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0월 27일(연중 제30주일) 집회 35,12-14.16-18; 2티모 4,6-8.16-18; 루카 18,9-14

'예수에게 질문하는 바리사이들', 제임스 티소.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번 주간의 말씀들은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바리사이주의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다. 하느님나라에 이르는 길을 새기고 있다면, 이 두 가지 사이의 대조점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복음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들 중의 하나다. 다시 한번 이 비유가 루카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비유임을 주지하자. 복음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상의 인물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유혹을 받는 바리사이주의에 대해서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가 제자들이 된다고 하여 자만하거나 다른 이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바리사이주의는 종교적 규칙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근거 아래(루카 18,12)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깨끗하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18,11)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교회에 속하는 우리 모두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위험스러운 모습이다.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겸손과 섬김의 자세이며,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은총인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살아가는 교회다.(18,13) 비유는 믿는 이들의 자만심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놀랍게도, 바리사이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자만심이 강한 그들은 세리들을 공개적으로 죄인이라고 간주했다)이 하느님의 높임을 받는다.(18,14) 아무도 이런 꾸짖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달음박질

단순히 형식적 종교생활은 다른 이들에 대한 열림과 투신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예수님의 현존을 받아들임은 그분의 일치된 삶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했고, 기도했으며 성경을 읽었고 또한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에 생명을 주었으며 특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했다. 주님을 모방하는 것은 하느님나라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2티모 4장) 이 과정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바치는 희생 제물에 의해 농락당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집회 35,14) 예배의 관습에 따르는 희생제물은 불의한 것이니, 그것들은 “하느님께 도달하기까지”(35,21) 쉬지 않을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모른 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35,16)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왔다. 하느님은 정의롭고 또한 정의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하면서 당신이 선호하는 사람들을 깔보는 이들을 거부하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무시는 그들이 따른다고 주장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들을 떼어 놓는다.

이 말씀들은 거짓 안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또한 진리와 윤리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옳은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회구성원들에게 결단을 내리는 그런 겸손함으로 그리스도교 믿음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