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격월로 '파국의 시대 청년과 영성'을 연재합니다. 이 칼럼은 대학에서 오랫동안 청년들에게 신학을 가르쳐 온 신학자이자 교수이며, 학생 기숙사에서 상주하는 평신도 사목자(RM)로 활동해 온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다양한 세계적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영성과 신앙, 그리고 신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짚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교회 교육이 지양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바를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의 정신에 비춰 진단하고 성찰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조민아 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지지난 학기부터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성적과 수업에 대한 걱정 때문만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많아진 까닭이다. 경제 불안, 민주주의의 몰락, 단속과 검열과 추방에 기반한 공포 정치, 지속되는 전쟁으로 삶의 불확실성이 일상화 된 미국 사회 분위기에 학생들도 적잖이 영향을 받는 듯하다. 찾아오긴 했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앉아 있던 학생들이 한참 말을 돌리다 결국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것이 있다.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대상과 활로를 찾지 못하는 열망 혹은 열정이다.
명확한 답이 없는 실존적인 고민에 대해 신학자인 내가 어떤 조언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씨름해야 할 문제라는 걸 학생들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깊게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분석과 평가에 익숙한 교수이자 연구자라는 직책이 학생들과 나 사이에 일종의 방어벽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의식이 앞서니 듣는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그들의 고민과 공명할 수 있는 나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때마침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며 동반 사목을 할 사목자(Resident Minister)를 구하는 공고가 났다. 생활 공간을 학생들과 공유하는 것은 내게 큰 모험이었지만, 결국 그 선택을 했다. 하여, 지난 학기부터 나는 강의실에서는 교수로, 기숙사에서는 사목자로 학생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가르치는 일 역시 사목의 한 형태라고 여겨 왔기에, 직책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낮과 밤을 함께하는 삶은 교육자이자 사목자로서의 정체성과 본분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중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것이 청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청년들을 흔히 “개인화되고 계산적이며, 권위에 비판적이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세대”로 묘사한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대남/이대녀, N포 세대, 탈정치 세대, 유리멘탈 세대, 캥거루 세대 등등 청년들의 삶을 규정하고 포획하려는 시도는 끝이 없다. 주지하듯, 이러한 “청년 담론”은 불온하고 식상하다. 청년을 이해하려는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관리하고 동원하고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청년들 각자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삶의 조건을 단일한 세대 범주로 축소하고, 사회·정치·경제적 실패의 원인을 세대의 성향으로 전가하는 것이다. 청년이 집단적 분석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순간, 소통과 공감의 지평은 닫히고 각자가 겪는 삶의 고유한 서사는 사라진다.
강의실과 기숙사에서 내가 만나는 청년들은 세대론이 규정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일부의 성향을 전체의 특성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청년 세대의 이른바 “특징”은 세대의 본질이라기보다 사회가 허용한 삶의 조건을 반영한 결과며, 그 조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탈진한 상태에서 삶을 버텨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성세대가 기대어 온 “견디면 나아질 것”이라는 시간의 약속이 작동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노력과 인내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기대를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 모든 것이 경쟁이자 비교가 되는 세상에서 실패는 경험이 아니라 낙인이기에, 위험을 피하고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며 스스로의 에너지를 관리하는 방법부터 익혀야 한다.
정치와 제도에 대한 냉소 역시 무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변화와 책임을 약속했던 이들에게 번번이 배반당한 끝에 체득한 생존 감각이다. 이들의 관심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추상적 지향과 공적 담론보다 학자금과 경력, 월세와 빚, 안정된 직장과 집 장만 같은 물질적 삶의 조건과 직결된 문제에 머무는 것은 사유의 빈곤이 아니라 삶의 압력 때문이다. 왜 살아가는지 의미를 묻는 일조차 사치처럼 여겨지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간 누적된 청년들의 탈교회 현상은 이러한 시대적 현실의 투영이다. 교회 역시 청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망과 배신감만 안겨 주는 기성세대의 유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 이탈이 곧 영적 관심에 대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24년 미국 조사(스프링타이드·퓨 리서치)에 따르면, ‘무종교’ 청년의 상당수가 자신을 ‘종교적(68%)’이거나 ‘영적(77%)’이라고 인식한다. 제도 교회 밖으로 영성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2025년 사목연구소 조사에 나타난 한국 청년들의 깊은 회의와 무관심은 미국과는 양상이 다르다. 나는 이를 한국 청년의 영적 관심이 낮기 때문이기보다, 기존 종교 언어의 경직성이 초래한 결과로 해석한다. 종교적 틀에 갇힌 영성 개념이 청년들의 구체적인 실존을 담아낼 어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제29회 사목연구소 심포지엄 자료집)
청년의 삶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집단은 역설적이게도 극우주의와 근본주의 그리스도교다. 청년들의 극우화는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그들의 불안과 외로움을 선점한 극우주의 서사의 ‘승리’다. 이들은 고립되고 방향 감각을 잃은 청년들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 ‘혐오’라는 명확한 출구로 안내한다. 축적된 분노는 이주민과 여성, 소수자를 향한 공격으로 전화하고, 국가 재건과 안보라는 대의명분으로 왜곡된다. 여기에 보수 그리스도교 근본주의가 가세하면 혐오는 곧 신념이자 삶의 목표가 된다. 개신교 근본주의와 천주교 근본주의는 양상은 다르지만, 절대적 진리를 제시하며 청년의 불안을 영적 전쟁으로 해석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행위를 신앙적 순결로 미화하는 지점에서 만난다. 혐오가 거짓 구원의 탈을 쓰는 순간이다.
이 현실 앞에서 자문한다. 나에겐 청년들의 절망과 분노를 담아낼 ‘다른 삶’의 서사가 있는가. 혹시 나는 극우의 전사가 된 청년들을 집단 환각에 걸리기라도 한 듯 취급하고, 무력감에 숨은 청년들에겐 혀를 차며, 힘겹게 일어나 정의를 외치는 소수 곁에서 안도하는 것으로 '무책임한 희망'을 연명해 오지는 않았는가. 그들의 불안을 함께 느끼고 그들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듣기 위해 나는 과연 얼마나 노력했는가. 이미 청년들은 기계적인 사목 지침이나 이벤트성 기획이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현장의 사목자들 역시 청년을 교회의 소모품으로 대하는 관성과,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어쩌면 “모든 이, 모든 이, 모든 이”를 외치며 청년 사목의 감수성과 창의성을 강조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비전도 바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제37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청년들이 생존을 모색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고립을 함께 감당하고, 판단보다 동행을, 설명보다 경청을 선택하며, 교회가 청년의 삶과 복음을 잇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부름이 아니었을까. 무너진 청년들의 삶 속에 이미 깃든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태도의 전환’ 말이다. 그 한가운데서 청년의 언어로 복음의 의미를 함께 길어 올릴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나는 그 단초를 영성(Spirituality)에서 구한다. 영성은 종교 내부에 박제된 어휘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복음을 사유하게 하는 힘이다.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된 예수처럼, 영성은 취약한 삶의 한복판에서 초월의 현존을 일깨운다. 여기서 초월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허물고 타자에게 나를 내어 놓는 투신이다. 영성은 우리 삶을 관통하는 상실과 폭력, 절망의 현장을 도덕이나 규범, 권리와 정체성의 언어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한다. 대신 그 한계 너머에서 함께 느끼고 응답해야 할 '초월에 대한 갈망', 나를 멈추어 세우는 '성찰', 그리고 타자의 고통에 머무는 깊은 ‘주시(Attention)'라는 대안적 언어를 우리에게 건넨다.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에서 나는 이러한 영성의 언어로 청년들의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한다.
조민아
신학자.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과 종교학부 교수(The Department of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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