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품식 풍경 단상
얼마 전 교구 부제 서품식이 있었다. 올해는 사제 수품자가 없고 부제 수품자만 두 명이었다. 사제 성소가 줄어들고 있음을 실감한다. 사실 성소 감소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출산율이 낮아지고 학령 인구의 감소 추세가 뚜렷하고 지속적인 상황에서, 사제 성소자가 증가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하지만 성소 감소가 단순히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일까. 한국 교회의 사제 성소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까지에는 단순히 학령 인구가 많아서였을까. 일반적으로 어떤 직종에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은 그 직종이 갖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장 때문이다. 그러나 사제 성소의 증감은 단순히 사회적이고 외부적 요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제직 자체에 대한 매력과 현실의 사제들이 보여 주는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깊이의 모습이 성소 증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혹시 이 시대의 사제직이 젊은이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제들의 표정, 사제들의 자세와 태도, 사제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이는 사제 삶의 모습과 사제들의 신앙과 영성이 그리 모범적이지 않다는 뜻일까.
서품식 도중 제단에서 바라본 신자석의 풍경이 조금 서글펐다. 주교좌 성당 안에는 노인분들과 중장년 신자분들만 가득했다. 축하식에서 수품자 본당 신자들이 현수막을 펼치며 수품자를 축하하는 장면을 보며 어느 선배 신부님이 탄식했다. 조금 서글프다고 말이다. 현수막을 붙들고 있는 분들이 다 노인분들이었다. 시골 교구이고 그 수품자의 출신 본당이 읍 단위의 본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당 신자들의 고령화를 실감하는 풍경이었다. 30여 년 전 우리가 서품을 받았을 때만 해도 학생들과 청년들이 서품식장에 가득했고, 축하식 때에는 그들의 환호 소리가 높았다고 기억한다. 불과 30여 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어떻게 희망을? 당위와 현실의 사이에서
성소 감소, 신자 고령화, 활력이 떨어진 본당. 이러한 현상들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교회의 문제지만, 교세 성장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우리 세대는 이러한 현실이 못내 버겁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교회의 현실을 정직하게 식별(분석, 진단)하고 새롭게 어떤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방향과 지향점을 몰라서 답답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고, 또 신학적인 당위적 설명과 사목적 제안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 윤곽을 안다.
1) 오늘의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토록 강조했던, 선교하는 교회,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공적 주체로 설 수 있어야 한다. 2)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이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여야 한다. 교회의 사목 방식, 의사결정 구조가 시노달리타스적이어야 한다. 하느님 백성 모두가 성사, 신앙 교육과 양성, 친교, 봉사의 장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선교하는 교회’와 ‘시노달리타스’는 레오 14세 교황이 최근 소집한 추기경 회의에서 채택된 이 시대 교회의 핵심 의제이자 과제다. 3) 사목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통치와 관리로서의 사목에서 돌봄과 동반으로서의 사목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거대 본당 중심의 사목에서 작은 공동체 중심의 연결망 형식의 사목으로 변환이 이뤄져야 한다. 고령화 시대에 맞는 사목 모델을 정립해야 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사목 방식을 수립해야 한다. 4) 양적 성장이 멈춘 시대에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의 질적 성숙에 집중해야 한다. 신자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고 신자들의 사회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신앙 교육과 양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도 오늘날 교회 변화와 쇄신을 위한 담론들은 대개 이러한 네 개의 범주 안에서 논의되고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물어봐도 이러한 틀을 제공한다. 사실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산출한 텍스트들을 자료화해서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의제들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개성적이지는 않지만,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 준다. 슬프지만!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적 설명과 제안은 흘러넘치는데, 왜 현실에서는 어떤 변화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을까. 여러 다양한 곳에서 변화를 위한 시도들이 많이 시행되고 있지만, 내가 어두운 시선이라 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한국 교회가 분명 위기이며 어떤 새로운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형식적인 전례와 행사 중심의 교회와 사목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다들 진단한다. 현실 진단과 문제의식은 교회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왜 실제의 장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하기가 어렵고 힘들까.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몸을 움직여 새로움으로 나아가기에는 과거의 관행과 관습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얽매고 있는 것일까. 왜 당위를 현실에서 실현하기가 어려울까? 관행과 관습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까.
공론장의 부재와 성직주의
한국 교회의 현실과 문제점을 진단하고 식별하고 토론하고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변화와 쇄신을 향한 다양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선포되고 논의될 수 있는 공론장이 절실히 요청된다. 미래 교회를 위한 변화와 쇄신을 향한 공적 담론들이 교회 안에 흘러넘쳐야 한다. 공론장이 부재하고 공적 담론 형성이 되지 않으니, 변화를 위한 시작점과 동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행사와 미담 중심의 보도에서 벗어나 교회 안의 구체적 문제들과 과제들에 관한 담론을 제안할 수 있는 교회 언론의 부재가 아쉽다.
성직중심주의가 한국 교회 변화의 걸림돌인 것은 분명하다. 성직자들의 회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회심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까. 물론 회심의 궁극적 동인은 성령이다. 인문적 관점에서 보면, 한 존재의 변화 가능성은 깊은 체험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공부를 통해서다. 이러한 능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수동적 차원에서도 인간의 변화 가능성은 존재한다. 즉 그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의 제도와 구조들, 그에게 제공되는 교육 과정,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일상의 문화들을 통해 영향을 받는다.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에서 체험과 공부,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차원에서 제도와 구조와 교육과 문화가 한 존재의 변화 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 사제들이 어떤 신앙적 체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된 후에도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공부를 하는 사제가 얼마나 될까. 수직적 질서를 강조하는 교계 제도와 성사 중심의 교회 구조는 어쩔 수 없이 사제가 강조되는 제도와 구조가 아닌가. 신학교 교육과 지속 양성 교육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일까. 사제들의 일상 문화가 사목적 관심과 신앙적 과제들에 집중하게 하는 영성적 문화라기보다는 접대와 취미와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세속적 문화가 아닐까. 사제들의 체험, 공부, 제도와 구조, 교육과 문화 등 전반적 영역의 현실이 어떤지 검토하고 재구성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 역시 요청과 당위의 발언이지만 말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작은 시작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선명하게 알고 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를 살아가는 방식, 신앙을 살아 내는 방식이 시노달리타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일은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이 정말 무엇인지,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고 양성하고 성숙시키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된다. 거대한 시작도 결국에는 작은 시작에서 출발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공적으로 이야기하자. 글쓰기, 강의, 대화 등 어떤 방식이든 공적 담론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자신만의 일을 하자. 경청과 대화의 작은 공부 모임들을 활성화하자. 의정부교구 어느 신부님이 본당에서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해 자기 나름의 노력을 보여 준 것처럼,1)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작게라도 실천해 보자. ‘성인들의 통공’ 교리를 믿는 우리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주님 안에서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이 바로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는 것을 믿는 신앙인이 우리 아닌가.
“너로 인해 희미하게 알게 되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조금씩 살아주기도 한다는 걸/ 서툴고 어리석고 나를 모르는 나니까/ 어디선가 조금씩 나를 불러주고 대신 살아주어/ 간신히 내가 나로 살아 있는지도 몰라”(백무산,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2)
1) 계간지 <가톨릭 평론>, 2025 겨울호, 84-91.
2) 백무산 시집,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 창비시선 527, 창비, 2025, 44-45.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