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나의 스승
떠나야할 날이 왔다.
하지만, 내가 있었던 1주일 동안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있었던 민지의 아빠, 엄마도 아직 민지를 만나지 못했다.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데 남겨진 사람들을 두고 떠나려니 아예 인사 없이 그냥 갈까하는 생각이 계속 났다. 그때, 며칠 전에 읽어 둔 같은 교구 신부의 글이 생각났다.
“네 생각과 마음을 따르지 말고 지혜를 따라 행동하라”는....
그 ‘지혜’는 인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행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인사를 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 했다. 나중에 승현이 아버지는 인사하러 달려가는 내 뒷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칭찬이 따라오지 않았더라도 정말 그 경우에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따름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물론, 지혜를 따른 내 자신이 나름 대견(?)하기도 하다.
팽목항을 떠나면서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지난 1주일간은 내게 결코 쉽지 않았기에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후련함을 안겨 주었으나 너무도 빠르게 그런 후련함의 자리를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빼앗아 가곤 했다. 마치, 후련함과 안타까움이 내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자신도 그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문득문득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되뇜을 던져 주었다. 마치, 뭘 더 잘 할 수 있었겠어하며 안심시키려는 듯이.
주희 학생을 끝으로 체감 시간으로는 너무나 오랫동안 실종자의 발견이 보도되지 않았었다. 붙잡아야만 하는 희망과 스멀스멀 이따금씩 올라오던 체념 사이를 오가다, 안중근 학생이 올라왔다. 진도체육관에 갔을 때, 입구에서도 잘 보이던 중근이의 이름이 새겨진 야구 유니폼을 보았었다. 페이스북 친구로 알고지내다 그곳 팽목항에서도 직접 뵈었던 최호선 교수님은 SNS를 통해 무척 기뻐했다. 그분은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여러 유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중 중근이 어머님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았다. 나도 기뻤고, 세월호를 잊지 않고자 애쓰는 사람들도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내심 민지가 올라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 사이라는 게 곁에 있었던 시간의 양에 비례해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부서지고 있는 마음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이라면, 아무래도 함께 보낸 시간이 더 많은 가족의 자녀가 먼저 나오기를 바라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그런 바람이 있다는 걸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다.
그렇게 또 다시 애꿎은 시간이 흐르다 민지가 올라왔다. 나중에 승현이 아버지에게 들은 얘긴데, 민지가 발견되기 전날 민지 아버지가 그렇게 밥을 잘 드셨다는 거다. 컨디션도 무슨 이유인지 아주 좋았고 말이다. 그렇게 다음 날 새벽 민지가 발견됐다. 승현이 아버지도 승현이가 발견되기 전날 승현이가 꼭 올라올 것만 같아 큰딸 아름이에게 수의로 입힐 승현이 옷을 사오라고 부랴부랴 시켰다고 하셨다. 마음이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하면 먼저 몸이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저 깊은 무의식이 작동하여 몸에 사인(sign)을 주는 것일까.

안산에 갔다. 처음으로.
그 동안 차마 추모관에 가지 못 하고 있었다. 팽목항 두 번 다녀온 걸로 때우려고 했다. 하지만, 민지를 봐야 했고 민지 부모님을 뵈어야만 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안산으로 운전하며 가는 길에 민지 엄마, 아빠의 얼굴이 어떨지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죽은 건 알지만 찾지를 못 해 애태웠던 그간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딸을 마침내 찾은 엄마, 아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민지 아버지는 날 보자 정말로 환히 웃어 주셨다(물론, 이미 술이 들어간 상태이긴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축하드립니다.”하는 말이 나와 버렸다. 우리는 서로 껴안으며 기뻐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민지 엄마, 아빠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생각해 본다. 시신을 찾아 기뻐하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결국 다른 부모들처럼 너무나 억울하게 아이를 잃어 끝을 모르는 슬픔에 잠겨 계실지, 그냥 슬픔을 묵묵히 견디어 내며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분들을 위해 작든 크든 애를 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절대 넉넉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지탱하리라는 것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그들이 한 일의 일부였다.
개인적으로 난 이것을 배웠다. 결국, 우리여야 한다는 것을. 그 안에서 어떨 땐 중요한 일을 하기도 하고, 수많은 손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신자가 한 명도 없는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며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배웠고, 가치 있는 일을 통해 진정한 배움이 얻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배움은 관계를 통해 내게 왔다. 관계는 내게 스승이었던 것이다.
현우석 신부 (스테파노)
의정부교구 5-7지구 병원사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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