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말한다는 것

작년 한 해 교회 안에서 말하고 글 쓸 기회가 많았다. 재작년 한 세미나에서 교회 내 ‘청년’으로서 토론을 할 기회가 마련된 것을 시작으로, 작년에 평화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그런 기회는 더욱 많아졌다. 주로 ‘청년’으로, 또는 그 자리의 유일한 ‘여성’이자 ‘청년’으로 솔직하게 교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강구하는 자리였다. 나는 개인으로 서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그 자리에서 청년의 대표가 되기도, 여성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 한 해 동안은 들어오는 일을 다 받아 보자고 다짐했던 나는 어느 지점부터 지쳐 갔다. 이제껏 수많은 교회 내 평신도들이 해 왔을 것 같은 말을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내에서 개인적으로 고민해 왔던 지점들을 정리하여 단상 위에서 공유하고 내려온 뒤 밀려오는 낯 뜨거움과 수치심을 혼자 견뎌야 했던 것이 내겐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작년에 있었던 마지막 발표 자리를 마친 뒤, 그날 나는 친구와 긴긴 통화를 했다. 교회 내 어떤 자리에 설 때, 특히 그 자리의 단 한 명의 여성이자 청년으로 대표될 때 우리는 왜 수치심을 느끼는지, 혹은 다른 감정이라면 이런 이상한 감정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이것을 과연 우리만 느끼는 것인지, 자꾸만 나의 무언가를 깎아먹는, 소진되는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내가 말하는 이 언어와 목소리가 전달이 되지 않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인지. 덧붙여 소속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어딘가에서 뿅 하고 나타난 ‘청년 논객’으로서 발언하고 내려온 뒤에는 그 발언이나 입장에 대한 보호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이상하게 교회 내에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화되기만 하는 이 지점에 대해서 우리는 장장 두 시간 넘게 대화했다.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단상에 올라가 내 할 말만 하고 내려오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발표자 한 명이 말하고, 다수의 청중이 일방적으로 듣는 경직된 구조가 아니라, 다 같이 둥글게 앉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솔직하게 서로 질문을 하고 답변하고, 무엇보다도 서로를 정말 궁금해하는 태도로 앉아 있는 것. 그랬다면 조금 달랐을까? 갈수록 교회 내에서 기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마련해 주신 자리는 늘 경직되고 일방적인, 개인의 이야기와 고민을 전달하고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기에는 어려운 방식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다른 방식을 강구해 보고자 작년에 작은 단체도 만들어 보았지만, 충분히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터를 마련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서로 편하게 둘러앉아 같이 대화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상상해 보고 싶었지만,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무척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교회 안에서 돌봄은 가능한가

작년 5월,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 떼제 기도 모임에 참여했다. 다양한 아시아 청년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감동이었지만, 함께 숙소에서 머물렀던 개신교, 성공회 청년들과 각자의 교회 내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해 대화한 것이 내겐 무척 오래도록 남았다. 가장 놀랐던 지점은, 몇몇 작은 개신교회 공동체 내에서 실제 돌봄과 회복을 위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노력하고 애쓴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한 교회에서 특정 인물들의 관계에 트러블이 생겨 그 공동체 일원이 모두 약 1년간 돌봄과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여정을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나는 교회는 ‘하느님만 보고 다니는 거야.’라는 말을 방패 삼으며 교회 공동체 봉사를 할 때 받게 되는 상처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고, 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내가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애초에 돌봄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도 돌봄을 통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가 아닌가? 홍콩을 다녀와서 나는 비로소 교회 공동체 내 돌봄과 그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공동체에서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공동체 내에서 (명확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상처받은 개인들이 일방적으로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구조가 고착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전에 각각의 공동체에서 충분히 한 개인으로 대화와 토론을 할 일이 많았더라면, 나 또한 ‘여성’이자 ‘청년’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자리에 초청받아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교회 내에서 의문이 생기는 것들, 같이 더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들을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아닌, 열린 태도로 함께 나누는 것, 또는 그런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거나 정제되지 못한 표현 방식으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은 이후에, 적극적인 중재를 통해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겪어 볼 수 있을까? 함께 가는 여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에 대한 식별을 해 나가고 발맞춰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하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리고 이런 상상을 해 보는 나 역시 지친 마음에 시작하고자 했던 단체를 잠시 놓고 쉬고 있지만, 함께 이러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오늘도 희망해 본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경계에서 이방인처럼 느끼는 많은 이들이 혼자 수치심과 외로움을 견디어 내지 않을 수 있기를, 잃어버린 말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보나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이 많으며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가톨릭 청년들과의 교류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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