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기대와 소망 속에 출발해야 할 새해지만, 2026년 초의 세계 정세는 어둡고 난폭하다. 1월 3일, 미군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현직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와 그의 배우자 실리아 플로레스를 체포한 뒤 미국으로 압송했다. 트럼프는 마두로를 마약 범죄 및 테러 연루 혐의로 기소하고, 권력 이양이 완료될 때까지 미국이 베네수엘라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우선’을 외쳐 온 그의 행보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지만, 국제 규범을 정면으로 무시한 채 타국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한 이번 사태는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트럼프는 ‘폭정 종식’이나 ‘인권 보장’ 같은 도덕적 명분조차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노골적으로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을 장악하겠다고 밝히고, 미 석유 업계의 참여와 투자를 독려했다. 그의 폭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그린란드 통제권 확보를 위해 군사력 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노르웨이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8개 이상의 전쟁을 멈추게 했음에도 귀국이 내게 노벨평화상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순전히 평화만을 생각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평화가 여전히 우선이겠지만, 이제는 미국에 무엇이 좋고 타당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분은 물론 위선마저 던져 버리고, 오직 미국의 국익만을 앞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트럼프의 이런 모습은 왕정 시대의 군주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트럼프는 ‘왕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는 뉴욕의 ‘트럼프 타워’를 비롯한 여러 호텔과 골프장 등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새겼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를 ‘도널드 J. 트럼프-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로 바꿨다. 게다가 미 해군의 새로운 전함을 ‘트럼프급’(Trump Class)으로 명명하고, 정부 운영 의약품 구매 플랫폼도 ‘트럼프Rx’라고 이름을 붙였다. 정부 및 공공 영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는 올해 발행할 1달러 기념주화에 트럼프의 초상을 넣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는 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왕적 대통령’인 것은 분명하다. 반트럼프 시위 현장에서 “No Kings”(왕은 [필요] 없다), “Democracy, Not Dynasty”(왕조가 아니라, 민주주의), “No One is Above the Law”(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같은 구호가 열정적으로 외쳐지는 이유다. 모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을 선서한다. 이는 군주적 통치나 지배가 아니라, 행정 최고 책임자로서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미국은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군주제에 가까운 체제로 보인다.
21세기에 이런 ‘왕’(king) 같은 대통령을 보면서, 문득 20세기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킹’(King)이 떠오른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다.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역사적 연설에서,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현실로 만들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분리의 어둡고 황량한 골짜기에서 인종 정의의 햇살 가득한 길로 나아갈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인종적 불의의 유사(流沙)에서 형제애라는 단단한 반석 위로 우리나라를 들어 올릴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모든 자녀에게 정의를 현실로 만들 때입니다."
하지만 그 ‘지금’은 지연되고 있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미국에 대한 킹의 꿈은 제왕적 대통령 트럼프에 의해 악몽으로 변질되고 있다.
미국에서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MLK 데이)이고, 1월 20일은 대통령 취임일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MLK 데이가 트럼프의 두 번째 취임 1주년 바로 전날인 1월 19일이어서, 트럼프가 무슨 말을 할지에 관심이 쏠렸다. 이날 트럼프는 하루 종일 침묵하다가, 늦은 저녁인 8시 15분에야 다음과 같은 말을 포함한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대부터 킹 박사는 모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가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우리 국가의 신념을 의기양양하게 재확인하게 될 운동을 개척했습니다.” 이런 성명을 읽으면서 트럼프는 과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킹 목사는 1965년 7월 4일 독립 기념일에 했던 〈미국의 꿈〉(The American Dream)이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이 주제[‘미국의 꿈’]를 선택한 이유는 미국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종, 모든 국적, 모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형제처럼 함께 살 수 있는 땅에 대한 꿈입니다. 이 꿈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숭고한 문구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를 자명하다고 여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그 권리 가운데에는 생명·자유·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여기서 킹이 인용한 문구는, 이번 MLK 데이에 트럼프도 인용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인용은 했어도 그 의미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만, 킹은 ‘미국의 꿈’의 중심에 ‘놀라운 보편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즉 독립을 선언한 이들이 꿈꿨던 것은 ‘일부’가 아닌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와 행복이었다는 것이다. 킹에게 이 꿈은 미국 정부를 다른 전체주의 체제와 구별 짓는 핵심 요소였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나라는 반미국적이다. 또한 그를 지지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회복하겠다는 ‘기독교 국가’는, 킹이 꿈꿨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미국과 거리가 먼, ‘반-하느님 나라’(anti-kingdom of God)의 악몽이다.
2026년은 미국 독립 250주년으로, 미국이 스스로 정의해 온 자신의 이상과 목적을 다시 묻고 새롭게 답해야 할 이정표적 해다. 새해 벽두에 우리가 목격했듯이, 트럼프는 타국 정치에 무력까지 동원해 개입하지만, 그 역은 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국제 사회의 양식 있는 비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미국 내부 양심 있는 시민의 저항이 중요하다. 특히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며, 극우 파시즘적 트럼프 정부의 설계자요 실행자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킹의 예언자적 외침을 기억하는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각성과 행동이 절실하다. No Kings!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있는 실천으로 트럼프의 악몽이 끝나고 킹의 꿈이 다시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연대한다.
정경일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를 비교 연구했으며 사회적 영성을 탐구하고 있다.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도학사 원장으로 일하면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4.16생명안전공원예배팀, 한국민중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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