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온전한 인간발전’ 연재 소개

‘온전한 인간발전’(Integral human development)은 ‘모든 인간’을 ‘보다 인간 답게 살게’ 하는 발전의 조건과 전망을 탐색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입니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고 다양합니다. 온전한 인간발전은 이 복합성을 ‘인간 존엄’의 척도로 삼아, 모두가 충만하고 생동하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물질적이고 영성적인 삶을 준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전의 중요한 영역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잘 사는 상태’(to be well), 즉 참된 행복과 복리에 관한 것입니다. ‘보다 잘 사는 것’은 ‘보다 많이 갖는 것’과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여기에는 성장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주체적인 능력, 생태환경의 지속성, 인권과 정의의 증진, 영성의 가치, 정직함을 포함한 책임 있는 행동이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 온전한 인간발전은 타인과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며 교류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며, 특별히 세계의 빈곤, 질병, 무지, 차별, 배제, 억압에 대한 사려 깊고 지속적인 응답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은 처음으로 ‘인간적인 발전’이 교회의 가장 깊은 관심이고 염려이며, 이 발전은 전체적이고 온전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1,14항 참조) 이 회칙에서 제시된 인간의 성장과 진보에 대한 교회의 사명은 그 후 여러 교황들의 노력을 거치며,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과 복음의 활로를 찾는 과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을 비롯해 지구적 차원의 협력이 필요한 보건과 구호활동을 수행하는 ‘온전한 인간발전 촉진부’를 설립해 이 과제의 실현에 더욱 집중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인간발전’의 과제와 전망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실천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이 연재를 마련했습니다. ‘온전한 인간발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다양한 분야에서 탐구하고 있는 ‘인간적인 발전’(Human Development)의 성과, 두 관점이 제시하는 사회-생태 세계의 균형과 복원 구상, 개인과 구조의 변화를 증진하는 실천과제를 소개합니다. ‘온전한 인간발전’의 관점으로 우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도전을 성찰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nbsp;Cathopic)
(이미지 출처 = Cathopic)

존엄과 영혼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품종과 취향이 경합하는 포도주 세계에서도 이 친구는 딱 꼬집어 피노 누와르 애호가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달리 이 품종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자라고 키우기도 어렵다. 대신 끝없는 인내심으로 가꾸어 만들어 낸 맛은 섬세하고 오묘하며 심지어 ‘스릴’이 있다고 한다. 영화 '사이드웨이'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는 포도주 맛은 모르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성장과 공동선

성장하는 모든 존재에는 이런 과정이 있다. 어렵게 자란 뒤에 터져 나오는 빛나는 면모 같은 것. 좋은 포도주가 나오기 위해서는 포도 품종과 기후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요소들이 있다. 적절한 토양과 공간, 돌보고 가꾸는 일, 염려하며 기다리는 마음.... 그런 다음 깜짝 놀랄 수도 있는 결과를 얻는다. 묻혀 있거나 알아주지 않는 개인의 특질은 그것을 지닌 이들에게도 손실이지만 우리 모두의 손실이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나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좀 더 깊게 살펴봐야 한다.  

‘온전한 인간발전’은 우리가 충만하고 생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분명하게 밝혀 드러내 보이려는 시도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카베르네’형 사람이 있고 좀 더 특별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피노 누아르’형 사람이 있다. 어떤 품성과 재능이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성장이 가능하도록 초대하고 시도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온전한 인간발전과 공동선은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뒤에 처지는 일 없게 하는 인간존엄의 구체적인 추구이며 도전이다. 

얼마 전 명성 있는 국제 피아노 대회에서 최연소로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가 화제가 되었다. 일곱 살 때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 있는 바람에 할 것이 없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것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첫 기회가 되었다. 우연하게 발견한 자신의 특징과 재능이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성장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통념과 다르게, 재능과 능력은 공동의 결실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며 도와주는 것이 인간 공동체의 본령이다. 

존엄의 필요

‘온전한 인간발전’의 구상을 처음으로 제안한 루이 조제프 르브레1)는 이것이 도대체 가능하려면 누구에게나 ‘존엄의 필요’(dignity needs)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필요’(needs)는 식량, 일, 거주같이 우리가 살아갈 때 반드시 있어야=야 하는 기본 조건들이다. 이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빈곤과 불평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르브레는 여기에 ‘존엄을 지닌 삶’을 더했다. 존엄한 삶에는 예를 들어 ‘공간’이 들어간다. 고된 일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휴식하고 때로 동료들과 친교를 나누며, 어느 때는 문을 닫고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자신을 만들어 가고 건강한 자기존중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공간은 물질적 형태이지만, 그 역할은 물체 이상이다. 이런 의미의 공간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그래서 ‘존엄의 욕구’가 아니라 ‘존엄의 필요’다. 

존엄-지향의 관점은 집과 음식과 같은 기본 필요뿐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삶과 내적 영역 역시 인간성장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 내적 영역을 전통적으로 ‘영혼’이라 부르지만, 내용으로는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형성하는 내적 동력을 말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영혼을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가치 있는 영적 근원”(363)이며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이라 부른다. 영혼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인간 존엄은 인간성의 깊이와 신비의 지표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성과 인간 존재를 확고하게 긍정하고, 시간과 육신의 한계 너머까지 인간성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말이다. 르브레는 ‘존엄의 필요’를 통해 기본적 필요의 충족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으로부터의 필요를 일깨워 통합적인 성장과 발전에 이르게 하는 통로를 열었다. 

뿌리 뽑힌 세계에 뿌리내리기

시몬 베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요청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재건에 관한 책 하나를 썼다. 사후에 "뿌리내리기"(L’Enracinement)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에서 베유는 구조와 제도보다 ‘영혼의 필요’에 집중했다. 인간이 내면의 책무를 망각하면 어떻게 되는가?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가 질병으로 신음한다. 행복, 윤리, 영성, 좋은 삶이 붕괴된다. 베유는 이것을 '뿌리 뽑힌 상태’라고 봤고, 눈에 보이는 제도 너머를 직시하도록 호소했다. “육신에 상해를 주지 않고도 인간 생명을 다치게 하는 수많은 형태의 잔혹함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이 잔혹함은 생명에 필수적인 일종의 영혼의 영양을 박탈하는 것과 같다.” 

베유의 ‘영혼의 필요’와 르브레의 ‘존엄의 필요’에서 인간의 조건과 새로운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다. 존엄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안으로부터’ 살아야 한다. 부서진 사회를 다시 회복시키려면 내적 쇄신이 필요하고, 삶의 파산 상태로부터 오는 유혹에 저항하려면 다른 외적인 조건보다 내부의 복원력이 필요하다. 베유는 이를 ‘뿌리내리기’라 불렀다. 르브레는 인간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발전이란 인간 복리와 행복에 뿌리를 둔 발전이지, 인간을 소비자나 경제적 요소로 사물화 하는 발전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다.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여서 그에 따른 필요도 복합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성장은 전체적이고 통합적일 수밖에 없다.

루이 조제프 르브레 신부. (이미지 출처 =&nbsp;rennes.catholique.fr)
루이 조제프 르브레 신부. (이미지 출처 = rennes.catholique.fr)

뒤돌아 갈 수 없는 시대의 지표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는 팬데믹 시대는 부자들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다. 특별히 특권과 권력을 지닌 온 세계의 리더십의 실패를 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면 안 되는지가 분명해졌다. 치유의 리더십을 보여 준 이들은 의료인, 돌봄, 청소, 배달 노동자들이었다. 능력도 책임도 없는 이들이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일을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 쇼타임은 끝났으며,(‘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 마태 23,1-12 참조) 우리는 이제 팬데믹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우리 앞에는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찾아야 하는 뿌리내리기와 행복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존엄한 존재로 성장하려면 어떤 ‘필요’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를 행복과 연대로 이끄는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꼭 되짚어 봐야 하는 ‘영혼의 필요’는 무엇인가? 포도 재배에는 건강한 뿌리뿐만 아니라 알맞은 토양도 필요하다. 뿌리와 토양(구조) 모두 필요하다. 베유는 공동체와 책임감을, 르브레는 충만한 삶에 대한 헌신을 들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답이 있는가. 

1) 루이 조제프 르브레(1897-1966)는 프랑스 도미니코회 신부다. 경제학자이며 사회활동가로 평생 정의를 위한 연구와 투쟁의 삶을 살았다. 가톨릭 사회적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인 ‘온전한 인간발전’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1930년대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어업 노동자들과 함께 프랑스 생 말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저개발 연구와 민중운동에 참여했다. 이때의 경험과 연구로 새로운 형태의 발전 모델인 ‘인간적인 경제’를 제안했다. ‘인간에 봉사하는 경제’는 “가능한 많은 사람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경제”다. 르브레 신부에게 충만한 삶이란 인간존엄에 근거해야 하며, 문화, 경제, 정치, 사회, 영성적 차원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경제와 휴머니즘’(1941), ‘온전한 발전을 위한 연구와 훈련 국제 센터(IRFED)’(1958)를 창설해 여러 나라로 확산시키며 인간중심의 통합적 발전의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의 주요 집필자이며,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1987)과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2007)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박상훈 신부(알렉산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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