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9]

ⓒ김혜율
메리가 도시 아파트촌의 놀이터에 놀러갔다. 한 아이가 메리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너 몇 살이야?”
“나 다섯 살.”
“어, 나도 다섯 살인데~”

미끄럼틀 아래서 두 아이의 첫 만남이 흐뭇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도시 아이가 메리를 향해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그 아이가 말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새까매?” 쿠쿵!

‘윽, 예리하군. 이젠 메리 새까만 거 다섯 살짜리 아이 눈에도 보이는 거야. 하긴 한눈에 봐도 메리, 백인 옆에 선 블랙맨이네. 아아, 내가 이 지경으로 애를 시골서 구워댔단 말인가. 어쩌지? 우리 메리,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텐데…….’

내 얼굴에 어두운 빗금이 착착 그어지며 그놈의 시골 햇살을 원망하려던 찰나, 메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응~ 난 마당 있는 집에 살아서 그래~” 한껏 명랑한 목소리로. 그 만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베어 문 채였다.

얼굴 하얀 도시 아이는 ‘아, 그래서 그렇구나. 다 이해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리고 그 후로 두 아이는 얼굴에 빗금이 간 나는 아랑곳없이 미끄럼틀도 타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오랫동안 놀았다. 내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손을 질질 잡아끌 때까지 말이다.

어느 날은 메리가 유치원에 갔다 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나보고 안 예쁘대. 나보고 두더지라고 놀려.” 쿠쿵!

‘이런, 얼굴 까맣고 촌티 줄줄 흐른다고 아이들이 놀리는 거야? 이거 참, 그렇게 예쁜 얼굴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걸 말로 하다니! 근데 듣고 보니 약간 두더지 같기도 해. 잠깐, 그래도 그렇지!!! 친구끼리 놀리면 안 되지! 메리가 기분이 많이 상했겠네. 이걸 어쩐다.’

나는 속으로 적이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 이 세상에 만연한 망할 외모지상주의의 폐해와 우리가 어떻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갈고닦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어물어물거렸다. 그러면서 이 아이를 당장에 파마를 시키고 레이스 원피스에 꽃핀을 꽂아 유치원에 보내서 못생겼다고 놀린 아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복수 계획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메리가 중얼중얼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왜 나보고 안 예쁘다고 하지? 나 예쁜데?”

나 예쁜데?!!! 아아! 자기가 예쁘다는 저 확고한 신념에 찬 표정. ‘참 모를 일이야’ 하는 투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주는 어메리칸 제스처! 메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당당하고 구김살이 없었다.

메리가 4살 되던 해부터, 나는 메리에게 만화 영화 <달려라 하니> 주제가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자발적으로 메리에게 그 흔한 만화 영상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에서 안경 쓴 아기펭귄 뽀로로 씨가 아이들의 대통령이고, 이것만 있으면 엄마들이 삼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편하게 설거지에 매진할 수 있다고 꼬드겨대도 그건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적 효과도 있겠지만 그런 교육은 내가 생활에서 얼마든지 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아이가 영상물의 재미에 한번 빠져들면 레스토랑에 밥 먹으러 가서도, 어디 재미난 놀이공원에 가서도 아이가 떼쓰고 심심해 할 때마다 뽀로로를 그 코앞에 대령해야 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떼쓰면 혼나야 하고, 심심하면 다른 놀 거리를 찾으면 되고, 그도 아니면 엄마 아빠 하는 이야기만 듣고 있어도 되는 거다.

그런데 왜 <달려야 하니>인가? 만화영화 자체를 보여주진 않았고 단지 주제가가 흐르는 영상만 수십 번 보여주었지만 <달려라 하니>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달리기를 잘 하는지, 왜 포기하지 않고 하늘 끝까지 달리려고 하는지, 왜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살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눈에 눈물 보이는 일이 좀체 없는 악바리인지에 대해서.

나는 어렸을 때 동네 울보였다. 우리 엄마 말로는 아기 때는 우느라고 항상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나를 재우려면 학교 운동장을 수십 바퀴 돌아야 했고, 그러고도 바닥에는 눕히지 못해 항상 나를 업은 채로 이불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곤 했단다.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학교 1교시에 울기 시작하면 집에 갈 때가지도 울던 지지리 울보였던 아이였다. 그 당시 울보 어린이 선발대회라도 있었으면 충분히 그랑프리상에 심사위원 특별상까지도 받을 위인이었는데…….

그런고로 나는 특별히 ‘하니’가 필요했다. 나처럼 울보가 될까봐 하니를 메리의 롤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자기를 무시하고 비웃는 못된 계집애 ‘나예리’를 이기기 위해,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집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이번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 후보인 나예리를 이겨야 하는 하니! 홍두깨 선생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다 철푸덕 넘어졌지만 두 눈에 힘 빡 주고 다시 주먹지고 일어나 달리는 하니! “난 있잖아~ 슬픈 모습 보이는 게 정말 싫어~ 약해지니까~ 슬프고 힘들 때면 달릴 거야~” 하며 달리는 하니!

밥상 앞에서 노닥노닥 딴짓 하고 안 먹는다 고집을 피울 때면 “하니를 봐라. 엄마 돌아가시고 혼자서 밥해 먹는 거 봤지? 넌 엄마가 밥해 주니까 얼마나 좋아. 하니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된다”라고 밥상머리 교육을 하고, 욜라랑 싸우다가 제가 먼저 마음 약하게 울고, 사소한 일로 징징거릴 때면 “하니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눈에 힘 빡 주고, 안 울어. 우는 건 약한 거고 지는 거야. 눈에 힘 빡 줘. 자, 엄마 봐. 이렇게 눈에 힘 빡! 입 꼭!” 하고 달래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유치원 갈 때 어기적거리다 버스 놓칠라치면 “하니처럼 달려보자~ 엄마아~ 저 하늘 끝까지~ 우아, 잘 달리네! 세상에나! 하니 같다, 하니!”라고 독려했다.

메리가 유치원 생활하면서 가끔 맞고 오는 때가 있다. 참 가슴이 아픈데 그건 아이들의 사회생활이고 자기도 부딪히며 강해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선생님한테 전화로 “유심히 봐 달라. 아이들 분쟁을 잘 해결해 달라” 하고 간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일에 메리가 얼마만큼의 마음의 상처를 입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어 마음이 단단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종종 열 받아서 주먹으로 코피 한 방 터뜨려도 괜찮다고 부추기고, 태권도 4단인 지네 아빠는 애 데리고 앞지르기, 뒷지르기 실전 공격수를 가르쳐주는 판인데 메리는 맞고도 우는 법이 없으며, 선생님 말씀대로 친구끼리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고, 때리는 건 나쁜 거니까 자기는 참는단다. 아마도 ‘하니’를 생각한 게 아닐까?

오늘따라 내 어릴 때 혹해서 보던 <달려라 하니>가 고맙다. 나조차도 하니에게, 그리고 메리에게 배울 게 많다. 오늘도 눈에 힘 빡 주고 울먹울먹하는 내 안의 어린 울보 아이를 달래보아야겠다.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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