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인간 존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위반이다

이 글은 <가톨릭평론> 34호(2021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작년 겨울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갔다가 그곳을 방문한 변희수 하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육군 기갑부대 전차 조종수였고, 영세명이 가브리엘라인 가톨릭 신앙인이며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 청년이다. 내가 신부라는 것을 알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요새 성당을 못 나가고 있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복무 중에 성별 위화감(젠더 디스포리아)으로 큰 고통을 겪자,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육군은 그가 신체 훼손에 해당하는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심신장애 판정을 내려 강제 전역시켰다. 변 하사는 인사소청을 제기했고, 그것이 기각되자 법원에 전역처분 취소소송을 내며 힘든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변 하사에게 이 모든 것은 절망과 부조리였다. 2021년 3월 3일, 그는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변 하사가 숨진 무렵 한 달 사이로 스스로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는 극작가 이은용과 인권운동가 김기홍도 있었다.

인간존엄: 한계의 윤리

육군과 달리 유엔 인권최고대표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이 ‘국제인권법 위반’이며 부당한 ‘인권침해’라는 점을 밝혔다. 인권이 무엇인가? 인권은 인간 가치의 최소값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삶을 위협받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힘 혹은 폭력에 직면할 때, 안전과 생존의 권리, 평등과 존엄의 가치는 최소한의 방어막이 된다. 그래서 인권학자 헨리 슈는 “기본권은 한계의 윤리”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 한계 아래로 추락하면 안 되는 임계선이다. 인권은 자명하고 당연한 권리다. 권리는 부탁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며, 선호나 감정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권은 근본적으로 인간존엄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존엄은 ‘지위’의 문제다. 누구든 자신의 삶이 다른 이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말한다. 내가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조절 능력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상태와 같다. 그렇지 않다면, 먼저 용기를 내어 그 상태를 돌아보라. 차별과 억압은 바깥에서 온다. 우리가 이런저런 능력과 장점이 있어서 존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 존엄하다. 차별은 배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이는 인간존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위반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말이 자주 잊히거나 무시된다. 

참된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와 책임을 조화롭게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체제를 말한다. 차별로부터의 자유를 옹호하고, 그에 따른 권리가 법의 보호를 받는 사회다. 또한 차별로부터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은 인종이나 성별에 근거한 차별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사회정의의 요구다. 그래서 물을 수 있다. 우리는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 넓고 깊게 스며들어 있는 혐오와 차별의 실상을 보고 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학력, 장애, 종교, 인종, 지역, 나이, 성별,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고용과 교육을 비롯한 네 가지의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 행위를 시정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최소의 사회적 장치로 제안되었다. 이 법안은 신념이나 신앙 같은 사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니며, 처벌이 아니라 피해자 구제 조치가 핵심인 연성 법안이다. 한국을 제외하고, 오이시디 안에서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는 모두 ‘차별금지법’ 혹은 ‘적극적 평등조치’를 실행하고 있다. 14년 동안 심의조차 안 되고 있어 한 사람의 손이라도 간절한데, 이 법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가 가톨릭과 개신교로부터 나왔다. 

2019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보수 개신교 단체가 "동성애의 죄악을 회개하라"며 시위하는 모습. ⓒ김수나 기자<br>
2019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보수 개신교 단체가 "동성애의 죄악을 회개하라"며 시위하는 모습. ⓒ김수나 기자

가톨릭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차별금지 법안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 조항이 동성애 행위를 옹호하고 성정체성을 자의적으로 규정한다며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발표했다.(2020년 9월 7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에서도 생명주일 담화를 통해 비슷하지만, 훨씬 거칠고 공격적으로 ‘가정과 혼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었다.(2021년 5월 2일) 하느님의 백성, 말씀의 청자, 선의의 시민들을 향해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다. 목자의 언어가 아니라, 관료주의의 강박이었다. 이 견해들은 물론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따른 것이다. 가톨릭교회 보편 교리서에는 “동성애 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하며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키기 때문에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2357항). 그러나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므로, “존중하고 공감하며 사려깊게” 대해야 하며 “어떤 부당한 차별”도 해서는 안된다는 행동양식을 제시한다.(2358항)

여기에는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동성애자의 인권과 존엄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구분되어 있다. 이 구분은 형식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차별금지법 반대를 이끌어내는 주장은 윤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다. 동성애에 대한 판단이 인권과 인간존엄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존중하고 공감하고 민감하게’ 대우하라는 가톨릭교회의 덕의 규범이 평등과 존엄의 보편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사회적 제도와 모순될 수는 없다. 

존재와 행위: 성의 윤리

과거와 달리 지금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 무성애자 등 다양한 성정체성이 전체 인구에서 일정한 비율로,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광범하게 인정되고 있다. 동성애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자신의 성별을 선택하지 않는다. 인간의 성은 성행위를 넘어선 포괄적인 인간 성장과 실현의 과정이므로, 이성애와 똑같이 동성애도 행위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다. 동성애 성향을 승인하든 부정하든, 동성애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억압과 차별은 사회의 주변으로 배제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복음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런 억압과 차별에 공모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는 스캔들이다. 반면에, 주류와는 다른 성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여전히 이들 공동체에서 활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동성애 현상과 동성애자들의 경험이 전통적인 가톨릭 윤리가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데이터라는 점을 말해 준다. 이 현실은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뿐 아니라 성소수자들의 경험에 기초해 동성애 현상에 대해 폭넓게 신학적으로 숙고해야 할 필요도 제기한다. 

전통적인 가톨릭 윤리는 인간의 특질이나 본성이 변화하지 않고 항구적이며, 인간성에 대한 근본원리 역시 성경 아니면 교회 전통에서 이미 확정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성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결과와 인간 경험을 설득력 있게 신앙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면, 과거 전통이란 하느님의 백성을 짓누르는 바리사이의 허욕이 될 뿐이다. 인간의 삶, 특별히 인간 성의 새로운 현상과 경험에 대한 진전된 이해를 검토하고 자신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태도로 대화를 시작하면, 전통은 공동의 탐구와 윤리적 식별을 통해 과거와 연속되지만 거기에만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과 전환의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윤리규범은 실제 윤리적 행위를 하는 윤리적 행위자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동성애는 가톨릭 윤리에 문제이면서 동시에 기회가 된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여서 동성애는 이성애자의 도착된 성적 행위라는 인간관으로부터 동성애는 타고나서 지속하는 근본적인 성향이며 삶의 조건이며 상태라는 이해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동성애와 이성애는 성적 본질에서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구분된다. 신앙교리성의 문헌 '동성애자에 대한 사목적 관심'(1986)에는 “동성애 행위와는 구분해야 하는 동성애의 조건”이 있어서 각각은 구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이 ‘조건’ 혹은 성향(orientation)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유보하고 있지만, 이 조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현실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권위에 기초한 가르침(Magisterium)뿐 아니라 의료과학과 신학을 포함한 관련 과학에서는 동성애를 단지 성적 행위가 아니라 유전적, 심리적, 사회적 기제가 혼합된 심리적-성적 조건(psycho-sexual condition)으로 이해한다. 이 ‘조건’은 가톨릭 성윤리에서는 전혀 새로운 범주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도착 상태가 아니며, 고유한 성적 특질을 지닌 인격 사이의 관계이고 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근본 경험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마련되었다. 

이제 동성애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성적 본질(섹슈얼리티)이 인간의 삶에 온전하게 통합될 수 있으며, 어떻게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런 성적 성향(조건)을 지니고 자신의 소명을 가꾸어 갈 수 있는지, 어떻게 다른 성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돕고 지지하며 복음의 사명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맞추어져야 한다. 동성애를 단죄하고 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거부하기 위해 ‘전통’을 사용하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타당하지가 않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이미지 출처 = Pxhere)

동성애와 정의의 문제

가톨릭 전통은 언제나 공동선의 관점에서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공동의 이상과 정의의 요구가 가톨릭 윤리의 기반이다. 낙태, 안락사, 불평등, 차별 등 윤리의 문제를 개인 선택이나 개인 가치의 영역으로 좁히려는 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문제들은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파악된다. 동성애에 대한 논의도 그렇다. 이 논의는 현재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의 큰 흐름 안에서 살펴봐야 한다.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성적 도착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견해는 이 논의를 개인의 도덕적 행위 수준으로 환원한다. 동성애는 단지 성적 행위의 한 유형이 아니며 오로지 성윤리의 문제만도 아니다. 동성애 문제는 무엇보다 정의의 문제이다. 이 사회의 다수자와 주류의 제도는 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억압 받으며, 인격적으로 멸시와 혐오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가혹한 삶의 조건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동성애 논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뿐 아니라 한 사회와 문화 안에서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광범위한 부정의와 폭력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윤리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성적 행위에 대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과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하는 인간존엄과 권리의 증진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 옹호는 구분된다. 교회는 올바른 윤리 원칙과 규범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만약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위라고 결론을 내린다 해도, 이 판단이 반드시 인간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결론을 이용해 차별을 지지하고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며, 동성애자의 인권을 억제하고, 혹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경청해 기존의 입장을 성찰할 생각이 전혀 없다면, 이때 교회는 인간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뿐 아니라 교회 자신의 핵심 원리를 스스로 배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가톨릭 사회적 가르침은 짧아도 지난 백 년 넘게 하느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절대적인 인간존엄을 지속해서 옹호해 왔다. 이 세월 동안 성소수자들에 대한 가혹하고도 있을 수 없는 폭력과 혐오는 이 가르침을 한낱 헛소리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동성애 논의는 동성애자의 인간존엄을 파괴하는 부정의한 사회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 숨겨진 악과 죄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포함해야 한다. 

사랑의 기쁨을 향해

프란치스코 교종이 아프리카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아프리카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교회가 금지하고 있는 피임기구의 사용에 변화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교종은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가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첫째 문제는 아니다. 아프리카나 이 세계의 첫째 문제는 콘돔의 사용 여부보다 훨씬 크고 훨씬 복잡하다. 문제는 영양부족, 착취, 노예노동, 물 부족이다”고 답했다. 진짜 문제는 체계적인 사회적 부정의와 인간존엄의 위반이다. 둘째 문제는 교회법과 인간존엄의 관계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라는 마태오 복음의 질문을 인용하며, 교종은 단적으로 말한다.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는지 아닌지 생각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수행하십시오. 모두가 치유 되었을 때, 세상에서 불의가 사라질 때, 그때 우리도 안식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아메리카>, 2015.11.30)

이 대화는 현실과 교회 가르침 사이에 놓여 있는 복잡한 관계에서 관점의 전환을 시사하고 있다. 교회 교도권과 가톨릭 윤리는 사회정의와 성윤리에 관련한 문제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어떻게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이다. 사회윤리에 관한 교회 가르침과 달리, 성윤리에서 교회 교도권은 성찰하고 판단하고 행동으로 이끄는 어떤 기준이나 원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전통에서 규정한 규범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어떤 덕에도 이를 수 없다. “진리는 강제를 받지 않고 의무를 자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며, 책임 있는 자유를 누리고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의 존엄성',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 복음이란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대한 깊은 매혹의 태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는 말을 남겼다.('인간의 구원', 10항) 사랑을 완성하는 길은 단일한 행위나 규칙에 있지 않고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경탄의 태도와 그에 따른 존재 방식에 있다. 인간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려면, 정결뿐 아니라 “자비, 공감, 화해, 용서, 사려깊음”이 조화를 이룬 태도와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사랑의 기쁨', 4장) 그리고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은 치유의 희망으로 고무된 고백과 회개와 정리의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문 밖으로 내던져지기 전에, 교회는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박상훈 신부(알렉산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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