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씨알의 소리> 296호(2025년 7-8월)에 실린 글입니다.
분단이라는 마술적 사실주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대표적인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현실’과 ‘환상’의 융합인 ‘마술적 사실주의’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신화, 상상, 환상 등을 통해서야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지역 질곡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 한반도의 분단 상황도 꼭 마술적 사실주의의 한국판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은 감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983년 남한 사회 내 이산가족 찾기를 보면서, 이후 헤어졌던 남과 북의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매번 놀라곤 한다. 대륙과는 꽉 막혀 섬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남한 사회에서 어처구니없는 ‘적색 공포증’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디엠지(DMZ)와 휴전선을 둘러싼 긴장, 실향만의 비통함 등 분단을 둘러싼 많은 것이 어떨 때는 몽환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분단’은 하나의 상수로 작용해 때론 우리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정신을 억압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우리 삶은 분단 체제와 깊게 엮여 있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로, 아버지의 대부분 가족이 고향을 등지고 남한에서 터를 잡았다. 우리 집안에는 고모 두 분이 계시다. 한 분은 아버지의 손아래 친누이이고, 한 분은 아버지의 사촌 누나다. 아버지 사촌 누나인 제기동 고모의 남편,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모부는 한쪽 팔이 없으셨다. 고모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전투 중에 한쪽 팔을 잃으셨다. 평소 뵐 때는 무거운 의수를 차시는데, 어렸던 나는 그 손을 톡톡 치며 노는 걸 재미있어 했고 고모부는 그렇게 장난치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어느 여름날 제기동 고모부 댁에 놀러 갔는데, 의수를 빼고 계신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고모부는 아주 홀가분해 하셨다. 의수를 껴야 했던 팔이 오른쪽인지라 악수를 비롯해 모든 일을 왼손으로 하셨다.
제기동 고모는 남편이 국방군으로 참여해 큰 부상을 입었는데, 자기 여동생의 남편은 인민군이었다고 한다. 한 가족이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갈려 싸웠던 것인데, 적지 않은 가족이 그러했으리라. 제기동 고모부는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때 곧 통일이 되리라 기대하며 펑펑 우셨다고 한다. 그때 당시만 해도 전쟁이 끝난 지 채 20년도 안 되었을 때다. 속된 말로는 ‘삼팔따라지’라고도 불렸던 실향민은 한국 사회의 내부 난민이자 이주민으로, 그들은 ‘실향’이란 근원적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실향민은 머지않아 고향을 찾을 수 있으리라 꿈꾸었을 테지만,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한평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부모님의 고향이 이북인 사람에게 북한은 완전히 다른 나라일 수 없는데, 그 기억이 끊기면 정서적으로도 북한은 더욱더 다른 나라로 다가오리라.
‘분단에 막힌 섬’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일제 강점기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끊고 파리까지 갔던 낭만은 강점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갈라져 꽉 막히지 않고 대륙과 이어진 웅건한 기상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섬은 시원하게 사방이 바다로 뚫려 있기라도 하지, 지금의 한반도 남한은 섬보다도 못하다. 예전 파주 지역에서 건너편 북녘땅을 바라보는 것도 무척 몽환적이다. 여러 방식으로 우리 삶을 규정해 왔던 ‘분단이란 마술적 사실주의’는 동시에 수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동포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시절
남을 향해 ‘남조선 괴뢰 도당’이라 불렀던 북이 정식 국호 ‘대한민국’으로 남을 지칭할 때, 썩 반갑지 않았던 것은 이젠 대화도 필요 없고 각자의 길을 가자는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가도 남한의 국가처럼 ‘애국가’라고 하는데, 그 가사에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반만년’, ‘삼천리’ 같은 말이 담겼으나 그조차 바꾸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많은 징조가 심상치 않으며 우울감을 자아낸다.
설마설마했던 윤석열 정권의 국지전 계획이 정말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남과 북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다. 다행히 정권이 바뀐 후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자, 북한에서도 대남 소음 방송을 중단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휴전선 일대의 주민에게는 얼마나 큰 평화가 찾아온 것인가.
지금은 이런 작은 평화에 기뻐할 만큼 경색된 남북 관계이지만,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꿈 같은 시절도 분명 있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도착해 김정일 위원장과 손을 꼭 잡는 장면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시작으로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북을 오가며 남북 관계는 크게 개선되는 듯했다. 남과 북은 통일이란 대의는 물론이거니와 이익조차 공유하는 민족의 공동 번영을 꿈꾸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을 비롯해 남과 북의 교류도 무척 활발했다. 그 와중에 비극적 참사이지만 남과 북이 더욱더 깊게 유대하게 했던 사건이 있다.
바로 2004년 4월 22일 일어난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 열차 폭발 사고다. 룡천은 함석헌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데, 이 사고로 초등학교가 통째로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탄에 빠진 북쪽 동포를 돕기 위한 남쪽의 움직임도 분주했다. 민주노총 등 9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를 비롯해 남한 사회 각계에서 룡천 지역 재건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김이경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룡천역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좀 지났다. 룡천역 주민들에 대한 남쪽 주민들의 지원은 참으로 적극적이었다. 그 어떤 사회단체도, 정당도 또 언론사도 룡천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남북 간의 정당한 경제 협력까지도 ‘퍼주기’라며 비난하던 모 신문사가 1억의 룡천 지원금을 내는 것을 보면서 세상 참 많이도 변하고 있다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김이경, '우리겨레 하나되는 길 머지 않았다', 2004.6.1, 참여연대 누리집)
이 이야기를 통해 룡천 돕기가 얼마나 뜨겁게 펼쳐졌는지 잘 알 수 있는데, 그 무렵 국민카드에서 룡천 돕기에 관한 전자우편 하나가 왔다. 카드 포인트를 통해 룡천을 도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카드 포인트를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 포인트로 룡 천을 도울 수 있다는 소식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때 포인트로 기부한 금액이 2만 4970원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동안 누적된 포인트를 모 두 기부했다. 카드 포인트를 통해서도 기부하게 할 정도로 룡천역 폭발 사고 이재민을 위한 지원 사업은 전 사회적으로 활발했던 셈이다. 포인트를 기부하고 받은 영수증과 감사의 편지다.
‘분단’을 넘어선 훈훈한 기억을 되살려야
지금은 한때 불었던 남과 북의 훈풍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남과 북은 다시 대치 국면으로 둘 사이에 더 두꺼운 벽이 생겨 버렸지만, 그럼에도 통일과 평화를 향한 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 21년 전 룡천 참사는 수십 년간 서로 적대하고 혐오하던 남과 북이 언제라도 더 가까워지고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룡천역 사고 이후 어떻게든 돕고 싶은데 때마침 전자우편 하나를 보고 알량한(?) 기부를 하고 뭐라도 할 수 있어 기뻤다. 아마 그곳에 갈 수만 있었다면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 때처럼 많은 사람이 가서 도왔을 것이다. 직접 갈 수는 없고 어떻게든 돕고자 돈을 내고 마음을 보탰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 영수증과 감사 편지를 보면서 그때 느낌이 머릿속에서 영화 필름처럼 펼쳐진다. 룡천의 기억은 지금 남과 북의 현실 앞에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일단 통일은 긴 호흡으로 두더라도 남과 북이 사이좋게 서로 교류하는 이웃이 되는 지혜가 절실해졌다. 머지않아 남과 북 사이에 또 한차례 훈풍이 불어오리라 믿는다. 그때엔 정말 돌이키기 힘든 평화의 이정표를 세워 두어야 하리라. 우리에겐 이제 분단을 넘어선 생기 넘치고 웅건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분단의 상처를 꼼꼼하게 치유하고 더욱더 건강해지는 이야기, 반목과 편견을 넘어 화해하는 이야기, 분단의 벽을 깨고 한판 ‘대동’을 벌이는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나가야 한다.
김지환(파블로)
<가톨릭평론> 편집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