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5]

아이들의 적응력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 산책 중 개집 앞에서 구경 중인 욜라 ⓒ김혜율
우리 가족 중 제일 먼저 세 살 욜라가 ‘촌아이’가 되었다. 대근육 발달이 좀 늦된 타입으로 16개월에서야 걸음마를 뗀 욜라는 이제 막 걸음에 속도가 붙고 좌회전, 우회전, 유턴 같은 방향 전환에 재미를 붙인지라 하루 종일 마당에 나가고 싶어 하는 ‘마당병’ 걸린 상태다.

그래서 하루에 수 회 우리 집 마당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옆 집 할머니 마당과 또 그 옆 집 개집과 닭장 있는 데까지, 위로는 이장 댁 농기구 창고와 개울가 언저리까지 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산책을 즐긴다. 욜라는 이 루트를 반은 걷고 반은 넘어져 뒹구는데, 자기 넘어질 때 “어이구, 왜 또 넘어져” 하며 타박하면 억울하다는 듯 일으켜 줄 때까지 땅바닥에 코를 박고 눈물과 콧물을 흘린다. 아, 그 눈물, 콧물과 흙먼지가 범벅이 된 꾀죄죄한 얼굴이라니, 그리고 아무리 세탁기라도 헛기침할 수준의 흙 묻은 옷가지여(주부의 빨래 고민 등장).

그야말로 ‘손톱이 까아만 에미의 아들’이 다됐다. 사실 나 혼자 키우기 벅차서, 바람이 8할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3할 정도만이라도 키워주기를 바라고 온 것은 맞지만, 뽀얀 얼굴이 날로 까매지고 씻겨도 씻겨도 금방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는 걸 볼라치면 옷에 얼룩 따위 질 리 없는 도시의 고무바닥재 놀이터가…… 그립지는 않은데, 부럽기는 하다. (주부는 계속 빨래 고민 중.)

그 다음으로 다섯 살 메리가 요 근래 촌아이로 점점 거듭나고 있다. 원래 한적하기 그지없는, 또래라고는 닭 키우는 집에 여덟 살짜리 남자애 한 명, 그 뒷집에 돌쟁이 아가 밖에 없는 이 동네도 주말이 되면 할머니 댁에 놀러온 어린 손자, 손녀들로 제법 왁자지껄해진다. 오랜만에 들리는 아이들 뛰는 소리,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메리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 나물 뜯는 메리 ⓒ김혜율
어찌 놀고 있나 궁금해서 가보니 대여섯 명쯤 되는 아이들이 개울가에서 장난을 치며 재밌어 죽겠다고 웃어대고 메리는 옆에서 보고만 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개울물에 들어가 옷이랑 신발이랑 다 적시고 좋다고 웃고, 돌멩이를 주워서 높은 데 올라가 첨벙 하고 떨어뜨리면서 물 튀기고 하는 그걸 그리 재미있어 하는 거였다. 나는 하나도 재미없고 햇볕도 따갑고 해서 메리 보고 그냥 집에 들어가자고 재촉했는데 메리는 꿈쩍도 안하고 서있다. 같이 어울려 놀고 싶지만 쑥스럽고 부끄러운 모양이다. 개울물에 빠질까봐 겁도 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애들 노는 모양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가만 보니 이 아이들 사는 데에 따라 아이들 얼굴이나 옷차림이 확연히 다르다.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인데, 하나는 옆집 아이로 대표되는 시골 원주민 스타일(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옷은 실내복이자 실외복으로도 손색없는 내복에 신발엔 흙이 묻어 있다)이고, 나머지 하나는 시골 할머니 집에 잠깐 놀러온 도시의 귀공자 스타일(모두 뽀얀 얼굴에 여자아이들은 드레스에 구두 코디, 남자아이들은 전문 아웃도어룩에 운동화, 신발은 하나같이 깨끗하다)이다.

그리고 우리 메리는 누가 봐도 시골 원주민 쪽에 속하는 걸 알고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맨날 밖에서 자전거 타고, 쑥이니 냉이니 돌나물이니 취나물이니 머위나물이니 뜯으러 다니더니 그새 이렇게 얼굴이 새카매지고 만 것이다. 매일 보는 얼굴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보통 탄 게 아니다. 예전 동네 단골 빵가게에서는 이 정도 색이 나온 빵은 탄 빵이라 분류되어 단골들에게 서비스로 끼워주는 빵이 되고 말았을 그 정도.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요양차 서울서 왔다는 얼굴이 하얀 윤초시네 손녀딸이 시골의 수줍은 소년더러 “이 바보” 하며 조약돌을 던지고는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막 달려갔다지. 소나기 맞고 감기 걸려 나중에 죽게 되지만 그 잔망스러운 계집아이의 하얀 얼굴과 병약함이 시골소년의 까무잡잡한 얼굴과 옷에 묻은 얼룩과 어우러져 얼마나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여자아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상상해왔는데…….

메리는 분명 그런 소녀가 못 될 테고 그렇다면 얼굴이 까맣고 옷에 얼룩을 묻히고 다니는 우리 메리의 첫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가늠이 안 되서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래도 건강하고 비타민D를 남아 돌만큼 듬뿍 합성하고 있는 메리의 오늘에 만족한다.

두 아이가 이렇게 내적, 외적으로 시골마을에 녹아든 것과 달리 남편과 나는 틈만 나면 차를 끌고 시내에 나가서 바람도 좀 쏘이고 커피콩 향기를 맡아야만 좀 살 것 같군 하는 시골 적응 과도기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우리 집 마당에 당돌하게도 자리 잡은 텃밭을 오가며 구경하고 즐거워하시는(너무 어이없어서 차라리 웃지요 하는 모양) 동네 어른들께 상추 같은 것도 많이 얻어먹었고, 농사일 중간 중간의 새참파티에도 참석해서 막걸리도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 처마 끝에 맴도는 봄바람이 방안을 휘돌고 가는 청량한 느낌과 저 멀리 논바닥서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밤 합창 소리를 들으며 난 찌든 때에 탁월한 세탁세제 쇼핑(드디어 주부의 빨래 고민 해결!)을 하기 위에 인터넷을 켜고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있고. 이런 하루하루가 쌓이면 아마 나도 어느새 촌 아낙네가 다 되어 있겠지? 음, 그렇담 엘레강스한 챙이 긴 모자와 선크림도 쇼핑 목록에 추가해야겠군. (아무래도 천천히 하고 싶다. 외모 적응 만큼은.)

아 참 잠깐, 그보다 먼저 메리와 욜라 쿨쿨 자는 방에 들어가서 애들 머리칼 좀 쓸어주고 와야겠다. 발로 찬 이불도 살며시 다시 덮어주고! 모두 모두 굿나잇~!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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