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됫박 아래에 놓지 않고, 동경 위에다가 놓아 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누가 복음서 11:33, 표준새번역)
연초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그리스도인 유가족과 함께 드린 정기 예배에서 읽고 묵상한 성서 본문의 일부다. 예배 때마다 성서 본문을 유가족이 직접 고르는데, 그걸 보면 당신들의 지금 형편과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번 성구에서는, 또 한 해를 새로 맞으면서 직면하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유가족의 간절한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심전심이 되니, 말씀을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평소 좋아해 자주 읽는 본문이다 보니, 해석의 초점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읽는 자리와 맥락 때문인지 이번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독서를 마치고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데, 전에는 그리 주시하지 않았던 구절이 처음으로 가슴에 깊이 들어왔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였다. 번역에 따라 뉘앙스나 의미가 다를 순 있지만, 누구든지, 그러니까 특별한 누구, 비범한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나 등불을 켜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 나의 실존적 책임감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의심이 찾아왔다. ‘나 하나 등불을 켠다고 이 어둠이 사라질까?’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은 빛에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세력을 넓히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친 비관일까? 자본주의의 가장 폭력적인 양태인 신자유주의는 ‘모든 곳’을 ‘시장’으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변질시키며 극단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 20세기에 인류를 위협했던 극우 파시즘이 21세기에 다시 부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이란에서는 국지적 분쟁과 국제적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사회 내부의 타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극우화 흐름을 타고 더욱 난폭해지고 있다. 기후 변화는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재앙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 켜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그런데, 함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그들 역시 내가 갖고 있는 의심과 불안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 마음 한쪽에서 희망의 등불이 작지만 선명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켜지는 것이 느껴졌다. 희망을 앗아가는 어둠을 함께 응시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행동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희망의 이유가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곧 희망이었다.
물론 거대한 위기 앞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회적·생태적 위기는 전국적이고 전 지구적이어서, 내가 하는 행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지역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뭐든 해야만 한다고 각성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이 있다면, 지금의 어둠이 최악일지는 몰라도 최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변화의 기회가 있다.
비록 거대 자본과 권력의 전 지구적 위력에 비하면 미약하더라도, 낙관도 절망도 거부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파국의 속도를 늦추며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차이를 만들 수 없을 만큼 작은 자는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2018년 15살 청소년 툰베리가 시작한 1인 기후행동은 이듬해인 2019년 161개국 국제 청소년 운동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로 이어졌다. 2019년 3월 15일에는 약 160만 명의 청소년이 등교 거부를 했고, 이제는 거리 시위를 넘어 정책 참여와 산업 감시 등 지역 기후행동으로 활동을 넓혀 가고 있다. 모두 자신의 등불을 켠 개인들이다.
세상에는 될 것 같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될 것 같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희망’이다. 희망이란 결국 모든 게 잘될 거라는 낙관적 기대가 아니다. 심각한 기후 우울에 시달리던 청소년 툰베리가 국제 운동의 조직을 기대하고 낙관하며 손팻말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툰베리는 “[기후행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1인’ 시위를 한 것도 함께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의심과 불안 없이 낙관할 수 있다면, 어쩌면 희망은 불필요할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은 “희망은 어떤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일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하벨의 이 말을 인용하며 리베카 솔닛은 “희망이란, 약속되거나 보장된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희망은 행동을 요구하고 행동은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빛을 발해야 할 때다. 그 등불이 작고 희미해도 괜찮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작은 등불도 더 잘 보인다. 그리고 그 작은 등불들이 모이면 거대한 빛의 바다가 된다. 한국 사회의 어둠을 밀어냈던 ‘빛의 혁명’은, 저마다 들고 나온 작은 촛불과 응원봉 불빛 하나하나가 물방울처럼 모여 빛의 바다를 이뤄 낸 사건이었다. 세계 주요 정치 학회를 대표하는 정치학자들이 ‘대한민국 시민’을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우리 안의 소수자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 고통받는 비인간 존재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다시 한번 “누구든지 등불을 켜고” 책임 있게, 용기 있게 살아가는 새봄이 시작되기를…
정경일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를 비교 연구했으며 사회적 영성을 탐구하고 있다.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도학사 원장으로 일하면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4.16생명안전공원예배팀, 한국민중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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