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32호(2021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성소수자와 교회
2021년 사순절은 한국의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다. 2월 24일에는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인 김기홍 씨가 사망했다. 3월 3일에는 성전환을 이유로 심신장애 판정을 받고 육군에서 강제 전역을 당했던 변희수 하사의 부고가 전해졌다.
이들의 죽음은 트랜스젠더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그들의 인권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혐오의 희생자라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 3월 15일에는 “가톨릭교회는 동성의 결합을 축복할 수 없다”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발표가 크게 보도되었다. 여기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를 승인했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한국의 일부 매체는 “동성애는 죄” 같은 선정적인 제목까지 붙였다. 프란치스코 교종 즉위 이후 교회가 자신들을 좀 더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던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기사를 읽는 것이 고통스럽다. '동성 결합 축복과 관련한 물음 하나에 대한 신앙교리성의 답변'이라는 형식과 제목으로 나온 이 지침의 본문은 아주 간략하다.
제기된 질문: 교회는 동성 결합을 축복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응답: 부정
이어서 한 쪽 분량의 설명이 이어진다. 오래된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지만, 서구교회에서는 이 발표 직후에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 먼저 이번 발표가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몇몇 나라에서는 사목자들이 이미 동성 커플에게 혼인성사 대신 축복을 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런 축복식을 더는 몰래 하지 말고 어느 정도 공식화, 제도화하자는 제안을 주교들에게 하기에 이르렀다. 보수파들은 물론 이런 움직임을 위험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전통적인 혼인과 가정의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며 경고했다. 이 문제는 결국 교황청 신앙교리성에까지 올라갔고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해명과 지도를 요청하는 물음(전통적 용어로 dubium)에 대해 응답(responsum)이 나온 것이다. 이 지침은 신앙교리성 장관 라다리아 추기경이 2월 22일에 서명했지만, 3주가 지나서야 언론에 발표되었다. 민감하고 논쟁적인 주제인 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라크 방문 이후로 발표를 미루었다.
축복을 거부하는 어머니?
보도가 나오자 교회의 보수 진영에서는 즉각 환영의 뜻을 표시했지만, 여러 주교와 신학자들은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즉위한 뒤로 어느 선임자보다 동성애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기에 그의 승인을 받고 발표된 이 결정은 많은 이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찾고 교회의 신앙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동성애자들을 내가 누구라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교종의 2013년 발언을 많은 이가 잊지 않고 있다. 그 뒤로 교종은 동성 커플을 만났고, 신앙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려는 이들을 격려했다. 그는 또 2020년에는 동성 커플의 삶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시민결합법’을 지지하는 발언도 했던 터였다.
벨기에 앤트워프 교구의 요한 보니 주교는 일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응답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납득하지 못하는 모든 이에게 사과하고 싶다. 교회를 향한 그들의 아픔은 오늘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그는 신앙교리성의 지침에는 “사목적 배려와 과학적 근거, 신학적 뉘앙스(세심함)와 윤리적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며 비판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교구장 글레틀러 주교는 “동성관계 또한 충실함과 상호 헌신에 바탕을 둘 수 있다”며 “우리 교회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자신의 성에 대해 불확실해 하는 사람들 모두를 환영하고 교회 안에 영적 보금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이 독신일 때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주 저자였던 빈의 쇤보른 추기경은 언론 인터뷰에서, 항상 노모가 자신을 축복해 준다며,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축복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전통적으로 교회를 어머니이자 교사라고 말한다. 교회는 가르쳐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어머니다. 동성애를 느끼거나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다. 그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신앙교리성의 지침은 많은 동성애자가 교회로부터 거부당한다고 느끼도록 하면서 아주 깊은 상처를 주었다."
블레즈 큐피치 시카고 대교구장도 “동성애자 가톨릭 신자들의 실망을 이해할 만하다”며, “이제 교회는 모든 성소수자를 우리 신앙의 가족으로 맞기 위한 길을 찾는 데 더 창의적이고 회복탄력적이 되도록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호주 브리즈번의 마크 콜러디지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동성결합을 축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치자. 그렇다면 동성 커플들을 껴안을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그냥 ‘안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주교들의 비교적 온건한 반응과 달리 일선 사목자들의 비판은 더 직설적이었다. 독일 보름스 대성당의 토비아스 쉐퍼 신부는 이 지침에 불복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만일 교회가 축복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누구든 축복하는 권한을 가지지 않았다면, 가장 근본적인 의무를 방기했다는 말이 아닌가? 축복은 도덕적 판단을 전달하는 창구가 아니다”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뷔르츠부르크 교구의 부르크하르트 호제 신부가 “축복을 청하는 성소수자 커플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사목적 불복종’ 성명을 독일주교회의 의장에게 보내자고 제안하자 2000명 넘게 서명했다. 서명자 절대다수가 사제와 부제였고 수녀회 장상도 있었다. 호제 신부는 또 ‘사랑이 이긴다’(Liebe gewinnt)라는 표어로 계약의 상징인 노아의 축일(5월 10일)에 동성 커플을 축복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축복식에는 교회로부터 동성 커플뿐 아니라 이혼한 적이 있는 커플도 초대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더는 축복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거나 ‘뒷문으로 들어오게’ 하지 않겠다는 사목자들의 선언이었다. 이 캠페인은 많은 호응을 얻어 독일 전역의 100여 군데 성당에서 무지개 깃발을 내걸고 이들을 축복하는 전례가 거행되었고 많은 사람이 온라인으로도 참가했다.
차별금지법안 반대
위에 언급한 것은 동성혼이 합법화되었거나 ‘시민결합법’이 있는 나라의 사목 현실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나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 차별금지법안을 반대하는 데 교회의 힘을 집중하고 있다.
생명주일(5월 첫 주일)을 앞두고 염수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란 담화문을 발표했다.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지난해 9월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발표한 반대성명과 같은 맥락이다. 언론에 비중 있게 보도된 담화문의 핵심은 이렇다.
"차별금지법안의 일부 조항에 드러나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의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또한 이런 이념들은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윤리관과도 어긋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별과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념입니다. 이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창조하시고 서로 협력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신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릅니다. ‘동성애’로 이해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을 법적 가족 개념에 포함하는 것도 평생을 건 부부의 일치와 사랑,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가정의 고유한 개념과 소명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보도되자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담화문이 ‘젠더 이데올로기’라 규정하며 비판한 것에 대해 성소수자들과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성적 지향은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굳이 왜 그것을 선택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고 이성애자가 되려고 애써 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른바 ‘전환치료’ 시도는 당사자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고 실패로 돌아간다.
“동성애 행위에는 참된 일치와 생명 출산, 남녀 간의 상호 보완성이라는 의미와 가치가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이승한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사는 이렇게 반박했다.(김민호, '동성애 성행위가 교리에 어긋난다? 이성애자 혼외 성행위는 왜 비판 않나', <한국일보>, 2021.5.7.)
"한 사회가 보호하는 가정과 혼인이 오로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무자녀 부부는 아무리 서로 사랑으로 충만하게 아끼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영원히 ‘미완성’ 상태의 가정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비혼 동거나 사실혼을 법적 가족으로 보장해 달라는 이들의 주장은, 가족의 개념을 확장해, 현실적으로 서로 돌보고 아끼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이들이 이 관계를 법과 제도를 통해 보호받기를 원할 뿐,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성애 부부와 가정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다."
여성가족부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데 응답자의 70퍼센트가 동의했고 여기에는 세대 간의 견해차도 크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전문가들은 법과 제도가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 가구 구성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30퍼센트 미만으로 점점 줄고, 1인 가구를 포함한 2인 이하 가구가 전체의 60퍼센트가량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하수정(북유럽 연구소)은 유럽의 사례를 들면서 “동거와 사실혼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가정 형성을 장려하고 출산율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교회와 커밍아웃
일부 언론에서 교회의 입장에 대한 이런 반박과 논의를 다루었지만, 교회 안에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전혀 없는 것이 아쉽다. 서구 교회와는 달리 한국 가톨릭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신학자나 사목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성소수자들과 교회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자리한다.
성소수자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성직자의 성폭력이나 일탈을 다룰 때보다 자신들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더 가혹하다고 느낀다. 성소수자 당사자와 부모들은 교회의 사목자들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지적한다. 적게 잡아도 인구의 3퍼센트가량 되는 성소수자들이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교회 안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많은 성소수자들은 원치 않게 커밍아웃 당하는 것(이것을 ‘아웃팅’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준비되지 않은 채 남에 의해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성소수자에게는 사회가 무서운 것처럼 교회도 무섭다. 사목자나 교우들이 자신들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라며 정죄하고 혐오하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에 못이 박힌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거나 생활 나눔을 할 때도 자신에 대해 많이 밝히지 못한다. 배우자나 애인 이야기가 나올 때 동성 파트너에 대해서 밝히면 정죄당하고 매도되거나 배척당할까 봐 두렵다. 그래서 40대 이상에서는 거의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최근에는 부모에게 커밍아웃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사제나 수도자에게도 밝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성소수자들과 사목자를 연결하는 끈이 거의 없다. 많은 성소수자가 교회를 이미 떠났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벽장 속’에 갇힌 채 아픔을 삼키고 있다. 그들은 정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을 교회에서 찾고 있지만 발견하기가 어렵다.
회원 수가 300여 명에 달하는 가톨릭 여성 성소수자 단체인 알파오메가는 2006년 온라인 커뮤니티로 출발했지만, 첫 10년 동안은 일종의 지하 서클처럼 자신을 공개하지 못했다. 다행히 몇 해 전부터 이들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안전한 공간에서 함께 성서 공부와 피정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몇 군데 수녀회에서 그들에게 보여 주는 이해와 환대가 감사할 따름이다.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여 봉사활동도 하고 미사도 드리는 가톨릭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더 있다. 물론 이들과 함께하는 사제는 여전히 극소수다. 알파오메가는 수도자들이 자신들과 교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기를 기대한다.
가장 버림받은 영혼
변희수 하사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갔다. 그날 그곳에는 가톨릭 사제도 한 사람 와 있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상징적인 인물이 된 육우당(六友堂, 본명: 윤현석, 1984.8.7-2003.4.26)도 가톨릭 신자였다. 육우당은 자신이 활동하던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매년 그의 기일을 전후해서 추모식과 추모 기도회가 열린다. 그는 자신의 장례를 가톨릭 식으로 치러 달라고 당부하면서 가톨릭교회를 사랑한다는 말도 유언에 남겼다. 이 청년들은 21세기의 한국에서 그저 남들처럼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했지만,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죽은 그들에게 교회는 무엇이었을까?
육우당이 친구로 여기며 늘 지녔던 여섯 가지 안에는 묵주와 수면제도 있다. 묵주 기도의 한 단이 끝날 때마다 그 역시 예수님께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성소수자에게는 이미 이 땅이 연옥이었고 그 자신이 가장 버림받은 영혼이었다. 육우당이 죽고 18년이 지난 오늘 사회와 교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교회는 더 어머니 같은 눈길로 성소수자를 바라보고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는 없을까? 알파오메가는 가톨릭 신자였던 육우당과 변희수 하사를 위한 연미사를 공개적으로 드리는 것이 꿈이다.
매년 육우당의 기일에는 혐오와 차별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추모 기도회가 열린다. 여러 개신교회 인권단체와 몇몇 교회의 성직자, 신자들이 연합해 드리는 이 예배에는 해외 교회와 단체들도 연대 메시지와 기도를 보내온다. 올해 육우당 추모 기도회에서 한 참가자가 드린 기도를 들어 보자.
"주님, 지난 몇 달간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전역을 당하고, 대학 입학을 포기해야 했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습니다. 수십 명의 여성 성착취 영상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을 보며 함께 분노했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말과 행동을 보며 우리는 함께 울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행해지는 혐오와 차별, 폭력 가운데 고통받는 가족, 친구, 이웃이 있음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더는 기다릴 힘이 없다며 얼마나 더 멸시받고 죽어 나가야 뿌리 깊은 이 끔찍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건가요?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건가요? 그저 바라는 것은 안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하는 보통의 삶을 바랄 뿐입니다. 그날을 꿈꾸며, 겨우 주저앉아 버티고 있습니다. 하느님, 건강하게 살아낼 힘을 주세요...."(혐오와 차별, 젠더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
생명 수호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율은 이성애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성소수자는 학교에서 흔히 괴롭힘의 표적이 되고 폭력에 노출된다. 동성애자가 자살을 시도하는 배경에는 호모포비아(동성애자 혐오)가 있다. 사회에 만연한 것뿐 아니라 가족의 호모포비아와 자신에게 내면화된 그것이 문제가 된다. 커밍아웃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주위의 부정적 반응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수많은 성소수자의 부모는 닫혀 있는 자녀의 방문을 매일 가슴 졸이며 바라본다. 편견과 혐오가 팽배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그들을 가장 잘 지탱해 주는 것은 부모이고, 그들에게 큰 절망을 안겨주는 것도 역시 부모다. 교회는 어떤 부모와 같은가?
이들의 생명을 지키려면, 이들에게 성 정체성을 바꾸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교회와 사회의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그들을 음지로 내몰지 말고 우리와 똑같은 신자, 시민, 이웃으로 받아들이도록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데 교회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을까? 독재 시절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투쟁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던 것처럼, 오늘날 성소수자들의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교회에게 불가능한 일일까?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교회가 ‘앨라이’(성소수자가 아니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가 될 수는 없을까?
가톨릭 성소수자들과 앨라이 가운데는 “교회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만 대놓고 핍박하거나 혐오적인 발언만이라도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성소수자들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다. 교회가 그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교회는 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성관계는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 무질서한 것”이라 정의한다. 동성애자들은 이런 표현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과 모욕으로 느낀다.
올해 육우당의 기일을 앞두고, 제임스 마틴 신부의 "다리 놓기"(심종혁 옮김, 성서와함께, 2021)라는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소수자 사목에 관해 처음 나온 책이라 한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와 성소수자 공동체가 서로 존중과 자비심 그리고 세심한 배려로 관계 맺는 길을 안내한다.
그런데 염추기경의 생명주일 담화문이 공교롭게도 육우당의 기일을 며칠 앞두고 발표되었다. 성소수자인 신자들은 “교회가 또 한번 우리 가슴에 못을 박았다”며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했지만 중요한 논의를 촉발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책 제목처럼 교회와 성소수자 사이에 이해와 소통의 ‘다리 놓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경청은 신뢰를 쌓고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이다. 교회는 가르치려고 하기에 앞서 성소수자인 신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 주어야 한다. 그들이 오랫동안 고통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나이 많은 수도자들이 한몫할 수 있다.
성소수자 사목과 관련해 “서두르기보다 전략을 잘 짜서 천천히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제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이 그렇듯 당사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절실하다. 이들의 비판을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너무 방어적으로만 나가면 성소수자뿐 아니라 젊은 세대를 놓치고 복음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교회가 오래된 문화적 관습을 ‘보편 가치’라 부르며 거기에 기대기보다 ‘복음의 가치’에 더 천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소자와 성소수자
교회는 장애인과 이주민, 수감자, 경제적인 약자,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복음에 따른 것이고 교회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여론이나 사회 일반의 정서에 거스르면서 그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는 일에 앞장선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에 관해서는 사회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적대심을 보이기도 한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이 고통받는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교회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없을까?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심하게 질책하시고 나무라신 사람들은 모두 종교적 엘리트였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실천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으셨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 간음했다고 붙잡혀 온 한 여인 등에게는 달리 대하셨다. 심지어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까지 하셨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학교 입학이나 수도회 입회를 준비하는 사람을 ‘성소자’라고 부른다. ‘평신도 성소’ 혹은 ‘결혼 성소’라는 말도 쓰지만 혼인을 준비하는 사람을 ‘성소자’라 부르지는 않는다. 요즘은 여러 수도회에 더 이상 성소자가 없고 신학교 지원자도 많이 줄었다. 이제는 성소자라고 하면 일반인의 대부분과 일부 신자는 성소수자를 생각한다. 성소수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때문에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제와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의미의 ‘성적 소수자’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자발적으로 독신생활을 선택하고 서약했다. 소수자들은 다른 소수자의 고통에 더 민감한 법이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성소수자들의 벗이 되고 앨라이가 되어 함께 비를 맞아줄 수 있다면.... 성소수자들이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누리며 존엄성을 지닌 온전한 시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동반할 수 있다면.... 깨어진 세상 안에서 교회가 경청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화해시키며 그 누구도 내치거나 배제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목자와 어머니
올해 3월과 4월에 이문희 대주교와 정진석 추기경이 차례로 선종했다. 동시대에 오랜 기간 주교직에 있었던 두 분이 선종하자 교회 언론과 해당 교구에서는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한 이분들을 ‘착한 목자’, ‘사랑의 목자’라는 칭호로 기렸다. 염수정 추기경은 장례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 교회와 사제들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며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교회는 과연 성소수자들에게 목자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일까? 해마다 부활 4주일에 지내는 성소주일―내가 어릴 때는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렀다―이 왔고 다시 스승님의 음성이 담긴 복음을 들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11.16)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지금 사목자들이 공개적으로 성소수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오해와 비난과 공격을 각오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직무 사제직을 받은 성직자뿐 아니라 세례를 통해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신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크고 작은 ‘사목적 은사’를 지니고 있다.
변희수 하사의 죽음 이후 그냥 있을 수 없어 ‘성소수자 부모모임’(2014년 결성)을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어머니들―소수의 아버지들도 있다―의 활동을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착한 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애초에 ‘성소수자’라는 말조차 생소했지만, 자녀의 커밍아웃을 통해 성소수자가 처한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이제는 자기 자식뿐 아니라 모든 성소수자가 차별과 혐오로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사회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욕을 먹고 때로는 물리적 폭력까지 당하면서도 성소수자와 그들의 가족을 지원하고 함께하려고 한다. 이들의 활동 모습을 감동적으로 담은 변규리 감독의 장편 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우리 교회가, 신자들과 수도자, 사제들이 ‘성소수자에게 가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을 보고 싶다. 더 이상 성소수자인 하느님의 자녀들이 죽지 않게, 그들에게 부활 찬송이 없는 사순절이 하염없이 계속되지 않도록.
신한열
떼제공동체 수사. 1988년 프랑스 떼제에 가서 1992년 종신서약을 했다. 떼제에서 국제 청년 모임을 진행하면서 꾸준히 동아시아를 방문하다가 2020년 가을 한국으로 파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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