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 통역 되나요?’, 유영은 연출, 홍정은·홍미란 작, 2026

‘이 사랑 통역 되나요?’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br>
‘이 사랑 통역 되나요?’ 포스터. (출처 = 넷플릭스)

한 드라마의 AS

지난 글에서는 ‘사적 복수’를 주제로 썼는데, 많은 시청자가 ‘모범택시 3’에 환호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글을 쓰고 얼마 뒤에 ‘모범택시 3’이 종영되었다. 마지막 일화는 비상 계엄 내란을 주도했던 군인을 조소하고 응징하며 마무리되었다. 햄버거를 먹으며 회동한다거나 폭탄 조끼 이야기 그리고 무속 등은 노상원을 연상하게 한다. 한 일화에서는 착취당했던 아이돌이 현장에 등장하고, 응원봉을 든 팬들과 함께 ‘빛의 혁명’ 현장을 재현한다. ‘사적 복수’로 일관하던 ‘모범택시’는 막판에 공적 응징으로 마무리되며, ‘빛의 혁명’에 대한 찬사를 드러낸다.

‘모범택시 3’은 사적 복수를 넘어 공적&nbsp;응징으로 마무리됐다. 폭탄 조끼, 햄버거 회동 등 비상 계엄을&nbsp;풍자하고, 응원봉과 ‘빛의 혁명’에 대한 오마주(다른&nbsp;작가나&nbsp;감독에&nbsp;대한&nbsp;존경의&nbsp;표시로&nbsp;특정&nbsp;대사나&nbsp;장면&nbsp;등을&nbsp;인용하는 일)를 담았다. (장면 출처 =&nbsp;‘모범택시’)<br>
‘모범택시 3’은 사적 복수를 넘어 공적 응징으로 마무리됐다. 폭탄 조끼, 햄버거 회동 등 비상 계엄을 풍자하고, 응원봉과 ‘빛의 혁명’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를 담았다. (장면 출처 = ‘모범택시’)

로맨틱 코미디의 뻔한 서사 그러나 참신한 소재

연초에 방영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여느 로코물처럼 뻔하게 사랑이 이루어지지만, 다중 언어 통역사를 내세운 참신함도 보여 주었다.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으로 온갖 외국어가 순식간에 번역되는 요즘, 통역사로 등장한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돼도 인간의 미묘한 어느 지점은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으리라는 기대 또는 희망처럼 읽히기도 한다.

배우 차무희와 통역사 주호진은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다. 주호진에게는 홀로 끙끙 앓는 사연이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형(어머니가 재혼한 새아버지의 자식으로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의 애인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일본에, 그녀의 생일을 맞아 찾아왔다. 차무희는 자기를 버리고 일본에 자리 잡은 애인과 애인의 새 여자에게 따지러 왔다. 차무희는 여러 언어에 유창한 주호진에게 통역을 부탁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시작된다. 응급 상황에 놓인 어린아이를 구해 준 대가로 받은 고급 식당의 식사로 둘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질 뻔했으나, 주호진은 급하게 또 어디론가 향한다. 자기 마음속 여인의 자취를 찾아.

각자의 시간이 흘러간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단역에만 머무른 차무희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호러 영화의 좀비 ‘도라미’ 역을 맡아 혼신을 다하는데, 대역을 쓰지 않고 감행한 마지막 촬영에서 사고를 당해 혼수 상태에 빠진다. 영화 속 주인공은 깊게 잠들었지만,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불렀고, 팬들은 주인공이 어서 깨어나기를 응원했다. 차무희는 결국 깨어나고,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정말 “어느 날 아침 자고 깨어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차무희는 자신이 잠들고 있을 때 주호진이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는 다인실에 있었고, 자신을 키워 준 친족에게조차 찬밥이었던 그는 세계적 스타가 되고 나서야 특실로 옮겨졌다. 살짝 씁쓸함을 풍기는 대목이다. 차무희는 고마움을 드러내고 싶었고, 마침 주호진도 차무희를 찾는다. 주호진이 차무희를 찾은 이유는 일본에서 차무희가 몰래 멀리서 찍은 주호진의 사진을 지워 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장소와 시간으로 인해 형의 여자를 몰래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드러날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불안과 억눌림이 만든 자아

차무희는 무명 시절을 딛고 자기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호러(공포물) 퀸으로 굳어진 이미지가 약간의 굴레로 작용하기도 한다. 거기에 극중 좀비였던 도라미의 인격이 불쑥 튀어나와 위기를 맞는다. 도라미는 지금의 상승세가 멈추고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어린 시절의 불행이 어우러진 인격체다. 일종의 다중 인격이다.

드라마에서 다중 인격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다. 신혜선이 주연으로 나온 ‘나의 해리에게’(2024)에서는 새롭게 형성된 인격을 누군가가 사랑한다. 분리된 인격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소멸해 가는 한 인격은 죽음을 맞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인격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이별을 맞아야만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런 이별 과정을 아주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 내지만, 거기엔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인격의 통합 과정은 자신을 억누른 과거와의 투쟁 그리고 극복하는 서사로 묘사된다.

‘나의 해리에게’는 다중 인격 문제를 아주 애틋하고 참신하게 풀어냈다. (장면 출처 =&nbsp;‘나의 해리에게’)<br>
‘나의 해리에게’는 다중 인격 문제를 아주 애틋하고 참신하게 풀어냈다. (장면 출처 = ‘나의 해리에게’)

툭툭 튀어나오는 도라미로 인해 주호진은 어리둥절하다. 어떤 때는 이 여자가 자신을 갖고 장난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라미라는 인격은 멜로 드라마의 또 다른 공식, 너무 쉽게 이어지지 않지만 희미하게 이어 가게 해 주는 기제로 작동한다. 주호진은 차무희도 사랑하지만 아주 당돌하기 그지없는 도라미도 사랑하고 만다. 사랑은 그렇게 아우러진다. 사랑은 이건 제치고 이건 받아들이고 하는 식으로 칼같이 나눠지지 않는다.

차무희에게 새로운 삶을&nbsp;안겨 준 ‘도라미’는 또 다른 인격으로 형성되어&nbsp;삶을 혼란스럽게 한다. 도라미라는 인격은 주호진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설레게 한다. (장면 출처 =&nbsp;‘이 사랑 통역 되나요?’)<br>
차무희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 준 ‘도라미’는 또 다른 인격으로 형성되어 삶을 혼란스럽게 한다. 도라미라는 인격은 주호진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설레게 한다. (장면 출처 =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주호진이 그토록 사랑했던 형의 여자는 형과도 이별하지만, 이제 주호진의 마음엔 그녀의 자리가 없다. 그 자리를 차무희가 채워 갔기 때문이다. 주호진의 마음속 여자는 결국 차무희의 매니저와 연결되는데, 그 대목은 이 드라마에서 꽤 맛갈난 감초 역할을 해낸다.

어쩌면 불통 속에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차무희에게 ‘로맨틱 트립’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안은 너무도 좋은 기회였다. 한국의 호러 퀸과 일본의 멜로 스타 히로와 만남은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기묘한 조합을 이뤄 내리라는 기대도 있다. 주호진은 둘 사이에서 통역을 해 준다. 그런데 히로는 좀비라며 차무희를 무시하며, 프로그램에 비협조적이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지만 주호진이 뒤에서 조용히 거들면서 프로그램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 히로는 처음에 차무희를 무시했지만 점점 그녀에게 빠져든다. 프로그램이 한창 무르익고 히로가 차무희에게 진솔한 이야기를 전할 때, 주호진은 그 말을 차무희에게 차마 곧바로 전해 주지 못한다. 그 장면에서 주호진의 차무희를 향한 마음이 아주 잘 드러난다.

영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 통역사인 그가 여러 언어에 능통할 수 있었던 데는 사회적 자본이 한몫했으리라는 점을 가족의 배경에서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여러 나라 말을 능숙하게 번역하지만 사랑의 언어에는 다소 미숙한 점이 있다. 주호진의 집안과도 친분이 있는 작가 선생이 이렇게 말을 건다.

“세상에 다른 언어가 몇 개인 줄 아나? 우리 통역사 선생님.”

“7,100개가 넘는 걸로 아는데요.”

“땡! 아니야. 세상 모든 사람의 수만큼 있지.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말을 해. 그러니까 서로 못 알아먹고 거꾸로 듣고 막말을 하지.”

이 대사가 이 드라마의 주제를 거의 함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말을 한다.’ 지당한 말이다. 무언가 한창 논쟁을 벌이며 이견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같은 말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언어 문제는 정말 난제다. 철학자들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공통어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인공 지능은 엄청난 용량으로 인간의 어휘뿐만 아니라 유형과 맥락을 읽어 내면서 꽤 그럴듯한 통역을 하기 시작했지만, 인간사의 복잡미묘한 행간에 흐르는 그 의미를 다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소통이 어떻게 잘되었는가에 문제를 집중했는데, 위압적인 인공 지능 시대 속에서 어쩌면 잦은 불통이 더욱더 인간적이고 인공 지능이 파고들기 힘든 인간사의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단 그 불통을 메우는 방편으로, 발성되는 언어 외의 더욱더 복잡한 음성 언어의 외적 언어를 더 많이 들여다봐야겠다. 사랑의 언어에 서툰 주호진에게 오히려 진솔한 언어는 차무희를 위해 마음 쓰는 몸짓, 차무희에게 다른 누군가의 사랑 어린 말을 전할 때 머뭇거림과 그 표정이었다. 일상에서 따뜻하고 고운 말 한마디는 무척 소중하다. 그건 분명 기본값이다. 하지만 말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다. 말 외에도 따뜻한 눈빛과 손짓 그리고 행위 같은 음성 외 언어가 더 풍성하게 발화돼야 한다. 많은 오해도 풀어내고 가뜩이나 겉으론 풍성해 보여도 곳곳이 메말라 있는 요즘 세상에 더 많은 온기도 뿜어 내리라. 이것은 정말 앞으로도 인공 지능이 따라하기 힘든 영역이겠지.

주호진은 차무희의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면서, 자기 또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른다. 히로의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하는 이 표정에서 그의 마음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다. (장면 출처 =&nbsp;‘이 사랑 통역 되나요?’)<br>
주호진은 차무희의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면서, 자기 또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른다. 히로의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하는 이 표정에서 그의 마음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다. (장면 출처 = ‘이 사랑 통역 되나요?’)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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