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에게 말 걸기

두 번째 팽목항 방문은 참사 36일째였다.

진도체육관에서 열리는 미사의 영성체가 끝날 즈음 유가족 중 한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주희(발레리아)의 DNA가 확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가족 입장에서는 기나긴 기다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의 소식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내게는 이제 유가족 중 신자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현이 아버지는 내게 가족 천막에서 자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를 하셨다. 가족들과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제의하신 것이다. 그래서 둘째 날부터 나는 A동 가족 천막에서 지내게 되었다. 가족 천막 앞에는 안산시에서 만들어 놓은 가족 휴게실로 쓸 수 있는 반쯤 개방된 천막이 있다. 천주교 천막에서는 미사나 기도시간에만 있었고 그 외에는 A동 가족 천막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곤 했다. 이튿날까지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만큼 넉살 좋은 사람이 부러운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시 내려온 유가족들이 없었다면 민지 부모님과 가까워지기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오죽하면 냉담하고 있었던 찬민이 아버지에게 민지 어머니가 혹시 나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냐 물어봤을까. 돌아온 대답은 “민지 엄마는 맞는 사람한테는 잘 해주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는…”이었다. 물론 나는 후자에 속했다.

저녁 무렵에는 진도 체육관에 가 있었다. 첫 번째 방문 때는 가보지 않았던 곳. 심호흡을 하고 처음 들어가 본 체육관의 분위기는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모를 것이다. 넓은 체육관 안에 열 가족 정도가 남아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몇 십 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그럴 용기는 도저히 안 나 주로 담배 피러 나오는 아버지들과 바깥 공기 쐬러 나오는 어머니들께 다가갔다.

가족 천막에서의 두 번째 밤. 승현이 아버지와 큰 딸 아름이는 서울 촛불집회에 올라가셨고 나는 혼자 자게 되었다. 체육관에 다녀온 뒤 천막에 돌아와 내 자리에 누워 있는데 천막 안에 있던 모든 가족이 다 나가는 것이었다. 100평정도 되는 넓은 천막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밖에 나가보니 길 건너편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아 야식을 먹고 있었다.

ⓒ현우석

다시 천막으로 들어와 혼자 누워 있으려니 상황이 썩 유쾌하지가 않다.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내려왔나’하는 생각도 얼핏 들고 꼭 ‘왕따’당하는 것 같은 마음도 올라와 팽목항의 해변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문제는 그 야식 천막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 혹시나 불러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과 본지 이틀밖에 안 되는 사람 불러서 어색할 거라는 생각이 교차하며 해변 길을 걸었다.

다음 날,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는지 담배 생각이 났다. 팽목항 구호센터에서 주는 물품은 없는 게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손톱깎이까지 준다. 다만, 두 가지를 안 주는데 술과 담배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들은 담배를 사서 피운다. 찬민이 아버지를 가게에 모시고 가서 민지 아버지가 피우는 담배 이름을 물어서 사다 드렸다(물론, 찬민이 아버지 것도). 그제서야 조금 있다가 어제 자는데 불편하지 않았냐고 물으신다. 마음속으로 나름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살짝 쾌재를 불렀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서 함께 하려는 마음을 보여드리는 것이 나의 숙제였고 내가 계속해야 할 노력이었다.

마침, 진도에 다시 찾아온 영남대 심리학과 최호선 교수님을 만났다. 말하자면 팽목항 선배님인데 이 분이 해 준 충고가 이후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신부님, 여기선 많은 일을 할 수가 없고, 많은 일을 하려고 해서도 안 돼요.”

실제로 그랬다. 같이 기다리고 같이 아파하고 분노하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다. 좀 더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분들은 장례를 치르고 온 부모님들이었다. 지금 와서 더 잘 알게 된 것이지만, 그냥 함께 ‘존재하기’가 실종자 가족들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었다.

하루는 천주교 천막에서 미사를 봉헌하는데 평화의 인사를 할 즈음 어떤 자매님이 들어왔다. 아들과 함께 들어와서는 누구를 찾는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려서 살짝 기분이 상한 채로 “누구를 찾으세요?”하고 물어보았다. 그 대답은 자매가 아니라 뒤따라온 어떤 남자에게서 들려왔다. “이 분은 단원고 2학년 누구를 찾고 계십니다.” 순간적으로 아직까지 올라오지 못 한 12명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 친구의 이름은 거기에 없었다. 그분은 이미 아이의 장례를 치른 상태였다. 참 마음이 아팠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았기에 미사 후에 피운, 몇 배는 늘어버린 담배는 맛이 참 썼다.
 

현우석 신부 (스테파노)
의정부교구 5-7지구 병원사목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