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시기는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일로 끝난다.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의미에 관하여 성찰하도록 초대받고 있다.아들의 하느님나라예수님은 왕이라고 주장했다 하여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 이것은 고발자들이 말하는 내용이고 예수님 자신이 빌라도, 왕(로마제국 황제)의 대변자인 빌라도에게 인정한 내용이다. 그 당시 왕의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었다.(루카 23,1-3) 유대의 왕인 예수님의 지위는 십자가 위편에 새겨 있다.(23,38)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신체적 처지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표지다. 이 사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마르코처럼 루카는 예수님이 고별담화를 하도록 한다.어려운 때의 분별루카 복음은 마르코의 복음과 매우 흡사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도 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루카 복음의 예수님은 몇 사람의 특별한 사람들이나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말씀들을 국한시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이 닿고 있다. 예언은 성전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지만,(루카 21,5-6) 그 이상으로 계속된다. 주님은 제자들이 될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오늘의 말씀들은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서 표현되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생명을 위한 존재루카 복음에서 처음으로 사두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그룹에 속한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많지 않으나 영향력, 재물 그리고 로마 권력과의 밀착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리사이와 적대 관계에 있지만 하느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들의 특권을 위협하고 있는 예수를 반대하면서 바리사이와 한 패가 된다. 모세를 그들의 권위로 내세우면서 사두가이들은 아무런 확신도 없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이번 주간의 복음은 루카의 가장 유쾌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서, 세리인 자캐오의 이야기다.부자루카 복음서는 자캐오가 우두머리 세리이며 부자라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있다.(루카 19,1) 그러므로 그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고참 세리이며 지배자인 로마인들과의 협력관계 때문에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자캐오는 의심할 바 없이 부자이며 돈을 만지고 있다. 예수님의 출현은 그에게 도전이 된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자캐오의 동기에 대해선 말이 없다. 다만 자캐오의 열정과 노력, 키가 작다는 사실 등을 말
이번 주간의 말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바리사이주의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다. 하느님나라에 이르는 길을 새기고 있다면, 이 두 가지 사이의 대조점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복음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들 중의 하나다. 다시 한번 이 비유가 루카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비유임을 주지하자. 복음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상의 인물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유혹을 받는 바리사이주의에 대해서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비유에서 주님
루카는 예수님의 삶에 있어 기도의 위치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제자들이 항상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도다.(바오로 서간에서도 비슷한 강조점을 발견한다.)하느님은 확실히 들으실 것이다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짧막한 비유는 기도의 효과를 보여 주고 제자들에게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환상적인 비유다.(루카 18,1) 우리 모두는 예수님 시대에 불의한 재판에 대한 제재가 없었으며, 과부는 정의를 얻지도 못하면서 늘 졸라 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늘 구절에서 과부는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을 현존케 하는 것인데, 그들을 죽은 과거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가까이 살아 있는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참다운 정화다시 한번 우리는 루카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구절을 대한다. 등장하는 지리적 위치에 관해서는 약간의 조작이 보이는데, 이야기 속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는 나환자들 열 명을 만난다.(루카 17,12)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번 주간의 말씀은 신앙의 무상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우리의 신앙을 늘이기복음은 사도들의 청원으로 시작한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질 필요를 느끼면서, 사도들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늘이고자 한다: “믿음을 더하려는” 것이다.(루카 17,5)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약간 놀랍다. 그분은 사도들의 청원에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신앙의 힘에 대하여 말한다. 특히 작은 시작으로부터, 겨자씨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큰일이 시작된다고 말한다.(17,6) 예수님이 말하려고
바오로의 동료인 루카는 가난의 문제에 대해 매우 예민하다. 루카와 바오로 모두가 돈에 대한 탐욕을 고발한다.돈의 연인들루카 복음에서만 발견되는 이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그들처럼 “돈의 연인들”인 모든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다.(루카 16,14) 비유는 재물의 문제를 다루는 장 안에 있으며, 루카 복음서의 두 가지 기본적 확신에 대한 강력한 해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확신은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루카 6,20)와 “부자들은 불행하다”(6,24)는 것이다. 오늘의 교재는 두 가지 매우 분명한 부분들을 담고 있다.첫 번
복음서는 예수와 복음사가의 물질재화에 관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렵지만 기본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약삭빠른 청지기?이 비유에 우리가 당황하게 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루카 16,8)로 불리는 관리인을 주인이 칭찬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16,9-13)의 내용은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 부분도 쓰인 대로 말하자면, 주제가 “우상(돈), 불의한 재물”(16,9)인데, 예수님은 이 재물이라는 수단으로도 친구를 만들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이렇게 타당치 않은 행위가 어떻게 예수
이번 주일의 독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의 친절한 말씨나 올바른 행위에 따라 제한되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런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은 우리 태도를 앞지르고 있다.복음화의 관점루카 복음의 구절은 하느님의 온화함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어떤 전문가들은 이 장을 루카 복음서의 심장이라고 여긴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중심적 주제들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느님의 솔선행위와 멀리 떠나간 것을 만났을 때 그분의 기쁨에 대해서다.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죄인들에 대한 관심(죄인이기 때문에 멸시받는 사람들이다)과
이번 주간의 복음은 복음서 교재들 중에서 가장 “거친” 부분들 중의 하나다. 처음에 읽어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제자들은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가”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것, 즉 우리의 가족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루카 복음은 시작된다.(루카 14,26) 매우 강한 구절이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한 동사, “미워하다”가 셈족의 표현방식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살고 있었던 당시 문화적 배
보상을 바라지 않기주님은 바리사이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초대되어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가까이 지켜보고 싶다.(루카 14,1)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분을 공격하기 위하여 언젠가 나타날 약점들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침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하고 말을 잃은 그들을 떠난다.(14,2-6)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높은 자리(아마도 중요한 식사였던 것 같다)만 찾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은 신랄한 메시지를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이번 주일의 독서가 가르치는 위대한 교훈은 바로 이 사실이다.좁은 문복음서는 예수님의 청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이 질문은 숫자에 관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거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13,24) 구원은 좁은
성경은 하느님 사랑의 선포가 항상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되풀이 말하며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뿌리에 닿기루카 복음서의 12장은 제자들에게 충고와 주의를 주고 있다. 예수님은 계속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분의 사명에 대한 반대가 더 공격적이 되는 것을 보고 그 결과가 어떠리라는 것을 예상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준다. 이번 주일의 말씀은 역설적 표현으로 쓰여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음모로 가득찬 현실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예수님은 평화, 심오하고도 지속적 평화의 사
믿음이란 항상 분명한 안전장치에 기반을 두는 쉬운 체험이 아니다. 이번 주일의 세 가지 독서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믿음의 의미와 이 믿음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들이 무엇인가 점검하도록 초대하고 있다.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어둠과 불안전함이 믿는 이들을 압도하는 것 같은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때에 상황들은 특히 우리의 믿음에 어려움을 주고 요구들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몹시 힘든 일로 나타난다.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 우리에게 상기해 주듯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보이지 않는 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선순위를 세워야 한다.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들을 상기시켜 준다.탐욕은 우상숭배다이 구절은 루카 복음에서만 발견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구절들이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절은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메시지에 대한 중요한 설명을 방금 끝마쳤다.(루카 1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종교지도자에게나 자주 던져지던 질문을 뜻밖에 예수님에게 한다.(12,13) 예수님은 이 분야가 당신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어떤 편도 들지 않으나,(12,14)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이번 주일의 독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의 차원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또한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세, 항상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친절한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라는 요청이다.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기루카는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기쁘게 자주 제시한다. 예수님의 삶에 있어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 루카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말해 준다. 예수님의 잦은 기도와 “압바,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는 고유한 모습은 아들로서의 체험을 그분의 영성의 내용으로 삼는 가장 최고의 징표다. 그것은 아무리 모순적인 캄캄한
수 세대 동안 숨겨져 왔으나 이제 드러나고 있는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신비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다.집의 여주인루카는 우리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루카 10,29-37) 이번에 루카는 놀라운 내용의 짤막하고 경이로운 장면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 복음 덕분에 매우 낯익은 두 자매들을 보게 된다.(루카 11장 그리고 12장)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어떤 정수로 이끈다. 즉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정수다.누가 나의 이웃인가?이번 주일의 말씀들은 신명기의 확신에 찬 말들로 시작된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신명 30,11) 하느님께서는 어떤 초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지막 판결에서, 하느님은 오직 매우 인간적인 어떤 것을 묻는다, 말하자면 사랑에 관해서다: 첫 번째,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신명 6,5) 즉시 이어서 “너의 이웃을 너처럼” 사랑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