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21일(연중 제16주일) 창세 18,1-10; 콜로 1,24-28; 루카 10,38-42

수 세대 동안 숨겨져 왔으나 이제 드러나고 있는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신비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다.

집의 여주인

루카는 우리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루카 10,29-37) 이번에 루카는 놀라운 내용의 짤막하고 경이로운 장면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 복음 덕분에 매우 낯익은 두 자매들을 보게 된다.(루카 11장 그리고 12장)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요하네스(얀) 페르메이르. (1654-55)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마르타의 환영을 받는다. 아람어로(예수님이 쓴 말) 그 여인의 이름은 “집의 여주인”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루카는 “그분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루카 10,38) 사람이 마르타라고 명시한다. 그렇게 예수님을 돌봄으로써, 마르타는 그분을 자신의 이웃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서 루카 복음서는 주님의 발밑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 어느 사람이 말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 역시 그 사람을 환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교사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여성들이 참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성들의 과제이며 책임이었다. 주님의 승인으로, 마리아는 그 법칙을 깨뜨리고 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루카 10,39)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다. “수 세기 동안 숨겨져 왔던 신비”(콜로 1,26)를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아는 권리, 제자가 되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 우정이 주는 신뢰를 갖고, 마르타는 예수님께 불평한다.(루카 10,40) 마르타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면서 사랑스럽게 예수님은 여성으로서 또한 집의 여주인으로서 소위 해야 할 역할에 묶여있는 그를 타이른다. 예수님은 여성을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그런 관념을 깨뜨리라고 초대한다.(10,41) 마리아처럼, 마르타는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주장하고 그 자리를 온전히 차지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몇 가지뿐이다

이것은 행동가 마르타에 반대되는 관상가 마리아라는 문제가 아니다.(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방금 구체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관상과 행동 두 차원은 모두 기본 차원이다. 예수님은 마르타의 관심에 응답하지만, 마르타가 자신의 일에 지나치게 또한 한정 없이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여성으로서 그는 또한 다른 관심사도 가질 권리가 있다.

몇 가지만 필요하다. 허기를 달래기 위하여, 우리는 잘 차려진 한 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간편하게”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관심은 실제로 중요한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리아는 “더 나은 것”을 택한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집안일들이 그러한 관심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들 사이에서 아직도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권리다.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은 여성들을 단순히 주부라는 부차적 역할에 고정시키는 관념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다. 항상 평등을 전제로 하는 예수님의 우정은 마르타와 마리아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인격체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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