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씨알의 소리> 299호(2026년 1-2월)에 실린 글입니다.
“세울 꼬레아” 그 한마디에 엄청나게 바빠진 우리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세울 꼬레아”라는 외침 이후,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바빠졌다. 초등학교 시절인 그때 나라가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 정권은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반납하는 수모를 경험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자신감을 얻고 내친김에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신청을 했다. 그사이 박정희는 살해당하고, 신군부하에서 일본 나고야와 올림픽 유치 경쟁을 해야 했다. 결과는 서울이 나고야를 52 대 27 압도적 표차로 눌렀다. 기대하지 못한 결과이기에 ‘바덴바덴의 기적’으로 부른다. 당시 서울이 승리했던 데는 몇 가지 설이 있다.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냉전 지형에서 반쪽 올림픽이 되다 보니, 비교적 제3세계로 분류되는 한국에서 유치할 필요가 있었다. 또 일본에는 아식스, 미즈노 같은 굴지의 스포츠 기업이 있으니, 아디다스와 퓨마 같은 스포츠 기업이 있던 서독에서 한국을 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아디다스와 퓨마는 한 형제가 만든 다국적 스포츠 기업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에는 아식스 운동화가 정말 많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 한국은 유치 활동에 최선을 다했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성의 없이 여유를 부렸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이기도 하다. 하여튼 사마란치 위원장의 그 한마디가 한국이 아프리카에 붙어 있는지 아메리카에 붙어 있는지 알 길이 없던 세계인에게 새롭게 각인되는 기회가 된 사건이었단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 기억에 매일 저녁에 올림픽 관련 방송이 이어졌다. 특히 재미있게 본 것이 올림픽 명장면이다. 무엇보다 일장기를 달고 고독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달려 나간 한 식민지 청년, 손기정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외 흑인 육상 영웅 제시 오언스, 맨발의 아베베, 체코의 자토펙 등 올림픽을 빛낸 선수들이 소개되었다. 또 금메달 2개를 땄지만 마이너 리그 야구팀에서 뛴 이력 때문에 메달을 박탈당한 비운의 선수 짐 소프도 소개되었다. 원주민 출신인 그는 비교적 최근에야 명예를 회복했다. 초등학교 때 텔레비전 앞에서 올림픽의 역사를 보는 것은 무척 흥미진진하고 즐거웠다.
한창 올림픽을 준비하던 1980년대는 세상이 조금 더 다채로워져 갔다. 여기에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도 가세했는데, 여의도 국풍 81 열풍은 엄청났다. 비록 아주 비겁하게 도망갔지만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시작하던 '잊혀진 계절'의 가수 이용도 그때 데뷔해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신문마다 있던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그램 표에는 컬러 방송 표시가 등장했다. 시험 방송을 한 초기엔 모든 프로그램이 다 유색으로 나오지 않았다. 온 가족이 삥 둘어앉아 처음 컬러 방송을 보는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눈이 정말 아팠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나왔다.
당시 인기 많던 주택복권은 당첨금이 3,000만 원이었는데, 1983년부터 88년까지 올림픽복권이 당첨금이 1억 원으로 대폭 올라 주택복권을 대신했다. 이 복권으로 올림픽을 치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고자 했다. 1983년 4월부터 발행한 이 복권은 1988년 12월까지 발행하다가 다시 주택복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1987년과 88년 두 해 동안 ‘서머타임’이라는 요상한 제도가 있었다. 서머타임(일광 절약 시간제)는 예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닥 필요하지 않아 한동안 멈추었다. 올림픽 때문에 다시 도입된 서머타임으로 1시간이 앞당겨지고, 시차 적응을 못해 학교에 지각하기도 했다. 8시에도 하늘이 훤했다. 1시간을 빼앗겼지만, 다시 1시간을 되찾을 때는 잠을 좀 더 잘 수 있었다. 이처럼 불편했던 시간 조정이 결국 미국 <NBC> 방송사의 중계권료 때문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는 1984년 2호선 을지로 순환선이 개통된 이후로 볼 수 있는데, 1985년에 3, 4호선도 개통했다. 지하철이 개통되어 국가적 행사를 원만히 치르기 위한 교통 기반도 구축했다. ‘한강종합개발사업’ 또한 올림픽을 앞두고 이루어진 대대적인 사업으로, 지금의 한강변을 이루었다. 또 주 경기장과 체조 경기장 같은 주요 시설도 완공했다. 여러 기반 시설을 조성하고 각종 운동을 전개하는 등 총력전으로 올림픽을 준비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은 이런 올림픽 준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는 시험장 역할을 했다. 1970년 6회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다가 반납한 수모를 만회하고, 이를 통해 올림픽까지 바쁘게 준비했다. 거기에 또 얼마나 정치적 격변기였나.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없이 돌아간 1980년대였다.
하지만 올림픽은 수많은 사람을 삶의 터전에서 밀어내기도 했다. 올림픽 개최 이후 달동네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서울 재개발 지역 200여 곳의 시민은 하루아침에 쫓겨나야 했다. 상계동이 대표적이었다. 푸른 영상의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올림픽'(1988)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정부의 무자비한 정책을 비판했다. 올해 방영해 큰 인기를 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올림픽 성화 봉송 때문에 일터에서 밀려나는 장면이 나온다. 올림픽이라는 축제 속 깊은 그림자였다.
군사 정권이 준비하고 치른 올림픽이었지만
이런 비참한 일을 비롯해 올림픽을 마냥 반갑게 보기 어려웠던 건, 이를 선전 도구로 활용한 정치 권력, 즉 군사 정권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운동권은 올림픽을 반대하기도 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한 대학에서 열린 반올림픽 문화제를 관람했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대략 이랬다. 군사 정권의 정당성 강화, 전 세계에 분단된 한국을 확인시켜 주어 분단 고착화, 외채 증가, 에이즈 창궐 등을 내세웠다. 그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보다 20년 전에 열린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반대 투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올림픽이 반갑기만 할 수는 없었지만, 멕시코처럼 대규모 반대 움직임은 없었고, 올림픽이 군사 정권에게 반드시 유리하게 작용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군부가 움직인다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에서 그러한 소요 사태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자칫 개최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 올림픽을 앞두었기에 세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일정한 안전 장치 역할을 해 주었다. 또 혹자는 서울 올림픽을 마치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치른 과정에 빗대기도 했으나, 한국 시민은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물론 정권의 2인자 노태우는 체육부 장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이력을 쌓았으며,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올림픽 이후 당시 ‘물태우’로 불린 그의 공적이기도 한 북방 외교를 이끌었다. 1978년 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를 열고 자신감을 얻고 내친김에 신청한 올림픽이, 신군부에서 유치해 무사히 치렀지만 올림픽의 영향은 그들의 의도를 넘어섰다. 미래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역사는 무섭기만 하다.
세계의 반쪽을 만나게 해 준 문화 혁명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에 미국 주도로 서방 국가가 불참하게 되었고 한국도 덩달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그러니 1984년 미국 LA 올림픽에 소련을 비롯한 위성 국가가 보복성 불참을 감행한다. LA 올림픽도 반쪽짜리였지만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손기정 옹의 금메달이 대한민국의 것으로 인정되지 못하니, LA 올림픽 전까지 한국의 공식 금메달은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딴 양정모 레슬링 선수의 금메달이 유일했다. (개최지 캐나다는 정작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4년 올림픽에서만 금메달을 6개나 획득했다. 꽤 괜찮은 성적이고, 서울 올림픽에 대한 기대치는 더 높아졌다.
드디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대부분 올림픽이 8월쯤 열리는데, 서울 올림픽은 하늘이 높푸른 9월 가을에 열렸다. 대회가 열리는 내내 날씨가 좋았다. 세계 수많은 나라의 대표와 국민이 대한민국으로 몰려왔다. 각 나라는 알파벳순이 아니라, 한글 ‘가나다라’순으로 입장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여주인공 덕선이가 맡은 일이 각국 대표가 입장할 때, 우리 식으로 표기한 각국의 이름 팻말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올림픽 예행 연습에서는 조선(북한)의 참여를 전제로 하기에, 공식 명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일간지에 그 장면이 찍힌 사진을 보고야, 북한의 공식 명칭을 제대로 알았다. 여전히 남북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 북한에서는 남북 공동 주최까지 주장했지만 결국 몇 안 되는 서울 올림픽 불참 국가만 되고 말았다.
또 올림픽에는 엄청난 군인이 투입되었다. 1988년 3월 ‘서울올림픽 지원사령부’를 창설해 올림픽을 지원했고, 그 부대는 그해 11월 해체했다. 둘째 형이 지원사령부에 근무해서 면회 간 적도 있다. 폐막식 때 사용한 관객용 도구 세트와 호돌이 배지 그리고 올림픽 경기 관람권 등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수많은 나라가 입장했다. 그중에 우리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가 꽤 많았다. 도덕 또는 윤리 교과서에 등장하는 ‘할슈타인 원칙’, 서독의 외무부 차관에게서 비롯된 동독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외교 원칙이 남한에서도 통용된 시절이다. 중국, 지금의 러시아인 소련, 동유럽의 여러 국가는 외교 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런 나라에서 온 선수들을 한국인들은 손님으로 환대하고 반겼다. 반면에 당시 미국의 행태 때문에 반미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경기에서 한국 관객은 소련 팀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동안 전혀 볼 일 없는 세계 반쪽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문화 혁명이었고, 이어질 정식 수교의 예행 연습이기도 했다.
개막식에 등장한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아이는 소박하면서도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을 맡은 이어령 선생에게 그 의미를 들었는데, 그때 사용한 굴렁쇠는 대한민국 첫 ‘예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폐회식에서는 장중한 다듬이 소리로 시작해 청사초롱 불을 밝혔다. 한국의 멋이 그대로 세계인에게 잘 전달되었다.
한국인은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만끽했고, 여러모로 성과도 좋았다. 한국 팀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 스포츠 대회는 스포츠 국가주의의 힘을 확인하게 해 준다. 한국 팀이 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개인이 외국 팀과 경기할 때는, 그의 종교도 정치 성향도 묻지 않는다. 단지 우리 팀으로서 외국 팀과 경기해 이겨 주면 우리의 영웅이 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것이 은폐되고 조작될 여지도 있지만, 가뜩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갈라진 상태에서 그렇게라도 통합하는 시간을 갖는 면에서 보게 된다.
올림픽 그 이후 상전벽해
아시아에서 올림픽을 치른 나라는 대한민국, 중국, 일본 3개국뿐인데, 이 세 나라가 각각 동계 올림픽까지 개최했다. 1964년 동경 올림픽은 일본의 전범국과 패전국 이미지를 꽤 벗어나게 해 주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치욕과 수모의 근현대사를 경험한 중국이 다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복귀하는 무대였다. 그 사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24년 만에 무탈한 올림픽이었다. 1968년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학생 시위대 학살, 1972년 서독의 뮌헨 올림픽은 ‘검은 구월단’으로 인한 참사, 1976년 캐나다 올림픽은 인종 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의 불참, 1980년 소련의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반쪽이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은 큰 문제 없이 동서 양 진영이 대화합을 이룬 성공적인 올림픽이었다. 이를 계기로 식민 시기를 경험하고 분단 후 동족상잔을 경험한 가난했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 간 대한민국을 각인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에도 세계는 지금만큼 대한민국을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올림픽은 세계로 향한 대한민국의 힘찬 발걸음이었다.
올림픽으로 한 번 크게 열렸으니, 더는 나라의 문을 닫아 두기 힘들어졌다. 곧 엄청나게 까다롭던 해외 여행도 자율화 되고, 그동안 냉랭하게 지낸 여러 나라와 수교를 이어 갔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소외된 사람도 많고, 군사 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 시작된 측면이 있지만, 한국인의 의식 수준과 역량 성장은 그 성과가 그들에게 전유되는 것을 막아 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의 국내 수준 향상과 세계와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올림픽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환
<가톨릭평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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