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갖고 노년과 죽음의 시간을 건너간다는 것은
상투적 표현이지만,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다가오는 날들이 기대와 희망으로서가 아니라 쇠퇴와 소멸로서 느껴지는 나이에 이르다 보니, 흐르는 시간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마다 아득해진다.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 간다는 것과 그 언젠가에 종착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확연한 예감은 자꾸만 감상적이 되게 한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노년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자주 다짐하지만, 마음은 쉽게 어두워진다.
늙어 가는 몸을 바라보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생각과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고 우겨 볼 수도 있지만 육체의 노화는 숨길 수가 없다. 정신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성숙시켜 나갈 수가 있지만 육체는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다시 젊어지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젊은 몸이 아름답고 눈부시다. 몸의 노화는 타자의 시선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몸의 노화는 쉽게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기도 하고, 때때로 늙어 가는 자신을 수용하지 못해서 스스로 폐쇄의 길을 택하는, 일종의 자기혐오 현상을 낳기도 한다. 사람들은 성형과 운동과 화장을 통해 몸의 노화를 은폐하고 저항하려 애써 본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몸과 마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몸이 늙어 가면 마음도 덩달아 낡아지기 쉽다. 그래서 어쩌면 노년의 시간은 부단히 생각과 마음을 더 수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이 주는 육체의 싱그러움을 표현할 수 없다면, 정신의 성숙과 아름다움은 보여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늙어 갈수록 공부와 수련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죽음이 아주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죽을 즈음에 어떤 마음을 느낄 것인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할지 가끔 궁금하다. 태어남의 순간도 인식 못 했듯이 죽음의 순간도 인식 못 할 것이다. 아마 죽을 때쯤 인간은 동물적(육체적?) 본능만 남고 생각을 놓치고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오직 타자의 시선과 의식 속에서 기억될 뿐이다. 나의 탄생은 부모님의 시선과 의식 속에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은 누구의 시선과 의식 속에서 기억될 것인가. 내가 나라는 자의식과 내가 생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인식은 삶의 여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주장처럼, “스스로를 성찰하고, 그 지식의 편린들을 모을 수 있는 자서전적 자아를 가진 마음”1은 생의 여정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나의 탄생과 죽음과 죽음 이후는 나라는 자아와 나의 인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과 기억 속에, 무엇보다 주님의 시선과 기억과 돌봄 속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상상한다. 솔직히 고백하면, 난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자아와 영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말이다.
죽는다는 것은 분명 쓸쓸하고 두려운 일일 것이다. 신앙인은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이승에서 죽음은 분명 쓸쓸한 일이지만 죽음 그 너머에 또 다른 희망이 있으리라 우리는 고대한다. 사제로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신에 찬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저 주님께 맡기며 믿고 희망할 뿐이다.
마종기 시인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쓴 두 편의 시가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아마도 50대 언저리에서 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80대의 나이에 쓴 것이다.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물빛1’)2
“우리가 죽어서 헤어진다 해도/ 다시 만나지 못할 지옥은 아니겠지/ ······ / 그러고 보니 너도 나도 죽는다는 게/ 그렇게 슬프고 원통한 일은 아니구나./ 그렇게 섭섭한 일만도 아니구나.”(‘그 나라의 양지’)3
죽는다는 일이 쓸쓸하고 슬프고 원통하고 섭섭한 일이 아니라고 시인은 속으로 희망 섞인 다짐을 반복하고 있다. 단순히 나이가 든다고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죽음에 관한 생각과 감정은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주변을 맴돌 뿐이다. 우리 생의 슬픈 운명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의 완성이고 또 다른 차원으로 건너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안달하지도 서러워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왜 이리 늙어 가는 것과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슬픈 감정으로 다가오는가. 신앙이 부족해서일까. 신앙 안에서 노년과 미래의 죽음을 견디고 수용하며 새롭게 나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탄생도 죽음도 죽음 이후도 다 주님의 시선과 돌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을 향해 가는 노년의 시기에 더욱 집중해야 할 일은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는 것임을 깨닫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신앙 공부(수련, 수행)의 여정을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성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은 성사를 중심으로 작동된다. 교회 공동체는 성사 거행을 통해 형성된다. 성사는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공동체가 함께 거행하는 일이다. 전례의 집전자와 참여자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성사는 위계적 행위가 아니다. 신앙인은 성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성사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신앙이 싹트고 성장하고 원숙해지는 자리 역시 성사의 장(場)이다.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성사 생활에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사는 분명 우리 신앙인 모두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킨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성사를 거행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는 신앙 공부의 여정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신앙은 일상 삶의 자리에서 고백하고 실천하고 수행되어야 한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성사 거행하기, 성경과 교리와 신학 공부하기, 일상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그 셋을 다 포함한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거행하기, 공부하기, 실천하기, 이 셋을 다 행한다는 의미다. 성사는 전례의 차원과 삶의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성직자는 전례 성사 안에서 사제(직무사제직)의 역할을 수행하고, 신자들은 삶의 성사 안에서 사제(보편사제직)의 역할을 수행한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성사가 거행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힘으로 작동될 것이다. 성전에서의 성사 거행이 삶의 자리에서의 성사 거행으로 나아가지(연결되지) 못한다면, 신앙은 성당의 담을 넘어서지 못하는 ‘방구석 여포’의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신념(식별, 해석), 자세와 태도, 살아가는 방식
성사를 거행하는 삶, 신앙을 공부하는 삶,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신앙인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아마도 그 신앙인은 신념과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을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신앙은 그 사람의 신념과 자세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신앙은 신비다. 어떤 한 사람이 지닌 신앙의 내적 본질과 실체를 우리는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 신앙은 결국 그 사람이 삶의 자리에서 보여 주는 성사적(가시적) 표지들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 노년을 어떻게 이해(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늙어 가는 몸과 죽음의 예감을 나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내 노년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어른이 되어 더 슬퍼졌지만/ 슬픔은 여전히 더 갈 데가 있는 것 같다.// ······ // ‘슬프겠구나’라고 말하면/ 슬퍼지는 것들이 있었다.”(허연의 시, ‘산을 넘는 소년’)4 시인의 고백처럼, 슬픔이 노년의 정직한 정서일 것이다. 하지만 슬픔에만 머문다면 노년의 생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해석하리라 다짐한다. 노년과 죽음의 문제 역시 복음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수용해야 하리라.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 의식이 살아 있는 한 공부하는 자세로 신앙을 배우고 성숙시키는 태도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권력과 명예와 인정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삶이 아니라 내가 정작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애써 다짐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의 시간을 죽는 날까지 소중하게 살아 내는 것이 신앙인의 소명이 아닐까. 신앙인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신앙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 내는 사람이니 말이다.
1) 안토니오 다마지오, "자아가 마음에 오다", 노민화 옮김, 그린비, 2025, 453.
2)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비채, 2010, 127.
3) 마종기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 문학과지성사, 2025, 24-25.
4) 허연 시집,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29.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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