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서 자라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지난 8일, 마지막 청년 대담에서는 ‘강생’을 다뤘다. 대림 시기에 오스카 로메로 대림 묵상집으로 모임한 청년 4명(감귤, 꼼지, 나초, 마리모)이 각자의 기도에서 만난 아기 예수와 현실에서 경험한 교회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했다.

강생(降生, Incarnation)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을 뜻한다. 이는 실제로 인간의 몸과 삶을 취하시고 고통과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왜 하필 약한 아기로 오셨을까? 가톨릭교회는 왜 경계 긋고 사람들을 배제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강생을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교회와 자신을 이해해 가며 경계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실질적 고민을 진지하게 다룬다. -편집자

대림 동안 묵상한 강생 이미지

감귤 : 저는 강생이 '한 아기'로만 예수가 하늘에서 온 게 아니라, 이 세상 곳곳에서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씩 하늘에서 온 것을 찾아내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모든 게 다 하늘에서 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계속 일상에서 찾아보는 것, 영원이신 분이 우리 시간 안에 그냥 계신 것, 그 자체가 강생이라고 느껴요. 

나초 : 저는 “왜 하느님은 굳이 인간으로 오셨을까?”와 이번엔 특히 “왜 아기로 오셨을까?”를 묵상하게 됐어요. 우리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인 것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만,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 나누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성경에 그런 얘기가 덜 나오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우는 장면이라든지, 성전 정화 때 화내시는 거라든지... 결정적으로는 그분도 죽음과 탄생을 다 맞이했다는 거, 그게 크게 와닿았어요. 사랑의 끝판왕 같은 느낌. 사랑하기 위해 그 대상과 비슷해지는 걸 넘어서 그 속성까지 다 같아지는, 그게 너무너무 큰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감귤 : 얼마 전 본 영화 '마리아'(카루소 감독)에서 예수님을 의식한 헤로데의 횡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요. 왕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서로 횡포 부리는 와중에 엄청 뽀얀 덩어리가 마구간에 태어나요. 근데 천장이 없었어요. 저는 그게 인상 깊었거든요. 열린 천장에 벽만 둘러 있어서 세상 모든 것과 연결돼 있다고 느꼈어요. 뽀얗고 약한 아기가 그 횡포들과 연결되는 느낌도 많이 받아서, 저는 오히려 아기가 정말 강하다고 느꼈어요.

마리모 : 제게 강생은 삶에서 실현해야 되는 어떤 목표, 과제 같은 느낌이었는데... 전에 관상 기도를 했을 때, 기도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걸 제가 받아서 품에 안았어요. 그런데 조그만 손을 가진 아이가 이렇게 제 손을 잡는데 그 촉감이 너무 선명한 거예요. 잡고 있는 촉감이 정말 연약해서 찰나에 놓치면 잃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데, 이 손, 이 아이가 진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니까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뜻이 확 와닿았어요. 그게 너무 소중해서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생을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거구나, 나를 위해 하느님이 태어난 사건이구나'라고 느꼈고, 이후에 하느님이 나한테 그렇게 오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한테 강생을 살아야 하는 거구나... 해서 많이 노력했는데, 그게 늘 너무 어려웠어요. 특히 정말 힘든 사람이 옆에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강생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지'라는 걸 자꾸 상상하게 돼요.

하느님이 마법처럼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 죽을 수도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오고, 돌봄받고 의존해야 하는 아이로 자라나고,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머리에 누울 곳 없이 살고, 최후에는 죽음까지... 근데 그 죽음조차도 어느 누구와 대립하지 않으려다가 몰려서 십자가에서 죽은 거죠. 그걸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 처지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은데, 내가 있는 처지에까지 내려온 하느님은 그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건지, 그게 과연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지... 저는 가끔 사랑이라는 말이 오남용되기 때문에 들었을 때 별 의미나 느낌이 안 들 때가 많은데, 강생을 생각하면 더 사랑에 가까운, 혹은 사랑보다 더 큰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도 활동하는데 싫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힘들 때가 많아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강생을 실천한다는 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그러던 와중에 시몬 베유의 책 <중력과 은총>을 읽고 있는데, 첫 장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연민은 어디까지 내려가고,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애덕의 사랑은 어떻게 그 아래까지 내려갈까? 그렇게 낮게 떨어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연민을 지닐까?” 그 문장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 해결해야 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예수님에게도 던져 볼 수 있는 질문이겠다 싶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연민을 넘어서 거기까지 갔을까, 예수님은 자기 연민이 있었을까? 그런 부분에서 오래 머물게 됐어요.

꼼지 : 저는 계속 인간의 취약성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대림 시기가 왔고, 어, 하느님이 강생하신 게 이거구나, 이런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약한 살성을 가지고 인간이 되신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내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범위에 있는 마음과 사랑과 이 모든 것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져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어요. 묵상하면서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러다 보니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커진 상태로 대림 시기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게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을 넘어선 거라고 생각한다면, 얼마 전에 나초가 한 얘기가 떠오르는데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행복하진 않잖아.” (일동 웃음) 예수님을 믿는 것도 누군가는 평안을 위해서 믿는다고 하지만... 이 강생을 통한 사랑도 내가 강생을 한다, 내가 강생을 해 보고 싶다, 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궁극적인 강생을 통한 사랑을 하고자 노력하는 자체가, 우리가 “사랑은 다 좋은 거야~”라고 하는 차원은 전혀 아닌 거니까요.

감귤 : 그래서 저도 관상 기도 했을 때 수난도 강생도 그렇고, '아, 왜 이렇게까지...?' 왜냐하면 나도 가야 하는 길인 것 같아서요. 부담감 때문에 묵상할 때 두 개 다 항상 첫 반응이, “아니, 왜 그 정도로 약해지시냐고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너무 저~ 밑에 약함까지 계속 선택하니까. 한 번은 각을 세울 수도 있는 건데... 화내실 때도 그런 종류의 화가 아니잖아요. 진짜로 사랑을 보여 주시는 저 밑에 약함까지. 그러니까 십자가 수난도, 강생도,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고 부담스러웠어요.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을 정도여서 그 의미를 알고 는 크게 다가왔어요. 강생은 나 못 한다고.

나초 : 강생한다는 게 성화랑도 어떻게 보면 연결되잖아요. 일치잖아요, 결국. 저도 이번에 관상 기도하면서 위로가 됐던 게, '예수님이 왜 굳이 아기로 왔을까' 이걸 가지고 묵상했어요. 우리가 익숙한 예수님은 성인 예수님인데, 이번 아기 예수를 기도 속에서 만나면서, 하느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계신 분이니까, 내가 아기 예수도 생각할 수 있고 어린이 예수도 생각할 수 있고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리고 저도 그렇게 어린이가 돼서 친구로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경험들, 그게 예수님이 아기로 강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리모 : 하느님의 시간에서, 강생이 과거라거나 지금 우리는 그 끝난 사건 뒤에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거고... 이런 얘기를 들어서 위로가 되었어요.
교회에서 강생을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라고 많이 얘기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는 걸 자꾸 생각하면, 아, 이게 진짜 나한테 현재 일어난 사건이고, 하느님이 뭔가 준비하신 사건이라는 걸 내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면, 그런 하느님한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강생 관상했을 때 가장 좋았던 건, 외로웠던 나한테,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은 내 어떤 영역에 한 아이가 태어나고, 같이 있어 주는 거였어요. 만약 성인 남자가 기도에 들어왔다면 거부감 들었을 텐데, 연약한 아이로 태어나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내 가장 내밀한 혼자 있던 영역에 하느님이 전지전능한 초월적인 분이 아니라, 나의 가장 참혹한 면까지 내려온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소중한 거예요. 부모도 그렇게 못해 주는데, 그 존재가 하나이기 때문에, 놓치면 나는 다시 과거의 어떤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가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붙잡게 되는 그런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이후에 기도나 신앙생활을 하거나 다른 활동들을 하면서 또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점은 있었지만, 그때 느낀 사랑이 너무 소중하다 보니까, 내가 예수님을 발견한 곳이 아무리 참혹하고 거기까지 가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도, 거기를 떠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강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힘들지만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했고, 이미 나보다 먼저 가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더 편해져요.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게 작년 한 해 동안 위로가 많이 될 때가 있었어요. 활동하다가 너무 힘들고 외롭고, 이걸 계속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머리 누일 곳 없다”라는 그 문장이 떠오르면서 예수님도 그렇게 머리 누일 곳이 없었겠구나,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는 것들을 예수님도 똑같이 느꼈겠구나를 생각하니까, 그런 고통스러운 감정조차 더 이해할 수 있게 돼서 오히려 감사하고, 그 순간을 견뎌 넘길 수 있을 때가 많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인간 세계에 있는 고통들을 절대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고요.

(그림 생성 = 제미나이)
(그림 생성 = 제미나이)

연약한 아기로 내려오신 분의 겸손

감귤 : 저는 예수님이 어디 나라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제 어둠에 있는 거예요. 제 지푸라기에, 그러니까 제일 부정하고 싶은 나의 어떤 곳에, 내가 내 영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서 나인데도 계속 밀어내고 분리시켰던 곳에 계신 거예요. 근데 제가 그 영역을 나라고 이제 막 인정했는데, 너무 오래전부터 아기 예수님께서 거기 계셔서 저는 그 어둠이 “내 어둠”이라는 게 크게 다가왔어요. 기도에서 예수님이 느끼는 모든 불편함과 미성숙함도 다 관상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그 모든 일을 생각하면서 정말 창피했지만 계속 저를 바라보게 됐어요. 예수님의 시선으로 다시 제 모든 면을 다 다시 보고, 다시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다 생각하고... 그걸 알고 나서부터는 제 모든 면, 나약함 곳곳을 다시 예수님의 시선으로 본 게 저는 빛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걸 봤을 때 어떤 사랑보다 힘이 났어요. 제가 그쪽에 쓰고 있는 에너지가 엄청 많았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 항상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나의 모습으로 밀릴까 봐 많이 긴장하는 그런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랑 같이 대놓고 거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저는 너무 감동이었고 위로가 많이 돼서, 내 어둠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저의 취약함, 유한성을 인정하는 데 큰 힘이 됐어요. 그 안에서 회복된다는 게 뭔지 깨달았죠.

나초 : 저는 대림 관상 기도 때 아기 예수님, 어린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주일학교 성탄제를 도와 주러 갔는데, 그 애기들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는 거예요. 저는 굉장히 편향적인 사람이라 아기들을 훨씬 좋아하는데, 보니까 성인들도, 심지어 저도 아기와 어린이 시기를 거쳤던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 싫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싫은 사람을. 그게 너무 어려운데, 그 사람의 아기와 어린이 때 모습을 상상하면 조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감귤 : 저는 조카 태어났을 때 처음 보자마자 아기는 약함이 아니라 순수함의 끝, 그러니까 아예 백지 상태의 인간 모습이... 너무 예수님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때 아기 예수님은 순수함 자체셨는데, 그런 생명을 우리한테 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아요.

나초 : 저는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이 낮아진 거 아닌가 하는 자만이 잠깐 올라왔는데, 라파엘 메리 델 발 추기경님의 '겸손을 구하는 기도' 읽으면서, (웃음) 아, 나는 내려놓을 게 훨씬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갈 길이 아직 멀었구나.

마리모 : 저도 그거 보고서 내가 겸손 뜻을 잘 모르고 있었구나. (일동 웃음)

꼼지 : 저도 그럴 때가 많아요. 묵상하거나 이럴 때 좋은 마음이 되잖아요. 지금은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제한적이니까 좋은 마음이 더 쉽게 먹어지고. 가끔은 스스로 고립해 놓은 상황이라, 오만해지기 쉽단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내가 안전한 공간에서 하느님 찬양하고 기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대화하는 게 나 스스로가 너무 혀만 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기도를 할 때가 있단 말이죠.

감귤 : 저도 회사 생활을 할 때 책임자 역할을 많이 했는데, 제가 자꾸 지시하는 부담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름의 책임을 다하고 노력도 값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낮아질 수 없는 사람인가? 내가 예전에 가졌던 가난한 마음은 어디 갔지? 이런 허망감이 많이 들더라고요. 엄마가 육자매이신데 외가에 가면 항상 엄마만 설거지를 하시곤 했어요. 근데 엄마가 그때 “내가 설거지 할 이 덕이 애들한테 가게 해 주세요. 이걸로 하늘에 덕을 쌓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셨대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덕을 쌓는 마음으로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화살 기도를 계속 날리면서. 그때 해 주신 말씀이 살면서 문득문득 나요. 아, 내 다리를 꺾어 버려야지, 몸을 꺾어서 가난한 마음을 배워야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겸손을 그냥 한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이 생각으로 그때 회사 다닐 때도 내 몸이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내 몸이 또 그렇게 겸손하게 다른 사람과 함께 낮아지는 방법을 몰라 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렸던 것 같아요. 몸으로 배운다는 건 정말 큰 거 같아요. 같이 낮아지는 거.

마리모 : 그런 생각도 했거든요. 예수님이 강생해서 한 거 없잖아요. 당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의미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것도 아니고, 헤로데에게 죽은  애기들을 구한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3년 정도 공식적으로 활동하다 갑자기 죽은 거잖아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한 게 없는데, 그게 2000년 이후에도 우리가 모여서 대담할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는 게... 어떻게 보면 '함께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처럼 그런 처지에 누군가가 같이 있었다, 같이 있다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는 거고, 특별한 걸 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연대구나 싶어요.

얼마 전에 세종호텔 미사를 갔는데, 밑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 미사를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고. 그런데 그때마다 신부님이 한 말이 생각나요. "우리가 밑에 있다. 당신이 언제든지 지치거나 힘들 때 내려와도 우리가 밑에 같이 있으니까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같이 하면 된다." 그래서 사실 함께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함께하는 게 너랑 나랑 다른 사람, 다른 처지로 함께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처지에 그냥 같이 있는 거, 그 자체가 진짜 강력한 연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밖에 나가서 연대를 잘하면 뭐 해, 집에서 연대나 잘하지, 가까운 데서부터 잘해야지, 그런 나의 이중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경계를 넘어 무언가 감행한다는 것

꼼지 : 강생을 한다는 게 완전히 다른 차원을 뛰어넘는, 뭔가를 감행하고, 전능한 신에서 너무나 연약한 인간이 되는, 어떤 벽을 뛰어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런 게 사랑이라 한다고 본다면요. 여태까지 내가 한 사랑은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감행을 했던 적이 있던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런데 또 이게 단순히 희생은 또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희생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거라.

마리모 : 저는 희생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교회에서는 희생이라 하면서 거룩하게 그리는데요. 가끔 저건 가스라이팅이고 폭력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희생이 너무나 교회 안에서 거룩하게 다뤄지고,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어떤 가치로 다루죠. 그것도 맞지만 어느 면에서는 부정의한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걸 많이 봤기 때문에, 희생이라는 말을 남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귤 : 그럴 때 교회는 개인을 삭제하고 그 의미만 남게 만드는 걸 희생으로 만들어요. 예수님의 희생은 드러나는 희생, 모든 이를 존중해 주는 희생이잖아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개인을 없애는 희생을 자꾸 얘기하니까... 저는 존중 없는 희생은 그냥 개죽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마리모 : 어떤 죽음을 기억을 하기 위해서는 그 죽음이 발생한 고통스러운 자리를 직시하는 게 필요한데, 그건 결국에는 갈등을 직시하는 힘인 거고요. 저는 종교의 가장 좋은 힘 중에 하나는 어떤 고통, 특히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가치 중에 하나가 고통을 직면하고 견디는 힘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것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질문을 시작하고 기억하면서 계속 식별하고 실천하고 행동할 때 그게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건데, 교회는 오히려 반대로 갈등 없는 상태, 질문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을 하니까요. 그럼 결국 개인의 안온한 상태만을 계속 원하는 거잖아요. 저는 좋은 신자는 될 수 있어도 좋은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생각에는 항상 의문이 있어요.

감귤 : 로메로 묵상에도 나오잖아요. 예수님을 알 수는 있어도 예수님을 닮을 수 없다고. 그냥 이렇게 예수님을 그림처럼 보는 거지.

(그림 생성 = 제미나이)
(그림 생성 = 제미나이)

"네가 강생해서 교회로 가야지"

꼼지 : 가톨릭에서의 “경계”는 너무 삼엄하고... (일동 웃음)

마리모 : 거기 이렇게 보초가 서 있죠. 서서 경계를 딱 밟은 사람을 쏴 버리는 거야.

꼼지 : 그래서 너무 차갑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작년부터 이웃 종교에 놀러 가고 같이 대화하면서 더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우리”라는 경계 안에 있는 것 외의 존재들에게는 굉장히 냉정해지는 교회를 보면서, 이게 예수님이 가르쳐 준 사랑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고, 특히 강생을 생각했을 때 더더욱요.

감귤 : 항상 이단과 싸우듯이 싸우죠. 경계에 넘어오면 일단 질문이 그거야. 너희 이단이냐?

꼼지 : 그게 너무 자의적인 본인들의 판단이고, 예수님의 사랑과 마음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니까. 그래서 곳곳에 잊지 못할 상처를 계속 주고 있는 이 교회의 굉장한 경계 선 벽 같은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너무 기본적인 강생하신 하느님을 묵상해야 되지 않나, 이것이 왜 빠져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마리모 : 최근 몇 년 동안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뭐랄까. 나도 어쩔 수 없이 교회의 주변부에 계속 있게 되고, 여러 겹 경계 위에 서 있어야 되는 날이 오래 되다 보니, 이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게 솔직히 너무 힘에 부치거든요. 여러 선례가 있으면 따라가겠는데 그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항상 날이 서 있고, 내가 올바로 식별을 하고 있는 건지 싶고. 그래서 가장 두려워진 것이, 내가 한 식별과 내린 선택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면 어떡하지, 이게 진짜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최근 몇몇 사건을 거치고 나서, 내가 교회를 한편으로는 너무 크게 생각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교회를 너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처럼 절대화하고 있었구나, 또 한편 내가 교회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했구나 했어요.
왜냐하면 진짜 교회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가톨릭교회는 넘어서잖아요. 로메로 묵상에서는 “하느님나라는 교회를 넘어선다”라고 나오죠. 그래서 내가 교회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라는 걸 조금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이해하게 된 것도 있기는 해요. 그래, 그 직분에 맞춰서 해야 되는 일들이 있을 거고, 가톨릭교회를 가톨릭교회로 있게 하기 위해서 지켜야만 하는 것들도 있겠죠. 그것도 제도 교회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일 것이고. 그래서 내가 너무 힘없이 교회를 크고 완벽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꾸 이런 갈등이 생겼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근데 저는 엄마가 제게 맨날 "네가 강생해서 교회로 가야지"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교회인데 내가 왜 강생을 해야 해, 자기네들이 교회는 어머니다, 이러면서 온갖 좋은 미사여구는 다 붙여 가지고 온갖 것을 베풀어 줄 것처럼 얘기를 해 놓고서는' 했는데, 막상 지난 몇 년 동안 보고 경험한 제도 교회는 엄청 낡았고 흠 많고 삐걱거리고, 죄인도 많고 결함도 많은 교회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괴리에서 떠나고 싶었던 건데, 자꾸 '네가 강생해야지'라고 하니까 '내가 강생해서 교회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이랬던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있는 거, 그게 엄마가 얘기한 강생이 아니었을까 해요.

꼼지 : 저도 최근에 느낀 게 이 부분이에요. 내가 너무 교회가 완벽할 거라고 기대를 크게 했구나. 이게 사실 교회도 다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 그러려니 해야 되는데, 내가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애착한 거지. 교회에도 다 그냥 그런 인간들이 있는 건데, 너무 나의 생각과 기대로 만들어 놓은 상상의 이상적인 교회, 이게 있었던 거죠.

마리모 : 근데 이렇게 깨닫고 인정은 하는데, 절대 이 깨달음을 교회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아. (일동 웃음)

꼼지 : 아, 그건 안 돼.

감귤 : 근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괜찮아, 부모를 이해하는 자식이 결국 부모를 인정하잖아. 그런 것처럼 교회도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리모: 나는 부모한테 하는데, 교회는 진짜 해 주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하면 너무 잘하는 줄 알 것 같아요. 그래서 해 주고 싶지 않아.

꼼지 : 부모와 이런 대화를 하면 그 과정에서 부모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고, 그것에 대한 대화를 수차례 했기 때문에 내가 '아 그럼 이제 엄마도 이해할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요.

감귤 : 예전에 어떤 신부님이 강론 시간에 교회는 초기에 생긴 이래로 단 한 번도... 초기 교회부터 위기의 교회였다. 위기의 교회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초기 때 얼마나 사도들이 좌충우돌 난리 치면서 우리가 최초의 공의회라고 하는 사도행전부터 시작해서 아주 난장판이었다. 처음부터 난장판이었다. (일동 웃음)

저는 선과 악을 다 보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부모를 나를 보호해 주고 지켜 주는 존재로 생각하니까 실망도 크고 화도 많이 나고, '아니 나도 이렇게 인간관계를 잘 맺는데 부모는 나한테 왜 이래', 이렇게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그 일련의 인생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런 것처럼 교회의 악함도 그냥 인정하게 되고...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고 싶은 건 또 아니에요.
 

교회의 경계를 넘어, 내 안의 경계를 넘어

나초 : 저 마지막으로 그거 얘기하고 싶어요. 경계 넘는 거. 인스타에서 봤는데 크리스마스 기간에 팔레스타인에서 무슬림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상관없이 하는 전통이, 대추야자를 넣은 쿠키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팔레스타인 출신 무슬림 분이 미국에 사는데, 그 쿠키를 다른 팔레스타인인 친구랑 같이 만들어서 미국에 사는 팔레스타인 친구들한테 나눠 준다고 해요. 그 영상을 만드신 분이 "나는 무슬림이지만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다"라고 했어요. 그 영상을 보는데, 제가 무슬림에 갖고 있던 많은 편견이 많이 깨졌어요. 그리고 떼제 수사님이 항상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난민이었다." 이 얘기를 계속 하셨는데 그게 같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게 정말 경계를 넘는 거구나 생각했었어요.

감귤 : 교회의 경계 말고 나 자신의 경계, 내 편견의 경계, 내 한계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도 같이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제가 교회에 들었던 실망으로 '나는 세상에서 뿌리내리고 아주 잘 살아 보겠어' 하고 교회에 관여하지 않고 산 3년여 시간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교회 활동을 줄이니까 회사 생활도 더 많이 하게 되고, 세상에 있는 사람도 더 많이 만나게 되고, 교회 밖에서 하는 봉사 단체도 더 가게 되고 이러다 보니까 느낀 것이,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니까 교회의 경계도 얘기하고 교회의 문제점도 얘기하지만, 사실 그들은 교회에 마음이 떠난 지 오래고 인생에서 교회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경계는 내 경계밖에 없는 거예요. 내 지식, 내 가치관, 나를 존중해 주는지 안 해 주는지 이런 거에 굉장히 날 서 있고 그렇더라고요. 그런 한가운데 있으면서 저를 다 열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내 영역이 점점 좁아지니까 결국에는 내가 세상에 냉담해지고 살아갈 힘, 생동감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경계를 넘나든다는 거는 내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넓히는 일이 맞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나아간다는 게 손해 보는 게 아니구나, 나만 깎이는 일이 아니구나, 이런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마리모 : 경계라는 건 안 만드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요즘 너무 양극화됐다 얘기하지만 결국에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이 생기는 원리가, 그 집단이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특성을 중심으로 뭉쳐지는 거거든요. 그것과 반대되는 특성으로 뭉친 집단이 또 생기면 이 사이에 경계가 생기는 거예요. 결국에 내가 나를 여성이라고 불렀을 때 남성이 생기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가 생기고 이런 식인 건데. 경계를 안 만든다라는 거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뭐라고 명명을 하거나 규정하기를 하나하나 다 버렸을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누구와도 대립되는 경계가 생기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 중에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나도 열심히 연습을 하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너무 어려워요. 어느 정도 나는 가능하다라고 봤는데, 어디서 불가능할 수 있겠다라고 느꼈냐면은 이미 한 집단이 낙인찍혔을 때, 그래서 사회 구조적으로 경계가 이미 생겨져 있을 때예요. 이 낙인을 없앨 수 있다고 아무리 얘기를 하더라도 절대 그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거를 알았을 때에는, 이건 더 이상 아무리 경계가 의미 없다라고 해도 적어도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는 게 아니죠. 그랬을 때에는 아예 그쪽을 선택해서 거기 가 버리는 것, 그 낙인을 같이 뒤집어쓰는 것이 차라리 경계를 극복하는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경계 안에서 고립되지 않게끔 계속 밀고 확장시켜서 결국 경계가 무의미해지게끔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것도 엄마가 나한테 세뇌시킨 거기는 한데요, “그리스도인은 항상 한 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다. 언제든 하느님이 부른다라고 생각하는, 하느님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게끔 한 발을 든 상태가 준비 자세다.” 그러려면 자기가 고집하는 모든 것에서 엄청 자유로워야 되고, 그다음에 그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파악할 수 있게끔 훈련이 돼 있어야 돼요. 그래서 하느님 중심으로 딱 한 발만 딛고 한 발은 뛴 상태로 서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경계가 없는 사람인 거잖아요. 어디든 갈 수 있는. 그게 그리스도인이고 예수가 보여 준 삶도 그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감귤 : 그러면 결국 진짜 머리 누일 곳이 없겠네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꼼지 : 그 낙인을 뒤집어쓴다는 것 자체가 강생이야. 너무 감동적이야.

감귤 : 경계를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무의미해. 왜냐하면 내가 경계를 만든 게 아니고 만들어진 낙인이라서.

마리모 : 저는 제도 종교에서, "그거 다 상관없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가끔 들어요. 그거는 하느님 안에서 바라보면 다 무의미한 거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설령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 치더라도 모두의 신앙 단계는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이해도도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냥 “무의미해요.”라고 얘기를 해 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그래서 내가 너무 정치적인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 구조적 문제를 교회 안에서 말하는 걸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 구조에서 어떻게 하느님 뜻을 함께 실현할 수 있을지 정말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되는데, 그냥 "기도하면 다 괜찮아져요."라고 말하는 게... 예를 들어, "너가 동성애자야. 근데 기도하면 그 낙인에서 넌 자유로워질 수 있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감귤 : 그 말은, 구조를 바꾸려고 생각하지는 않고 개인을 구조 안에 어떻게든 넣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마치 구조보다 더 못한 사람인 것처럼 하니까요. 사람이 어떻게 구조보다 못할 수가 있나요.

나초 : 예수님이 구조를 만든 게 아닌데 말이에요.

이보나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이 많으며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가톨릭 청년들과의 교류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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