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한번 웃자!

오후쯤 첫날 밤 묵었던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이 오지 않았지만,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저녁을 먹고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은 닫혀 있었다. 뭔가 불안함에 형제님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서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불평과 함께.

진도 팽목항의 진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고 지점이 팽목항에서 바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체육관과 팽목항이 멀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사고 지점은 배를 타고 2시간은 가야 볼 수 있고, 체육관은 편도 1차선 도로로 20킬로미터는 가야 한다. 항구 근처에 국악연수원을 내어 드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던 이유도 참사 초기에 가족들이 체육관에서 팽목항까지 계속 왔다 갔다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자녀인지 네 자녀인지 몰라 DNA검사가 나오기 전까지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기에 혹시나하는 마음에 밤길, 새벽길을 두세 가족이 20킬로미터를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매일 진도체육관을 오고 가며 이 길이 자녀 확인을 위해 오가던 가족의 마음 아픈 길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안 그래도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더 가라앉곤 했다. 게다가 그날은 차 안에서 자야 하는 날이었으므로 돌아가는 길이 더 그랬다. 항구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와도 좋다는 문자가 왔다.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는 것이 당연히 나았으므로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때는 11시쯤. 불이 켜져 있으리라 예상했던 집은 여전히 어두웠고 문 역시 열리지 않아 난감함을 넘어 짜증이 나 버렸다. 전화를 해 봐도 집주인은 응답이 없어 귀가를 기다리며 차에서 30분을 잤다. 연락을 다시 해 봤지만 감감무소식이라 툴툴대며 다시 팽목항으로 와서 차에서 잤다. 이불이 넉넉하게 있어 춥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다음날 찌뿌드드한 게 차에서의 잠이렷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드디어 집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술 때문에 전화를 못 받으셨다는 게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에 이어 너무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답을 하고는 씻으러 갔다. '그 놈의 술이 웬수여~'라는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 천주교 수도자와 불교 승려가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바라보고 있다.ⓒ현우석

팽목항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샤워차를 이용하며 내일이면 떠나는데 어떻게 하면 민지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 1주일 동안 매일 얼굴 보며 지냈던 터라 이별의 술잔을 나누어도 괜찮으리라 판단하고 진도 시내로 나가 지역 특산물인 진도 홍주와 계절별미라는 방어 무침을 사들고 밤에 5호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5호실엔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지 아버지가 탈수증에 걸려 링거를 맞고 계셨기 때문이다.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는 민지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에 두 잔 정도로 술잔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방어 무침도 연신 맛있다고 하시지만, 그날따라 저녁을 많이 드셔서 배부르다며 몇 젓가락 뜨다 마는 모습에 난 내심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수 있나하며 아쉬움을 연신 토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들어간 나를 보며 "이렇게 챙겨 주시니 고맙다"는 말에 내 자신부터 작은 감동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모이니까 웃는다

또 다시 특유의 어색함이 그 자리에 찾아오자 민지네는 원군을 찾기 시작했다. 건넛집에 있는 양승진 선생님의 동생을 부르고, 자원봉사자 중 딸같이 여기는 청년과 다른 봉사자를 불러다 모았다. 어색했던 분위기는 양 선생님의 동생이 등장하자 금방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분은 내가 만난 재미있는 사람 중 손가락에 꼽히는 만담가셨다. 게다가 하루 전에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눴던 터라 이 분은 왜 날 안 불렀냐며 가벼운 타박으로 등장을 알렸다. 이 분 덕분에 한 시간을 넘게 웃음과 미소가 우리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고 너무 웃기는 얘기를 들을 때면 팽목항에서 이래도 되나 싶어 얼굴을 가려야만 했을 정도다.

예를 들어, 갑자기 천주교 신부, 수녀님들은 선견지명이 있으시다며 어떻게 우리가 이쪽으로 올 줄 알고 미리 천막을 옮기셨냐고 하는 통에 내가 얼굴을 가리고 웃자 신부님의 품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놀림까지도 방안을 재미있게 만들었다.(원래는 가족천막 옆에 있던 천주교천막이 선종 봉사자들 때문에 시신 수습 시설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나중에 가족들 거처도 그 곳으로 옮겼다).

나는 비록 원하던 속 깊은 얘기를 하지는 못 했지만, 대신에 내가 할 수 없었던 즐겁고 재미있는 자리를 팽목항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기회를 얻었다. 이 자리는 다시 한 번 진도에 내려오기 전에 받은 말씀 사탕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알려준 시공간이었다. 주님께서는 못 하시는 일이 없다는 그 말씀이 이렇게 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들의 탈렌트로 채워 주실 거라는 내용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팽목항에서의 이 작은 연대가 큰 의미는 가지지 못할지라도 각자가 맡은 역할이 모임으로써 유가족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웃음을 드리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함께 걱정하고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그런 자리로서 매김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팽목항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5호실을 나오며 민지가 어서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데 안 나오면 어떡하나하는 걱정과 함께.
 

현우석 신부 (스테파노)
의정부교구 5-7지구 병원사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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