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월 선생의 친일고백을 보며

예술인의 친일행위, 총칼보다 더 무섭다

'소양강 처녀'·'울고 넘는 박달재' 등 유명 대중가요를 작사한 반야월(93) 씨가 지난 6월 9일 일제강점기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했다. 반 씨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일제시대에 내가 만든 군국가요 등으로 많은 국민이 잘못된 길로 내몰렸다면 그분들께 죄송하고,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총칼 앞에 본의 아니게 그런 노래를 만들어 폐를 끼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지금은 후회한다"고 말했다.

반 씨는 1917년생으로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아빠의 청춘' 등 한국 가요사상 가장 많은 5000여 곡을 작사했으며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결전 태평양'·'일억 총 진군'과 같은 군국가요 작사에 참여한 경력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여러 경로로 거론되는 친일인사 중에서 친일사실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반 씨가 처음이다 싶다.

들어보라. 교회, 그대의 입으로 한 말이다.

▲ 사진/한상봉 기자
예술인의 친일행위는 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탓에 오히려 총칼보다 더 무섭다. 언론이나 종교행위도 마찬가지다. 혼미한 시대 상황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 클 것이고, 그런 만큼 영향을 끼칠 위치에 있는 자가 어떤 정신 상태로 역사 앞에 마주하고 있었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국민을 팔아먹는 노랫말을 지을 수는 없다. 물론 오늘날에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고 친일행위와 다름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하면서도, 발전과 번영을 떠벌리며 변명과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세력이 있지만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이란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아닌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가리켜 잘못한 일이 있다고 점잖게 때로는 질책하며 말을 건네주었지만 끝내 외면한다면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 개인이 아닌 한국사회에서 제법 양심적이고 올곧은 종교기관으로 불리는 한국천주교회의 한 면이 그렇다면 얼마나 모욕적인가? 하긴 그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면 여전히 ‘닫힌 귀’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욕됨을 욕됨으로 여기지 못하는데 있겠지만 말이다. 오호 통재라!

말하는 사람이야 입이 아프지만 듣는 자들은 흘려버린 말들이기에 들을 때마다 새롭기는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일제강점기 시절 기관지인 <경향잡지>를 통해 했던 말들은 친일을 넘어 반민족, 반역사적이다. 스스로가 했던 말을 다시 들려준다. “쉐마!”라는 거룩한 단어는 아니지만 들어보라. 교회, 그대의 입으로 한 말이다.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뜨리고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경향잡지> 957호, 1943년 4월호, 1쪽)

“흰 바탕에 붉은 해를 그린 국기는 대일본제국의 표징으로서.... 이 국기 앞에 충군애국에 불타는 얼마나 많은 가슴이 뛰놀았으며, 이 국기 앞에 황군용사의 피는 얼마나 거룩히 흘렀으며, 이 국기 앞에 적국의 함정은 얼마나 많이 격침되고 적국의 비행기는 얼마나 많이 추락되고 적국의 장병은 얼마나 많이 섬멸되었는가!” (<경향잡지> 960호, 1943년 7월호, 1쪽)

열심한 신자는 충량한 국민

젊은이들을 죽음의 사선으로 끌고 갔던 대동아전쟁 징병과 개인의 살림살이마저 거덜 나게 했던 징발과 공출과 헌납에 대해서만 교회가 입을 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총독에 대한 아부마저 천연덕스럽게 해댔다. 들어보시겠는가?

“근년 같은 시국에 우리가 남차랑 같은 총독을 모셨다는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실시한 반도 교육령의 개정,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기타 내선일체의 대방침은 착착 실현되고 또 실적이 양호하였다. 반도 민중이 완전한 황국신민에 편입된 데에는 남총독 각하의 공적이 자못 큰 바이니 남총독은 실로 반도 민중을 구한 큰 은인이다.” (<경향잡지> 947호, 1942년 3월호 1쪽)

일찍이 대동아전쟁을 위한 기도문을 제정한 한국천주교회는 이를 교회의 미사와 개인의 아침저녁기도에 함께 읽도록 했다. 사실 이런 일들은 한국천주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는 최초의 한국인 서울교구장이 착좌하는 날(1942년 1월 18일) 이미 기미가 보였다. 노기남 신부는 그해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되었지만 오카모토라는 일본이름을 지닌 사람이었다.

“(생략)... 열심한 신자는 충량한 국민이라는 것은 본직이 이미 전부터 깊이 느껴온 바이니....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 복종하라....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 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 복종하라” (<경향잡지> 943호, 1942년 2월호, 4-5쪽)

▲ 김유철은 <깨물지 못한 혀>에서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친일행적을 소상히 밝혔다.(사진/한상봉 기자)
우물거리지 말고 하느님 앞에 다시 말하라

100년이다. 8월 29일이 되면 한국인에게 치욕과 모욕을 안겨준 경술국치 100주년이다. 수천 년 전 만든 성경에 나오는 숫자의 의미는 물론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동식물에 대한 의미들을 줄줄 외어대는 교회 사람들이 어찌 100년전 이 나라를 그토록 더럽힌 일에 대하여 아직도 해석해 내지 못한다 말인가? 해석 이전에 스스로가 말한 일들, 행한 일들, 입으로는 하느님을 불렀지만 손으로는 총독과 일본 왕에게 경례를 해댔던 죄업들을 어찌 아직도 씻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일본을 위해 노래 몇 곡을 작사했던 사람이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세상에 대해 사죄를 하는 모습을 보라. 한국천주교회는 2000년 대림 첫 주일 <쇄신과 화해>라는 이름의 문서를 발표했다. 그 때 7개의 항목 중 두 번째로 일제강점기의 죄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솔직하지 않았는지 다시 돌이켜보라. 우물거리지 말고 하느님 앞에 다시 말하라. 진심어린 회개 앞에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8월 29일 백 번째 국치일이 오기 전 그대 하느님 앞에 바로 서라. 교회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하느님을 믿을 것인가? 사람은 짱돌을 들망정 그대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김유철 /시인. 경남민언련 이사. 창원민예총 지부장.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교회비평집 <깨물지 못한 혀>(2008 우리신학연구소).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2009 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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