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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 bin der Ich bin[김유철의 짱똘]

   
▲ 영화 <위대한 침묵>의 한 장면

있는 나

차마 하늘의 존재를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어 다석 유영모 같은 이는 “없이 계신 이”라고 불렀다. 아주 오래 전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만난 존재는 “당신이 누구냐?”는 모세의 물음에 스스로 목소리 내어 자신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하늘 경배가 남달랐던 히브리사람들에게 그 존재는 ‘YHWH’라는 모음 없는 네 글자였다.

바로 “I am who I am. 나는 있는 나”라는 선언이었다. 뒤에 사람들이 모음을 조합하여 여호와(YeHoWaH)라는 인위적인 이름이 등장했지만 그것은 하늘의 존재를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존재는 그저 ‘있는 나'일 따름이었다.

160분이 넘는 긴 영화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체험이었을 것이다. 침묵하는 법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겨울에서 시작하여 다시 겨울이 오는 동안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정물화 그 자체였다. 영화관계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걱정이 되었는지 “이 영화는 <위대한 침묵>이 아니라 <위대한 수면>이 될 수도 있다”고 밉지 않은 엄살을 부렸지만 영화는 <위대한 I AM>이었다.

‘있는 나’의 존재방법

독일사람 그로닝감독은 자막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썼다. 첫 번째로 그가 선택한 것은 막스 피카르트의 시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그는 이어 핵심적인 성서구절을 바로 제시했다. 구약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있는 나’의 존재방법이었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왕상 19,11-12)

겨울, 봄, 여름, 가을, 또 겨울. 늙은 수도사와 신입 수도사. 햇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 밤과 아침 다시 낮과 저녁. 세탁물을 맡은 이, 부엌일을 맡은 이, 대장간을 맡은 이와 대외업무를 맡은 이. 그 속에서 그들은 침묵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았다. 아니 살아냈다. 기도와 미사와 홀로됨과 독서와 청소와 밥 먹기를 하면서... 그렇게 살아냈다.

   
▲ 사진/김유철

내가 이 곳에 있습니다

침묵은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수행의 전제조건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겉나’가 침묵할 때 비로소 피어오르는 ‘속나’의 목소리. 불이 지나간 뒤에야 나타나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존재의 목소리. 그래서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는 행위, 귀를 여는 것이다. 커튼을 흔드는 햇볕의 내리쪼임 안에도 존재가 계시고, 수선화가 아침이슬 머금고 피어 올리는 꽃대 안에도 존재가 계시고, 골목길 가로등 위로 눈 내리는 소리와 파란 풀잎이 자라는 생명 속에도 존재는 침묵보다 더한 침묵으로 계시는 듯하다. 그것을 다시 한 번 ‘I AM’이라 나는 부르고 싶다.

<무소유>란 대명사를 지닌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시던 날, 육신을 벗고 말 그대로 스님께서 무소유가 되던 날, 그 날은 슬프면서도 기뻤다. 온 적도 없고 간적도 없는 스님의 장삼자락을 생각하는 일은 알프스에서 만난 수도자들의 얼굴을 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니 내가 이곳에 있습니다.”란 자막이 반복되며 수도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다르면서도 하나의 얼굴인 그들은 오직 하나 ‘I AM'이었다.

존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침묵을 깨고(?) 늙고 눈먼 수도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눈썹이 하얀 수도사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린다면 무슨 이유로 계속 살아가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이 주는 긴 여운은 짙었다. 늙은 수도사가 ‘하느님’으로 표현한 것을 나는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무엇에 대한 생각으로 나는 계속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살아내고 있는가? 여운의 끝자락을 알아차렸는지 감독은 빙긋이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참 친절한 감독이었다. 딱 한 줄의 독일어 말이다. “Ich bin der Ich bin” 시나이산 불타는 떨기나무속에서 모세에게 들려주던 그 존재의 목소리였다. “I am who I am. 나는 있는 나다.”

구약시대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신발을 벗을 이유가 있다. 개신교 예배당이든 천주교 성당이든 문턱을 드나들면서 그 존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여, 스스로 짱똘을 들라.

 

김유철 /시인. 경남민언련 이사. 창원민예총 지부장.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교회비평집 <깨물지 못한 혀>(2008 우리신학연구소).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2009 리북)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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