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같은 날들임에도 우리가 새날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 것은 어쩌면, 새로운 맘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살겠다는 어떤 결심일지도 모른다. 새해가 밝았고, 우리는 새롭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 앞에 서 있다. 오늘도 사랑보다는 미움과 오해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전쟁의 소식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날아든다. 시몬 베유는 인간됨으로 향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뿌리내림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되어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우리는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피어난 꽃을 발견하고, 상처받은 인간성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 우리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뿌리가 뽑혔는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우리들, 계속되는 전쟁의 소식 앞에, 지구 곳곳의 아픔에 대해 할 말을 잃은 채 멍한 눈을 들어 무력감을 곱씹고 있는 우리들은, 실재와 인공지능(AI)이 만들어 내는 진짜보다 더 그럴듯한 실재 앞에서 혼동을 겪는 우리는, 무너지는 환경을 난감해서 바라보는 우리는, 어쩌면 뿌리 뽑힌 사람들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생각해 본다. 뿌리가 뽑힌 채, 남의 땅에 몸 붙여 사는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늘 있었고, 성서를 통해 보이는 구원의 경륜은 늘 뿌리 뽑힌 사람들 사이에서였음을. 그렇다면, 뿌리가 다 드러난 우리 삶의 자리는 어쩌면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새롭게 거듭나라고 하는 절박한 초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새해를 맞으면서, 도대체 희망적이지 않은 이 때엔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하는 걸까 하는 비뚤어진 의문을 가졌었다. 그 의문과, 그 의문이 가지는 내 생의 태도에 대해 숙고하다 나의 이 질문은 자체로 성립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인에게 희망이란 말 자체가 오직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나의 질문은 하늘에 희망을 품은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뿌리 뽑힌 상태로 사는 21세기에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결국 하늘에 뿌리를 두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인도의 바니안(반얀)나무는 거꾸로 크는 나무인데, 어디선가 날아온 뿌리가 땅에 터를 잡고, 그렇게 뿌리를 내린다는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자기의 뿌리를 하늘로 뻗어 간다고 한다. 왠지 이렇게 거꾸로 자란다는 바니안나무에서, 세례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느껴진다. 뿌리가 날아가 땅에 자리를 잡는 거룩한 순간, 그분은 세례를 받으시고, 의무를 충실히 채워 가실 그분의 매일은 더욱 깊어지실 것이다. 맑은 물 아래 몸을 담그신 예수님의 첫걸음을 바라보다, 뿌리 뽑힌 많은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 속, 그 안의 나를 본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서류 미비 이민자를 추방하는 데 이어,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도 추방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많은 사람이 추방당했다. 내 이웃 필립도 이십 년의 미국 이민을 접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신앙인의 삶이 순례라는 것, 여행이라는 비유가 현실이 되어 버린 오늘,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음을(필립 3,5)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궁극적으로 희망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어떤 법이나 인간의 통치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 됨에 있고, 그리고 내가 희망하는 것은 마지막 시간에 완성될 하느님나라를 갈망하는 종말적인(apocalyptic) 꿈임을 되새기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은, 하늘에 뿌리를 두고 대신 옆으로 가지를 뻗어 가야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들은, 옆 가지와 함께 어깨를 겯고 견고하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현대의 경제와 사회 구조가 소외를 부추기고, 살아가는 형태가 점점 외로워질수록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 그것은 결국 우연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고, 경청하면서 서로를 부축하는 일이다. 세상의 거센 바람을 이기며, 함께 하늘나라를 희망하는 그런 작업이다.
세례를 받으러 광야로 나가신 예수님의 뒷그림자를 묵상하다,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장자권과 축복을 욕망한 야곱이 떠오른다. 그는 욕망했고, 그래서 추방된 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고단한 몸을 돌베개에 의지하여 눕히던 그날 밤, 그는 하늘나라의 사다리를, 하늘에 뿌리를 두는 삶을 보았다. 그렇다고, 그의 삶은 순탄하였나?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의 하느님을 만난 야곱은, 가장 그다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많고 많은 어려움을 만나야 했지만, 하늘에 뿌리를 둔 사람으로 변해 갔다. 어느 만큼 인생을 살고 나서, 누구의 삶이던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아픔에서 면제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사랑을 그리고 사람을 선택하는 일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나의 일상이 거룩하기를 소망하는 힘겨운 작업은 하늘이 사람이 되신 그 신비가, 요르단강물에 잠기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그럴 때, 나의 일상은 반복되는 (지루한) 어떤 신앙 고백이나 시간 맞춰 드리는 기도 행위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시간을 열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기쁨을 만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마치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 내는 뜻밖의 아름다움'을 찾으면서. 세상은 오늘도 연일 그리스도를 못 박고, 오늘 예수님은 또 새로운 일상 속을 꿋꿋이 걸어가신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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