 즉시 바로잡고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황사절은 주교 후보자 3명 명단을 교황에게 보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와 flickr 이미지들로 조합함)

3. 주교의 최고의 갑질 문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최고와 최악의 갑질은 바로 주교가 사제에게 행하는 것이리라. 절대 권력을 가진 주교의 ‘명령’은 절대적인 ‘순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의 “순명”이란 명령에 복종한다는 말이며 무조건 따른다는 말과 같다. 사제에 대한 징벌과 그에 대한 순명 강요가 바로 갑질 중의 갑질이다. 주교에게 순명할 의무는 사제들에게 있지 일반신자들에게는 없다. 따라서 사제가 제일 만만한 셈이니 사제에게만 갑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주교회의에서 사제에 대한 징벌을 ‘면직’과 ‘정직’과 ‘휴직’의 명칭으로 통일해서 시행하기로 담합 결정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이 세 가지 징벌은 몇 년간 계속 교구마다 ‘유행’이 되다시피 시행되고 있다. 이는 과거 10년간의 각 교구 홈페이지의 사제 인사명령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각 교구들의 사제 인사명령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인사명령을 모든 교구가 싣지는 않았고, 또 싣는 교구들도 인사명령 모두를 실은 것은 아님을 감안해야 한다) 확인해 보면 그 징벌들이 공개적으로 시행된 횟수가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면직’ 징벌의 주된 발단은 교황께서 ‘아동 성추행’한 사제를 보호하는 외국의 교구장 주교들을 벌하겠다는 데에 근거해 있으며, 따라서 그때부터 외국의 그 주교들이 그런 사제들을 벌하기 시작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아마 자신의 교구장직을 지키기 위해서) 외국의 어떤 교구가 ‘아동 성추행’ 문제로 소송을 당해 교구의 살림이 거덜 나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어 교황이 제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빌미로 “면직”은 공공연히 시행되고 있음은 물론, “정직”, “휴직”이라는 명칭으로 확대해서 아동 성추행과 관계없이 주로 다른 여러 경우들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자신의 교구장직이 위태로워지지 않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규율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사제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순명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혹은 주교에 대한 괘씸죄를 벌하기 위해서도 시행되고 있다. 이는 과도한 ‘권력남용’이 아닌가?

그 징벌들은 인사명령 종이에 적어 사인해서 간단하게 공문으로 발표되면 그만인데, 사제에게는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다. 정직도 좀 그렇지만 특히 면직의 경우에 그러하다. ‘면직’이란, 사제직분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기에 유지되지만, 미사나 성사 등 사제로서의 일을 더 이상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벌이다. 사회 직장에서의 ‘파면’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 사회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어디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심받아 구제될 수도 없다. 면직이 되면 다른 교구로 갈 수도 없고, 이제껏 해 오던 일이 독특해서 사회에서 딴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면직 직후부터는 금전적 지원도 일체 없어지고, 퇴직금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며 한 푼도 주지 않으니 생계가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주교들이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고 잔인한가? 퇴직금이라도 충분히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서 어떤 경우에는 교묘하게도 면직의 벌을 직접 주지 않고 스스로 사제직을 버리고 떠나도록 생활하기가 어려운 작은 공소나 외딴 곳에 명령을 내어 수년 동안 계속 내버려 두기도 한다.

최근 뉴스에 “교황께서 한국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격려하며 강복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뜻을 담은 교황의 강복 메시지가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지난 10월 17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에 전달됐다고 12월 27일 밝혔다.”고 한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2월 29일자) 사형제도 폐지 일꾼들을 한국 주교단과 교황대사와 교황이 쌍수를 마주치며 칭찬한다는 뜻의 자랑스러운 내용이다. 이 소식에 기가 차고 쓰디쓴 비웃음이 절로 난다. 신체적 목숨을 빼앗는 국가의 사형제도 금지 운동에는 열을 내면서, 교회 자신은 사제들을 함부로 면직시킴으로써 사형시키고 있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가? 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가?

‘정직’이나 ‘휴직’도 사제직 수행이 정지되거나 혹은 수행을 못하고 쉬어야 하는 대단한 불명예라는 의미에서는 면직과 같다. 다만 면직과 다른 점은, ‘정직’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최소한’ 일 년(사회에서는 겨우 3개월)으로 한시적이라는 것과 그동안에는 입에 겨우 풀칠만 할 정도의 금전적 지원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휴직’의 경우에는 통상 그 기간이 일 년이며 교통비나 기름값 정도는 더 지원된다는 점이 다르다. 인사명령은 공개되기 때문에 정직이나 휴직의 벌을 받은 사제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어 있으며, 대단한 불명예이기에 이후에 본당에 나가서 사목하기가 힘이 든다. (이 기회에 교회 뉴스들은 사제 실명의 징벌이 포함된 인사명령은 일체 싣지 않기 바란다) 수십 년을 성실히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한두 번의 실수로 정직이나 휴직의 벌이 말이나 되는가?

현재 주교단의 분위기는, 사제가 잘못하면 사전교육이나 타이름이나 인자로움이나 자비로움을 실천하거나 용서를 통한 기회를 주기보다는 벌 줄 생각부터 먼저 하며 걸핏하면 징벌을 우선적으로 행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과거에 사제에 대한 “면직”이라는 말은 없었다. “환속”이라 하여 스스로 사제직을 떠난 경우는 더러 있었다. 대부분 독신의 의무를 지키기 불가능하여 ‘스스로’ 떠난 경우였다. 또한, 과거 한국에서는 “정직”이나 “휴직”이라 명칭의 처벌도 없었으며 다른 방법으로 벌이 주어졌다. 과거의 주교들은 비록 일방통행식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러한 징벌들을 주지 않는 기본을 지키고 사제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았기에, 기본적인 존경을 받고 정년까지 갈 수 있었다. 과거에는 사제들의 수가 부족해서 소중히 여겨진 것이고, 지금은 사제의 수가 당분간은 많아서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배짱을 부리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교들의 심성이 문제이지 사제들의 숫자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면직은 극심한 경우에 극히 드물게 시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구에서 상당한 사제들을 면직시키기 시작했다.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고 가차 없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사제들은 몸조심이나 하며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고 열성적으로 사목할 리가 없다.

다른 주교들도 그를 본받아 사제들에게 무리하게 벌을 내리고 있다. 이렇게 최대한의 갑질을 하고 있는 주교들은, 당연히 사제들에게 인자로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하며 마음으로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물을 펼쳐 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렸다가 걸려들면 무자비하게 벌하는”(맹자) 식이다. 이런 식이니 벌을 받은 사제들은 그런 주교에 대해 “어버이”로 여기기는커녕, 절망과 자살의 마음을 갖거나 혹은 극심한 미움과 적개심과 살의을 갖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주교들은 매년 서품식 때마다 “나와 내 후임에게 존경과 순명을 약속합니까?”하고 물으며 결코 존경까지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주교와 사제 사이는 결코 그러한 살벌한 사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호간의 자비로움과 존경의 사이가 되어야 한다.

법과 징벌을 위주로 하면 나중에 역효과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다스리는 방법은 도덕과 인에 있는 것이지 혹독한 법령과 징벌에 있는 것이 아니다”(공자)고 한다. 그 말은 모든 조직에 적용되겠지만, 특히 교회의 경우에 그렇다.

무한한 권력을 지닌 예수님은 부족하고 잘못하는 제자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세 가지 벌 중에 어느 하나라도 내리신 적이 있던가? 왕이 떠나면서 나라를 잘 다스리라고 대리인에게 많은 권한을 줬더니 신하들을 자주 벌 주고 때리고 또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나라를 망친다면, 나중에 왕이 돌아왔을 때에 그 대리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최전선의 일선 사목은 주교들이 아니라 사제들이 맡고 있다. 따라서 주교는 사제들이 사목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도하고 후원하면 된다. 그런데 주교들은 독선과 불통과 절대권위에 젖어 사제들에게 최대의 갑질이나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일선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의 지지와 신임과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후계자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사제직을 떠난 “환속”의 경우가 아니거나 혹은 ‘극심한’ 경우가 아니면서 면직된 사제들은 하루 빨리 ‘복직’되어야 할 것이다.

엄하고 지독한 벌을 받아 낙담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제들의 심정과 고통을, 신자들은 물론 등 따뜻하고 배부른 다른 사제들도 일체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다. ‘호가호위’하며 온갖 ‘좋은 것’과 ‘존경’과 ‘영광’을 다 누리고 있는 주교들도 그 사제들의 심정과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음은 당연하다. 마치 온갖 부귀와 영화와 풍족함에 빠져 있던 “부자”는, 그 대문간에 누워 종기나 긁으며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불쌍한 “라자로”의 고통과 심정을 전혀 알 리 없고 상상조차 하지 않은 것과 꼭 마찬가지다.

요즘 갑질한 기업의 사장들은 줄줄이 조사받고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교회의 지독한 갑질이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사회의 법에 호소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교 서품식. 이 사진은 이 기고문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4. 주교의 가시적인 성과 중시 문제

물질에 대해 욕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교회의 기본 정신에서 멀어지게 된다. 또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최우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내적인 면에 집중해야 한다. 내적이고 영적인 면은 효과가 얼른 드러나지도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림에 비해,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눈에 확 드러나고 효과도 훨씬 빨리 나타난다. 그래서 영적이고 내적인 것보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기 쉽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는 커다란 건물을 짓고, 여러 사업을 벌이며 과시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 망조가 들게 된다. 무리한 사업을 벌이다 보니 자금이 부족하고 그래서 변칙을 쓰다 보니 문제가 되어 조사받게 되는 법이다.

교회가 사업을 벌이려면, 무료병원이나 무료급식소나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기관설립 같은 종류의 사업을 해야 교회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이익과 성과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가 망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5. 주교들 견제 문제

그렇다면 독선과 권위주의와 불통에 빠져 있는 잘못된 주교를 도대체 누가 견제하고 벌할 수 있는가? 주교가 사제에게 쉽게 내리는 면직, 정직, 휴직의 벌을 잘못이 있는 주교에게 누가 내릴 수 있나?

주교들에 대한 유일한 견제가 바로 교황의 대리자인 ‘교황대사’다. 교황대사는 교황청과 국가 사이에 외교 역할도 하지만, 주교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중요한 의무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황’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주교들이 사제들과 ‘합심’하여 사목을 ‘훌륭하게’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 지도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교황대사가 문제 있는 주교나 잘못된 주교단의 결정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않고 직무를 유기한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보통의 문제일까?

그런데 불행히도 현재 주한 교황대사관은 기대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서울 중견사제들에 의하면, 정년퇴임으로 떠난 대사는 문제가 심각하였다.(2013년초 “함께 하는 사목”, <한국일보> 5월 14일자, <한겨레> 5월 15일자에 게재된 서울교구의 중견사제들의 평가 참조) “주교 임명제청권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고 ....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며 “한국의 주교님들, 실업인들, 돈푼 깨나 있는 신자들을 불러들여 식사 대접하고 그것을 기회 삼아 돈푼 깨나 받았다”는 평가다.(이 소식은 교황청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마찬가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교들을 두둔한다는 상당히 일리 있는 ‘의심’을 받았다.(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교황의 조사가 필요하다) 교황대사는 다른 나라에 가지도 않고 정년퇴임하기까지 9년 넘게 꿀단지 같은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서’ 문제 있는 주교들과 주교단의 ‘문제점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은 당연하다.

‘문제점들’이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한국 주교들의 독선과 독재와 횡포와 권력남용(대표적인 것이 무리하고 과도한 면직, 정직, 휴직의 벌)이다.

다른 한 가지는, 주교들의 잘못으로 인해 사제들이 사회의 조사와 처벌을 받게 되고, 그 이후에도 사전대처능력이나 수습능력이 없어 과거의 관행들과 잘못들이 계속 언론과 사회에 노출되어 계속 조사와 벌을 받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되며, 한국교회 전체가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사회복지기관들이나 병원들이나 학교들 등의 대(對) 사회기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위의 두 가지 문제들에 연관된 주교들의 광범위한 피해를 가져오는 장기적이고 반복적인 잘못은 정말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한 교황대사관’은 ‘지금까지’ 주교들과 주교단을 조사는커녕 제대로 지도 감독하지도 않고 단 한 번의 ‘구체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오랫동안 시간을 끌며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잘못은 얼마나 막중하겠는가?

나아가서 각 교구의 거대한 건물 축복이나 외적인 과시행사에 교황대사는 초대받아 거의 다 참석하니, 이는 주교들의 그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치중을 견제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주교들’의 독선과 독재와 갑질과 우둔함과 무능함 등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주한 교황대사관’이 주교들을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막중한 의무를 태만히 하고 방기하고 있다고 의심받고 비난받고 있음은 당연하다. 나아가서 ‘교황청까지’ 원망을 받고 있다.

주교들은 매년 서품식 때마다 “나와 내 후임에게 존경과 순명을 약속합니까?”하고 묻는다. 이 사진은 이 기고문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교회 ‘내부적으로’ 쇄신과 개혁을 위해 수년간 여러 개인과 단체가 약 6년 전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여러 곳’(주교, 교황대사관, 교황청)에 ‘여러 번’ 호소와 건의와 바른 소리와 항의 등으로 온갖 ‘발버둥’을 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지금까지’ 계속 무시되고 묵살되고 나아가서 ‘괘씸죄’가 되고 있다. 따라서 도무지 방법이 없기에 결국은 차츰차츰 교회 ‘외부적으로’ 공개되고 ‘사회의 힘’이 개입하게 되고 온갖 망신과 추락이 뒤따르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그 추락하는 교회가 주교나 교황대사나 교황청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에 그 잘못과 죄는 얼마나 크겠는가?

한국 ‘주교들’의 잘못이 크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 주교들의 문제점들과 상황을 오래전부터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직무를 유기하고 방치한 ‘주한 교황대사관’, 그리고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문제 많은 교황대사를 9년 넘게 놔두면서 지도 감독하지 않고 방치한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 않겠는가?

사회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횡포와 갑질 혹은 우둔함으로 지사를 망치는 지사장의 죄,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잘 알면서도 감독하고 견제해야 할 의무를 방치하고 소홀히 한 본사의 감독관과 회장의 죄, 과연 이 중에 누구의 죄가 가장 크겠는가?

 

6. 한국 교회의 모습

나라나 기업이나 교회의 모습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명하고 좋은 지도자’와 ‘현명하고 좋은 측근 인재들’의 경우

전자가 후자를 발탁하여 조언을 들으며 합심해서 일해 나가는 이 경우가 최선이다. 모든 조직은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만 하며, 특히 교회의 경우에 그렇다.

(2) ‘현명하고 좋은 지도자’와 ‘우둔한 함량 미달의 측근들’의 경우 혹은 그 반대로 ‘우둔한 함량 미달의 지도자’와 ‘훌륭하고 좋은 측근들’의 경우

‘현명하고 좋은 지도자’가 ‘우둔한 함량 미달의 측근들’을 뽑아 곁에 데리고 있을 리가 없으니 이런 경우는 잘 없다.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독재하기 위해 우둔한 측근들을 거느릴 수는 있지만, 그런 지도자는 머리는 좋지만 ‘현명하고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간악하고 나쁜’ 지도자다.

거꾸로 ‘우둔한 함량 미달의 지도자’는 ‘현명하고 좋은 측근들’을 찾거나 뽑을 줄도 모르고, 데리고 있을 줄도 모른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은 우둔한 함량 미달의 지도자 곁에 견딜 수가 없고 또한 언제든 독박을 쓸 수 있기에 즉시 물러나거나 곁에 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도 잘 없다.

(3) ‘보통 수준의 지도자’와 ‘보통 수준의 측근들’ 경우

많은 경우가 이 경우일 것이다. 조직은 그럭저럭 운영되어 갈 것이며 잘해 봐야 현상유지 정도이며, 개선이나 발전이나 도약은 있을 수 없다. 장차 여러 가지 문제가 누적될 가능성이 있다.

(4) ‘우둔한 함량 미달의 지도자’와 ‘우둔한 함량 미달의 측근들’의 경우

이것은 최악이며 곧 멸망한다. 온갖 문제와 무질서와 사건들이 줄줄이 생기며 수습하거나 해결할 능력이나 의지도 없다. 무능한 지도자는 소수의 측근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법이니, 그 측근은 지도자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직접 조직을 운영함으로써 권력서열이 뒤바뀌기도 한다. 우둔한 자들이 모여 우둔한 결정을 하게 되니 잘못이 많아 피해가 대단하다. 위기에 미리 대처할 능력이 없으니 과거의 잘못된 관행까지 모두 드러나 과거의 직원들까지 조사받고 벌받게 된다. 시간을 끌며 뭉개거나 외압이나 행사하려 하지 제대로 해결할 마음이나 능력이 없다. 우둔한 측근들은 우둔한 지도자의 비위나 맞추거나 시키는 대로 하다가 나중에 모두 줄줄이 벌받게 된다.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 교구들의 모습은 대부분 3번의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1번의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며, 4번의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교회는 결코 3번이나 4번의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1번의 경우여야 한다.

가톨릭의 교회제도는 중세의 국가제도를 닮았다. 성주가 그 관할 지역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각 성주는 서로 독립적이다. 다만 왕이 성주들을 감독하고 통제한다.

요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 인권 존중, 갑질 근절, 적폐 추방 등으로 인해 특히 우리나라가 급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주교들과 교황청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중세 국가제도를 유지하고서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있을까? 권력욕과 독선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는 자세, 소박한 자세, 청빈한 자세, 섬기는 자세가 오늘날 한국의 주교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아울러 주교들의 외모도 중세적이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누런 긴 지팡이를 짚고, 벌건 옷을 입고 거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을 것이다. 외모부터 자동으로 권위를 부리게 되어 있으므로, 외모부터 소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사실들, 특히 사제에 대한 징벌을 담합해 결정해서 실행하고 있는 이유 등을 고려해 볼 때에, 현재 한국 주교단의 분위기는 권위와 권력과 통제를 위주로 하는 중세시대의 못된 성주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물론 소수의 훌륭한 주교도 있겠지만, 주교단의 분위기가 그러한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교들은 우리나라의 이전 두 정부의 모습(권위, 불통, 갑질, 얼음, 무법천지),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현재의 정부의 모습(섬김, 소통, 소박, 따뜻함)에서 살아 있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요즘의 신자들은 별것도 아닌 것으로 걸핏하면 사제들을 주교에게 고발하는 것이 유행이다. 즉 비위를 잘 맞추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시국관에 있어서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단순히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주교들은 그러한 고발에 귀를 기울이기 쉽다. 사제들은 위에서 아래에서 양쪽으로 압박을 받으니 소신껏 열심히 사목할 맛이 나겠는가? 주교들이 벌을 내리려면 ‘만만한’ 사제들에게만 벌을 내릴 것이 아니라, 안 만만한 신자들(본당)에게도 그러한 벌을 내려 기강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과거에 현명한 주교들은 못된 본당의 경우에 사제를 빼 버리고 상당 기간 파견하지 않은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주교의 '명령'은 절대 '순명'을 요구한다. 이 사진은 이 기고문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7. 개선 방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 자체적으로나 다른 종교와 연합해서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위에 지적된 심각한 문제들을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이다. 500년 전의 잘못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웬일로 무슨 일인지 주교단에서는 1월 20일경에 “주교의 사제에 대한 자부적(慈父的) 사랑”에 대해 모여서 하루 반 정도 동안 주교연수를 한다고 한다. 지난 12월 중순에 전국의 사제들에게 그 주제와 관련해서 주교들에게 바라거나 개선되어야 할 점들에 대해 “허심탄회한” 설문조사까지 실시했다. 횡포와 만행을 “자부적인” 모습으로 180도 정반대로 갑자기 바꾸겠다는 것인가?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거린다.

현재 한국의 주교들은 “주교의 사제에 대한 자부적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그 주제에 대해 주교들이 모여 아무리 연수와 토론과 결정을 열심히 한다 한들, 위에 언급된 굳어진 잘못된 심성이 180도 정반대로 갑자기 바뀌기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척하며 언론에 선전하며 생색이나 내고 끝낼 가능성이 많다. 그런 형식적인 모임보다 다음의 구체적 개선방안들이 필요하겠다. 가톨릭 교회 쇄신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이유가 다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1) 수년간 굳어진 주교들의 생각과 실천이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도록 참된 회개와 실천이 필요하다.

먼저 권위주의와 권력욕과 독선과 횡포와 불통 등을 완전히 버리고, 섬김과 소통을 실천하고 인자로움과 덕스러움과 마음으로 다스림으로써 바람직한 분위기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법이나 징벌 없이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다스려진다(맹자와 노자)고 한다.

예수님을 처형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지독한 독선과 고집이 바로 ‘마귀’의 둥지요 터전이 아니던가?

군대나 정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하물며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는 특히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독선과 고집과 불통과 횡포와 징벌로 다스리려 하는가?

또한 물욕을 버리고 청빈을 실천하여야 하며, 물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것에 더 많을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건물 등 효과가 눈에 얼른 드러나는 외적이고 물적인 것들에 치중하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주교들부터 바뀌어야 사제들도 그 모범을 본받아 바뀌게 되고, 사제들 사이 혹은 사제들과 신자들 사이에도 바람직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주교들이 진정한 회개를 통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고서는 모든 방안은 형식과 가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실천이 최우선적이며 필요불가결한데, 실천이 불가능하면 명예스럽게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주교단의 분위기와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다.

(2) 주위에 ‘예스맨’과 ‘간신들’을 멀리하고, 숨어 있는 훌륭하고 현명한 인재들을 선발해서 가까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주교가 잘못을 할 때마다 미리 바로잡아 주고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그들의 말(비록 귀에 거슬리더라도)을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주교라 할지라도 절대로 한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장기집권하며 자신이 최고라며 독선과 독재와 권위주의와 불통에 젖어 있는 주교의 경우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1번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괘씸죄로 벌하려고만 할 것이다.

현재 주교들의 독선과 고집과 처벌로 말미암아 사제들은 입을 다물고 포기한 상태다. 언로가 막히면 잘못이 개선되지 않고 결국 파국의 길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당나라의 현명한 태종은 간관(諫官)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가장 경계한 것이 자신의 독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징 등 현명한 간관 여러 명을 늘 가까이 두고 어전회의에도 참석하게 하여 잘못된 결정을 미리 막았다. 또한 수시로 직접 바른말을 하는 ‘임무’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의 말을 기꺼이 들음으로써 옳고 좋은 정책을 펴 나가고 또 위기에 잘 대처해 감으로써 성공했다고 한다.(정관정요)

(3) 훌륭한 신임 교황대사가 부임하는 것이다. 교황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똑바르고 청빈한 정신을 가지고 돈봉투 안 받는 교황대사가 오는 것이다. 예의와 대접과 고마움이라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되는 돈봉투인데, 일단 이를 받기 시작하면 절대 견제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똑바른 교황대사가 와서 권위주의와 독선과 불통과 만행과 갑질과 무능 등으로 잘못하고 있는 주교들에게 가차 없이 면직, 정직, 휴직의 벌을 내리는 것이다.(마치 현재 주교들이 사제들에게 그러한 벌을 내리고 있듯이)

그런데 불행히도 민초들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훌륭하신 교황께 전달되거나 들리기나 할까, 그들의 말보다 주한 교황대사관의 말을 당연히 더 믿지나 않을까, 훌륭한 교황대사가 과연 올 수나 있을까, 또 훌륭한 분이 오더라도 곧 돈봉투에 구워 삶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교황께서 아직도 주한 교황대사를 임명하지 않고 망설이며 고심하고 있는 것은, 주한 교황대사관과 한국 주교들에게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4) 우둔하고 무능한 주교의 경우에는 도무지 방법이 없다. 심각한 파국으로 나아감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가 타격을 받기 이전에 어서 명예스럽게 자진 사퇴해야 할 것이다. 우둔할수록 그럴 마음이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극한 상황까지 가기 ‘이전에’ 어서 자진 사퇴를 권고 받아야 할 것이다.

위의 여러 가지 방안 중 그 어느 것도 결코 쉽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문제가 심각하다.

글을 맺자면, 주교들, 주한 교황대사관, 교황청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지금 한국 교회의 문제가 심각하며 쇠퇴와 파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의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무슨 수를 통해서든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이 ‘빠른 시일 내에’ 그대로 교황께 ‘직접’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분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속한 조사와 조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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