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십일월이 오면, 내 영혼은 나 혼자만의 고요한 춤을 춘다.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November라는 십일월에는, 내가 온 길과 내가 걸어갈 길을 생각해 본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아무 미련 없이 자기의 거처를 떠나 길거리를 뒹굴고, 어둑한 저녁 산책을 하다 보면, 매 순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본질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히 11월에는 죽음을 묵상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죽음이란 알 수 없는 깊이에 매료되어 나는 수도 생활을 택했다.
대구 성직자 묘지에 가면,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오늘 오랫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신 한 자매를 기억하는 공동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유한성에 있고, 그 삶을 받쳐 주는 하느님의 손을 생각한다. 릴케는 이렇게 가을을 고백한다.
"잎이 떨어집니다. 멀리서인 듯, 떨어집니다.
하늘의 저 먼 정원이 시든 것처럼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
하지만 이 떨어짐을 부드러운 손으로
끝없이 맞아주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특히 오늘 평신도 주일에, 잠깐 지나는 이 세상을 순례자로서, 신앙인의 본질을 생각한다. 평신도란 말은 사실, 교회 전체를 의미한다. 즉 평신도는 사람, 하느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실존적으로 우리는 모두 교회다. 그러니 사제나 수도자라는 역할을 넘어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교회의 구성원이고, 그 교회라는 실존 위에 각기 다른 소명이 놓여지는 게 아닐까.
이 새로운 관점은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기원한다. 1962년,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게 쇄신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었는데, 쇄신 정신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시대에 맞는 현대화'와 더불어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레수르스망ressourcement'으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을 순례하며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교회, 즉 우리의 소명을 놓고 볼 때, 초대 교회의 가난한 자리로 우리는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이천 년 전, 갈리래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모였던 그 자리로. 그 자리에서 교회는 세 가지 좌표, 왕직, 사제직, 그리고 예언직을 받아안고, 생의 바다를 항해했으며, 이 좌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너의 생은 어떠하냐고 도전한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왕직과 사제직과 예언직이 무엇인지를. 왕직이란 우리가 본질적으로 왕의 위엄을 가진 존재란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초대다. 물질적인 척도로 사람의 자리가 정해지는 이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진 것 없어도, 또 내가 배운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찾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의 위엄은 나의 도덕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거나, 나의 우월감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내 영혼의 거지 같은 허영이 사라질 때, 나 본연의 왕과 같은 품위가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 같다.
내가 교회로서 사제직에 부름을 받았다는 건, 내 생의 모든 순간을 크고 작은 성찬으로 만들어 보라는 초대 같다. 누군가를 나의 집에 초대해서 내가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나눔의 식탁을 만들어 가는 일, 그래서 빵을 나누면서, 우리가 고단한 일상 속에서 위로받고 또 격려받는 공간을 만드는 일, 나는 그런 일을 창의적으로 기발하게 아주 잘하고 싶다. 여성 사제직 문제나 사제들의 성 추문, 권력 남용 같은 주제는 우리로 하여금 사제직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살아 내야 하는 사제직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까지 사라질 수는 없다.
마지막 좌표가 예언직인데, 방관자가 되어 살고 있는 내 일상을 놓고 보면 늘 부끄럽다.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만나는 상황에 적용해서,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적다 보니, 내 삶이 너무 옹색하다. 사랑을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이 일은 나를 작아지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작아지는 맘이 나는 좋다. 하느님은 이렇게 작아진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 같아서.
이 아름다운 십일월에, 그렇게 교회가 살아가는, 내가 살아가는 왕직이 소박하게 빛을 발하면 좋겠다. 나의 부끄럽고 조그만 예언직과, 기쁨으로 만들어 가는 성찬 자리들이 더욱 빛을 발하면 좋겠다.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신앙인의 좌표를 보고 항해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신앙인의 일상이 더 깊고, 아름답고, 또 꽉 채워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하여, 오늘 11월의 아름다운 날이 마치 내가 만나는 생의 마지막 날처럼, 감탄하면서, 기쁨 속에서 소박한 교회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란 지혜를 맘속에 새기면서, 하느님의 자비 앞에 서는 순간까지.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