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 세미나에서의 환대 그리고 만남과 성장
한국인으로 미국 대학의 강단에 선 지 올해로 14년이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라 느끼면서도 내가 서는 이 자리가 조심스러운 것은 여전하다. 이제 막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파릇한 영혼들의 기억에 나의 언행이 어떤 파장이 되고 어떤 울림으로 남을까? 혹은 흔적도 없이 미끄러질까? 교육자의 역할, 그중에서도 젊은 세대를 만나는 자리는 결코 익숙해지면 안 되는 ‘위험한’ 특권을 갖는다. 누군가의 일생에 영향을 줄 기억들이 새겨지는 시간, 가장 찬란하면서도 아픈 삶의 일부를 동행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2027 세계청년대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젊은이가 바로 이 ‘가장 찬란하고도 아픈 시간’의 한때를 한국에서 보낼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누군가는 한국 땅을 밟으며 보고 느낀 경험들로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기도 할 것이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젊은 손님들을 맞아야 할까? 기대와 설렘, 고민과 우려가 교차한다. 오랜 시간 교회의 청소년-청년 사목에 헌신해 온 이들과 한국의 봉사자들이 이미 열정을 갖고 청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 역시 다양한 문화의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왔기에, 나의 생각들이 작으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글을 보탠다.
내가 강의하고 있는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타운대학교에는 마지스(Magis) 세미나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봄학기 7주간 수업과 1주간 현장 학습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다.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만큼 그 특징이 드러나는데,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경험함으로써 지식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고 의식 성찰을 통해 깊이 담아내는 것이 주된 목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미국인 학생 15명과 함께 일제 강점기, 분단과 정전의 현실, 민주화 운동 역사, 21세기의 다양한 갈등과 쟁점을 포함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사전 학습했고, 파주, 서울, 제주(2024년), 부산(2025년)을 여행했다. 종교와 신분을 초월한 다양한 평화 활동가들에게서 진정한 환대를 경험했고 특히 교회의 관심과 지원, 연결망은 이 수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덕분에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이 “삶을 바꾼 경험(life-changing experience)”이라고 할 만큼, 큰 은총 가운데 마칠 수 있었다. 아래 글은 마지스 세미나에 참여한 학생들의 후기와, 학생들과 동행하며 느낀 생각들을 모은 내용이다.
첫째로, 한국의 고난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슬며시 감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산업인 케이팝과 케이컬처 열풍 덕에 많은 청년이 한국에 동경과 선망을 품고 있다. 자칫 그들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앞세우고 싶은 유혹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이미지와 첨단을 걷는 문화는 순간적인 감탄을 자아낼지는 몰라도 마음의 울림을 가져오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단 하루를 살아 내기도 힘겨운 김용균 노동자와 같은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기후 위기, 전쟁, 극우화와 같은 전 지구적 위기는 청년들이 살아가야 할 내일을 오늘보다도 더 어둡고 아득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청년대회가 이러한 청년의 삶과 분리된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신기루 속에 성공 신화의 최면을 걸기보다, 세계 청년들이 짊어지고 있는 현실의 무게에 공감하고자 다가서는 대회가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폭력과 가난 속에서도 사회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며 분투해 온 한국의 역사를 적극 소개하면 어떨까.
마지스 수업을 통해 나의 학생들은 분단과 전쟁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DMZ를 순례했고, 일본군 ‘위안부’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여성 인권 박물관과 군부 독재와 맞서 싸우던 엄혹한 시절이 드러나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돌아보았고, 군사적 긴장과 핵무기가 일상을 위협하는 강정마을을 방문했고, 또 전쟁 난민으로 살았던 처절한 기억이 남아 있는 부산의 산동네를 걸었다. 학생들은 드라마나 유튜브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한국의 역사를 배우며 놀라기도 때론 분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중이 어깨를 기대어 함께 버티던 어제의 기억을 품은 채 오늘을 일구어 가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 또한 찾았다. 부둥켜안고 울며 웃었던 어제의 역사 속에 하느님의 위로와 이끄심이 있었기에 오늘과 내일 또한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째, 하느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마지스 현장 수업에 함께했던 한 학생이 "서울 거리에서는 왜 장애인을 한 사람도 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멋지게 조성된 도심의 산책로와 편리하고 깔끔한 지하철은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자랑할 만하지만, 그 안에서 시각 장애인이나 지체 장애인을 마주치는 일은 좀체 드물다. 도시 계획과 발전에 장애인의 시선과 처지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장애인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무관심이 그들을 거리와 일상, 성당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장애인뿐이랴, 한국 사회에서는 '정상'과 '보통'이라는 범주가 종종 폭력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 잣대로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재단하여 사회 밖으로, 우리 시야 밖으로 몰아낸다. 벌써 수년 전부터 한국은 다인종-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이주민과 난민들은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성소수자들 역시 공적 자리는 물론 사적 공간에서조차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다.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를 비롯하여 사회적 ‘정상성’이 만들어 낸 ‘변두리’에 놓인 이들도 있는 그대로, 청년대회의 ‘객’이 아니라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되면 좋겠다.
셋째, 규격화된 프로그램이나 교회 행사, 교회적 언어에 청년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한국 사회와 청년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으로 이 대회가 준비되기를 기대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참가자들이 불안과 혼란의 요소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탄탄하고 체계적인 일정을 마련하고, 안전에 대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조금은 여유 있고 느슨한 여정 속에서 세계 곳곳의 청년이 격식 없이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보고 느낀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함께 되짚어 보며 나누는 시간과 자리는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저장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마지스 수업 이후 학생들과 나눈 매우 인상적인 기억들은 모임 안과 밖에서 사람들을 깊이 만나며 하나가 되었던 우연의 체험들이었다. 지금 한국처럼, 트럼프 정부를 비롯한 세계의 정치적 혼란은 이민자, 성소수자, 여성과 아동의 삶을 특히 불안하게 만든다. 학생들 가운데 우울증과 불면으로 힘겨워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작년 한국의 비상계엄 후 광장을 채운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창의적이고 젊은 시위 문화, 재치와 즐거움이 돋보이는 저항 형태들을 보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기말 과제로 한국과 미국의 청년 운동을 비교하는 논문을 쓰고 있는 학생들도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불안과 격동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신앙에 목말라한다. 또한 교회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질문한다. 이들에게 어떤 답을 주려 애쓰기보다, 만남(Encounter) 속에서 스스로 길을 터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면 어떨까? 그리고 청년들이 열어 갈 미래에 교회가 기꺼이 뒷배가 되어 주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시작부터 마침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란 걸 기억하면 좋겠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대회가 망가지지는 않는다. 성공적으로 대회가 마무리된다 한들 청년들이 그저 도구처럼 쓰이고, 소진과 생채기에 고개를 젓게 된다면 그 모든 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욱이 세계청년대회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년들이 체험하고 성장하며 변화하기를 기대하기에 앞서, 이들을 양성하며 함께하는 이들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우선적으로 바라야 할 것 같다. 관점과 개인의 역량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청년대회를 위해 모이는 시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길을 바라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로마 8,28) 애쓰는 시간일 것이다. 나와 다른 관점과 의견을 거부하고 밀쳐 내기보다, 오히려 서로 다른 관점과 역량이 합해져 빈 곳들이 채워진다는 사실에 기뻐한다면, 그리하여 ‘친교의 신비와 시노드 정신’을 배우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지금까지 학생들과 함께하며 지내온 시간 중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인솔자로서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은 늘 두렵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가슴을 열고 다가와 진심을 믿어 주고 지혜를 나누어 주는 학생들을 통해 나는 ‘깨어지는 은총’을 선물 받는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이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영혼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다. 2027년 세계청년대회, 모든 시간 모든 공간 안에서 모두의 가슴이 기쁨으로 채워지도록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청소년 성가로 더 잘 알려진 최민순 신부님의 ‘고인의 기도’를 떠올리며 글을 맺는다.
주여,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조민아(마리아)
신학자. 미국 워싱턴DC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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