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껍질을 벗어야 하는 갑각류 천주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다. 신앙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전례행위 혹은 신학분야일 경우는 말할 여지조차 없다. 물론 그런 분야를 굳이 평신도들이 관여해야 하는가, 하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를 들여가며 국내외에서 어렵게 공부한 소수의 평신도 신학 전공자들마저 발 디딜 여지를 주지 않는 현실이 누구나
옛날 얘기 하나 흔히 선배들이 “내가 청년 때엔...”이라고 시작하면 일단 지금의 청년들을 한심한 듯 쳐다보기 십상이다. 허구한 날 왕년의 무용담 이야기가 또 시작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시대의 선배들은 후배인 청년들에 대한 기대와 활동에 대한 바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청년들도 20여년이 지난 후에는 당연히, 어쩌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후배들에
참 치사한 세상이다. 에비 에미 잘 만나면 한평생 ‘오라이!’ 하면서 살 수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그들만의 세상에 끼지 못한 것에 배가 아파서 하는 말처럼 들리는가? 그렇다. 그것도 심하게 아파서 주먹으로 통감자 만들어 흔들며 해대는 말이다. 가난보다 평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원주에 ‘밝음신협’을 만들 때 ‘不患貧 患不均(불환빈
스스로 ‘모독’을 즐긴다? 연극 보러 돈을 주고 들어간 관객이 배우에게 욕지거리를 듣는다. 이어서 객석에 앉아 물세례를 받는다. 그럼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지독한 역설의 카타르시스다. 연극 은 1966년 초연된 피터 한트케의 획기적인 작품이다. 국내에는 1977년 극단 고금석 연출로 첫 공연된 이후, 극단 기국서 연출
‘마사지’와 애초부터 친한 사람들 때로는 하기에 따라 거북한 말이다.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마사지’란 말이 언론에 적용 될 때 하는 말이다. 원래의 사건을 포샵 처리하듯 ‘분칠’하는 것 또한 민망한 일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 권력 최상부층의 홍보담당자들이 과잉의욕인지 혹은 지략을 가지고 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런 ‘마사지’를 몇 번인가 시도했다가 언론과
#1. 오~쓰리쿠션 절묘한 미술작품이나 도자기 앞에서 나오는 탄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주회장에 울려 퍼지는 고고한 음악을 듣고서 나오는 탄성도 아니었다. 대학교를 막 입학했던 시절 출입을 시작한 당구장에서 만난 이른바 고수들이 보여주는 쓰리 쿠션을 보면서 입에서 쏟아진 말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아침마다 스포츠신문 들고 뒷간가면서도 예술을 하러 간다는
독자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갸륵한 정신 조선일보, 일단 상호가 확실하다. 보통 신문들은 신문 이름을 '제호'라고 부르지만 조선일보는 '상호'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 왜냐하면 장사개념이 농후한 신문이니까 당연히 상호다. 아무튼 그 상호가 북쪽 나라 이름과 같다. 공개된 장소에서 북쪽 나라 국호를 마구 지껄이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릴 염려가 있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일까 지난 6월 14일 수경스님이 란 글을 자신과 세상에 던졌다. 그는 길지 않은 글에서 몇몇 단어를 힘주어 앙물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주지 자리...남은 인생...초심...중노릇...환경운동...NGO단체...모두를 위한다는 명분...감당할 수 없는 일...자신없슴...권력...양심...소신공양
강형! 몇 달 전 강형이 근무하는 합정동 사무실에서 만난 기억이 새롭습니다. 강형과의 인연은 몇 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신학연구소가 발행하는 편집기획위원으로 함께 위촉받고서 두어 번 만난 일이 있었죠. 이후로는 신앙인아카데미의 을 통해 글로 만난 것 같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길을 가는
공직을 맡은 자들의 무한한 아픔‘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적절하고 당연한 말이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자리에 적당한 사람이 앉아야 일이 풀려나가는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부르는 일들이다. 단순히 한 사람의 능력이나 학식에 의존한다면 ‘인사가
마이다스의 손에 들린 완장 CEO란 명함이 넘치는 세상이다. 사전에 표현된 CEO는 Chief Executive Officer의 줄인 말로서 “대기업에서 이사회의 주재, 기업그룹 방침의 결정, 장기계획 작성 등과 관련하여 총괄적인 책임을 가지는 최고경영자로, 통상적으로는 기업의 회장이 CEO를 겸임하고 있다”로 설명을 한다. 그 단어와
웃을 수 없는 먹고사는 밥벌이 ‘민간인 사찰’이란 말이 하도 돌고 돌아 입에서 단 냄새가 날 정도다. 누구는 그것을 가지고 말장난을 한다고 ‘민간인 사찰’은 조계종 산하의 절이 아닌 개인소유의 사찰을 말한다고 할 정도이니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찰의 피해자였던 김종익 선생에게는 결코 웃을 수 없는, 먹고 사는 밥벌이를 송두리째 빼앗긴 인생의 낭
어느 특정 본당에 관한 말이 아니다.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키자는 뜻도 아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여기고 곰곰이 되새겨 보자는 의미에서 이번 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전 입구 벽면 거의 하나로 사람들 이름이 새겨졌다. 아마도 성전을 지을 때 귀한 헌금을 해준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또 다른 벽면에는 본당을 거쳐 간 성직자들의 사진으로 메워졌다. 그
예술인의 친일행위, 총칼보다 더 무섭다'소양강 처녀'·'울고 넘는 박달재' 등 유명 대중가요를 작사한 반야월(93) 씨가 지난 6월 9일 일제강점기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했다. 반 씨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일제시대에 내가 만든 군국가요 등으로 많은 국민이 잘못된 길로 내몰렸다면 그분들께 죄송하고,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있는 나 차마 하늘의 존재를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어 다석 유영모 같은 이는 “없이 계신 이”라고 불렀다. 아주 오래 전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만난 존재는 “당신이 누구냐?”는 모세의 물음에 스스로 목소리 내어 자신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하늘 경배가 남달랐던 히브리사람들에게 그 존재는 ‘YHWH’라는 모음 없는 네 글자였
휴대폰에는 연결 장치가 필요하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특별히 남한 거주민 중에 휴대폰이라 불리는 통신기기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종사하는 직업 혹은 위치만 아니라면 휴대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토로하는 사람일지라도 지금 현재는 어쩔 수 없이 끼고 사는 것이 휴대폰이다. 심지어는 수도생활을 하는 스님이나 수녀님들도 형편에 따라 지니고 있으며 초
월드컵이 한창이다. 이제 시작이지만 16강 진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한국축구로서는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월드컵’이라 불리는 경기는 축구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많은 종목이 세계대회를 ‘월드컵’이라 부르고 있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축구
이해하시라. 참고서 이야기다. 그것도 특정상호가 나오는 참고서 이야기다. 요즘처럼 학습을 도와주는 참고서가 다양한 세상을 살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행운이었는지는 가름하기가 쉽지 않지만 필자의 알량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어 학습 참고서는 시리즈가 유일하다. 얼마 전 아이의 책꽂이에서 만난 그 책을 펼치다 피식 웃고 말았다.
2010년이 오기 전 매주 쓰던 글을 닫았다. 그 글들은 의 「언론과 교회」를 비롯해 서너 가지에 이르렀다. 글 문을 닫았지만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교회는 교회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요동치고 있었으며 거기에 따라 내공 깊지 못한 필자 역시 함께 요동쳤기 때문이다. ‘한마음 한몸’이란 말은 천주교회 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안하셨는지요? 새해 들어 첫 편지이지만 며칠 있으면 설날이라 부르는 명절이 다가오니 경인년은 이제야 제대로 문을 여는 모양입니다. 하기는 저 역시 일월 한 달을 꼬박 제 놈 발걸음 밑을 생각하느라 다 보내고 일월 끝자리 가서야 이제 “부스스” 않다고 선언했지만 그것도 지켜볼 일입니다. 아무튼 늘 고마운 새로움입니다. 몇 번의 다짐과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