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만주 평화 순례’ 1

과거 흔적과 미래 평화를 희망하다

지난 8월 16일부터 22일까지 6박 7일 동안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주관하고 순교복자수도회 양운기 수사가 이끈 ‘만주 평화 순례’에 함께했다.

만주라 불리는 지역은 오늘날 중국 동북 지방인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골 동부까지를 가리킨다. 1870년대부터 1900년대 사이, 수많은 조선인이 이곳으로 이주해 한인 사회를 이루고, 항일 운동을 벌였다. 또 이 지역은 근대 동아시아의 격전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만주 순례는 '과거의 흔적과 대화하며, 미래의 평화를 희망'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여정을 '안중근의 발자취', '중국 한인의 항일 투쟁', '동아시아 격전의 흔적'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남긴다. 

2025 만주 평화 순례 6박 7일 일정

8.16(1일)

안중근 기념관(하얼빈역) - 소피아 성당(러시아정교회) - 조린 공원(안중근 의사 유묵비) - 김성백 집터 (추정) -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터(현재 화원소학교) - 중앙대가와 송화강변

8.17(2일)

731부대 유적 - 조선족 민족예술관(정율성 기념관)

8.18(3일)

윤동주 생가(명동교회 터) - 15만 원 탈취 사건 기념비 - 주덕해 유적 - 3.13 반일의사릉 - 윤동주, 송몽규 묘 - 용정일본총영사관 유적 및 지하 감옥 - 서전서숙(실험초등학교 안에 있고 문 밖에서) - 한낙연 공원 - 비암산, 일송정 - 용정 성당 - 팔도 성당 - 삼종사묘

8.19(4일)

백두산 북파 - 장백폭포, 노천 온천 지대

8.20(5일)

압록강 유람선(위화도, 신의주 앞) - 압록강 단교 - 이륭양행

8.21(6일)

항미원조기념관 - 최초 뤼순 관동군사령부

8.22(7일)

관동법원 구지 - 뤼순 감옥 - 안중근 묘지(뤼순 공동묘지) - 203고지(러일전쟁 당시 뤼순 항구 포위 때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 - 백옥탑

 

기나긴 항일 민족 투쟁의 서막,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일행은 하얼빈 공항에 내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2014년 한중 관계가 가까워졌던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에 기념물 정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시 주석은 통 크게 그곳에 안중근 기념관을 세웠다. 사실 그전까지 중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안중근 기념 사업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일본 아베 정권이 들어선 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와 역사 인식 문제로 갈등이 커지자, 중국이 기념관을 세운 것이기도 했다.

국운이 기울어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 안중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거사를 감행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당시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려 본다. 죽음의 순간까지 담대한 그였지만,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기도할 때처럼 마음 한쪽에서는 주저함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떨친 그의 결단은, 이후 나라가 강탈당했을지라도 민족이 다시 일어설 용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소를 기리는 현판.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동상.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의 거사는 소설과 영화 속에서도 의미심장한 동기로 등장한다.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이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 조선이 1980년대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장동건이 주연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또한 비슷한 설정을 따른다. 주인공이 과거로 건너갔지만, 시간의 문이 닫히면서 미래로 돌아가지 못한다. 훗날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에서, 그 주인공의 모습이 발견된다.  

혹자는 "어차피 망해 가는 나라에서 침략의 원흉 하나 제거한다고 대세를 돌릴 수 있겠는가?"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복거일처럼 ‘영어 공용론’을 비롯해 몇 가지 논란이 있던 우파 사상가조차, 안중근의 거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했던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안중근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여러 유적지를 통해, 중국이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청일전쟁 후 중한 양국 국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금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부터 시작되었다”(중한 역사 관계에 대한 담화, 1963년 6월)고 말할 정도로,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의 위상이 높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5․4운동 당시, 저우언라이는 부인 덩잉차오와 함께 톈진 난카이대학교에서 ‘안중근(망국한)’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니 저우언라이와 안중근은 나름 인연이 있는 셈이다.

거사 직후 중국인들은 큰 열광으로 반응했다. 중국 전역의 신문과 잡지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신속히 보도했고, 사설를 통해 그의 항일 애국 정신을 찬양했다. 서명훈 하얼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의 연구에 따르면, 당대 중국인들은 안중근의 의거가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유명한 문장가 장타이옌은 그를 “아시아 제1의 의협”으로 칭송했고, 개혁사상가 양계초는 “다섯 발자국에 피 솟구치게 하여 대사를 이루었으니, 웃음소리 대지를 울리누나. 장하다 그 모습,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글을 남겼다. 물론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안중근이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금기시되기도 했고, 지금도 일정한 경계가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항일 투쟁의 경험을 깊이 새기고 기리는 오늘의 중국에서, 안중근의 역사적 과업을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린 공원과 김성백 집터

아담한 이 공원은 1900년에 조성된 하얼빈 최초의 공원이다. 1946년에는 중국 혁명 열사 이조린 장군을 기려 ‘조린 공원’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이조린은 요령성 요양 출신으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지하 당원이 되었다. 이후 하얼빈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으며, 그의 곁에는 조선족 아내 김백문이 있었다.

이조린은 동북항일연군에 몸담아 김일성, 최용건, 김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섰다. 훗날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조선의 동지들과 생사를 함께하며 싸웠고, 아내 또한 조선족이었기에 그랬는지, ‘나에게는 조국이 둘이다’(중국과 조선)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안중근의 유묵 ‘연지(硯池)’와 ‘청초당(靑草塘)’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붉은색 손바닥 도장에 약지가 잘려 나간 모습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전 이 공원을 산책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을 앞둔 그는 두 동생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 다오.” 여기서 말하는 ‘할빈 공원’이 지금의 조린 공원이다.

안 의사의 의거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땅이었다. 그래서인지 성 소피아 성당 주변에는 마트료시카 인형을 비롯한 다양한 러시아 물건이 많다. 우리식으로 하면 한복을 입고 사진 찍듯, 성당 주변에는 러시아 공주풍 옷을 대여해 주는 곳도 있다. 늦은 밤에도 많은 아이가 그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리 간판 곳곳에는 러시아의 한자 표기 ‘아라사(俄羅斯)’가 보인다. 여기서 '아'는 '아관파천'의 그 '아'다.

조린 공원 정문. ⓒ2025 만주평화순례단
조린 공원 안의 안중근 의사 유묵비. ⓒ2025 만주평화순례단

조린 공원을 거쳐 김성백 집터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의 조력자였던 김성백 선생은 함경북도 종성 출신으로,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1898년 동정철도 건설에 참여하며 막내 동생과 함께 하얼빈으로 왔고, 현지에서 러시아인과 중국인의 신임을 얻으며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 1909년 하얼빈에서 동흥학교가 개교할 때, 그가 가장 많은 출자금을 냈다. 

그해 10월 22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해 김성백의 집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김성백 선생의 행적은 1920년 이후 확인되지 않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순례 첫날, 거사를 앞둔 안중근이 얼마나 깊은 고뇌 속에서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하며,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하얼빈 곳곳의 역사적 장소를 그렇게 거닐었다.

김성백 집터 앞. ⓒ2025 만주평화순례단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의연한 청년의 마지막 불꽃, ‘동양평화론’

순례 마지막 날에는 안중근 의사의 불꽃 같은 마지막 나날을 보여 주는 관동법원 구지, 뤼순 감옥, 그리고 안 의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 공동묘지를 찾았다.

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장면을 떠올리면, 절로 영화 ‘영웅’ 속 안중근 의사가 아주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밝히는 장면이 떠오른다. 실제로 안 의사는 범행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15가지 죄목으로 열거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관동법원.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관동법원.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당시 법정.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당시 법정. ⓒ2025 만주평화순례단

당당하고 의연한 한 청년은 이곳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상고하지 않는다. 관동법원 구지 곳곳을 귀에 쏙쏙 박히게 열심히 설명해 주던 한족 여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순례지 곳곳에서 일본 침략의 흔적을 마주했다. 특히 고문 관련 전시를 보면서, 그 잔인함에 서대문형무소의 관련 전시물이 오히려 순하게 느껴졌다. 민주화 운동 시절의 고문도 끔찍한데, 이곳의 잔혹함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관동법원에도 고문과 관련한 자료가 전시돼 있으며, 한쪽에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관동법원에서는 시설 관리를 위한 기부를 받고 있어, 약소하게 10달러를 내고 뤼순 감옥으로 이동했다.

관동법원 내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간.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관동법원 내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간. ⓒ2025 만주평화순례단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처음 조사를 받을 때, 일본 조사관은 당시 일제 당국에 눈엣가시였던 호머 헐버트를 독립운동의 배후로 몰아붙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꺼냈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른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 헐버트다."

도대체 호머 헐버트는 누구인가?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육영공원 교사로 활동하며, 한글과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도 결정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헐버트는 "조선 사람이 잠시 찌그러져 지내지만,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이라고 했고, 세월이 한참 흘러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1949년,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으로 초대받아 내한했으나, 고령의 몸을 견디지 못하고 병사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바람대로 그가 사랑한 나라, 제2의 조국과도 같은 한국에 안장된 셈이다.

역사 개그맨을 자처하는 썬 킴은 합정동 일대에 ‘헐버트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재 합정동 도로명 포은로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에게서 따왔지만, 사실 합정동은 정몽주와 아무 관련이 없다. 단지 한강변의 정몽주 동상 때문에 이름이 지어진 듯하다. 그런 역사적 의미가 빈약한 이름보다, 헐버트가 묻힌 곳을 중심으로 헐버트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정당하고 나을 듯하다. 한국을 위해 온몸을 바친 이방인에게 바치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호머 헐버트 선생의 묘지. ⓒ김지환<br>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호머 헐버트 선생의 묘지. ⓒ김지환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 전까지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썼다. 비록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리던 세상의 질서를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안중근의 혜안과 시대적 통찰은 놀랍기만 하다. 다소 이상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제안한 방식은 오늘날 유엔이나 유럽연합의 평화 구축 원리와도 상통한다. 미완의 ‘동양평화론’은, 일촉즉발의 불안정한 세계 정세 속에서도 어떻게 평화를 이끌 수 있을지 깊은 영감을 전해 준다. 결국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향한 의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뤼순 감옥 경내. 원래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일본이 접수하고 확장했다. 빨간색 벽돌 부분이 일본이 중축한 건물이다.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뤼순 감옥 경내. 원래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일본이 접수하고 확장했다. 빨간색 벽돌 부분이 일본이 중축한 건물이다.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지낸&nbsp;감옥 독방. 그는 여기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안중근 의사가 지낸 감옥 독방. 그는 여기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의 감방 설명문.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안중근의 감방 설명문. ⓒ2025 만주평화순례단

뤼순 감옥 한편에는 ‘뤼순의 국제지사들’ 관이 있다. 주로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 한국의 독립지사를 기념하는 공간인데, 입구에 이렇게 쓰여 있다. “뤼순 감옥은 일제 식민지 통치자들이 중․한․러․미의 반파시스트들을 수감하고 박해한 역사적 현장일 뿐만 아니라, 애국지사들이 정의를 실천하고 숭고한 이상을 선양하고 있는 장소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희생정신은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이며, 또한 세계 평화를 구현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민족혼이 이 먼 이녘 땅, 뤼순에서 저물어 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찹해진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압도적 열세에도 일제에 저항했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길, 당장에는 패배로 보여도 긴 역사 속에서 궁극의 승리를 알았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보노라면, 총칼을 앞세운 군인 정치가에 맞선 민주화 운동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곳은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 사이가 악화됐을 때 잠시 폐쇄되었다가, 정권이 바뀐 뒤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뤼순 감옥 안에 있는 ‘뤼순의 국제지사들’ 전시관 입구.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뤼순 감옥 안에 있는 ‘뤼순의 국제지사들’ 전시관 입구. ⓒ2025 만주평화순례단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의 흉상.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의 흉상.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곳.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곳.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곳에 놓인 사진.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곳에 놓인 사진. ⓒ2025 만주평화순례단

뤼순 감옥 한쪽엔 러일전쟁의 유적이 전시돼 있다.

청일전쟁(1894-95)에 이어 일어난 러일전쟁(1904-05)의 승리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겉으로는 일본의 승리였지만, 실제 전쟁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일본 대 러시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싸움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게 전쟁 비용을 지원했고, 막강한 러시아 발틱 함대는 영국의 계약으로 일본과 싸우기 위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내부 정세도 어지러워, 일본과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 침략은 탄력을 받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다. 결국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9년 안중근의 의거는 역사적으로 깊이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관련 유물.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러일전쟁 관련 유물. ⓒ2025 만주평화순례단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는데, 일제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그의 유해를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은 채 비밀리에 매장했다. 안중근 의사가 묻혀 있을 곳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뤼순공동묘지로 향했다. 스산한 길을 지나 누구 하나 와서 꽃 한 송이 놓아둘 것 같지 않은 묘비 하나 없는 묘역, 그곳 어딘가에 안중근 의사는 묻혀 있을 것이다.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안중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이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거기에는 이런 푯말이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 왔듯이 안중근 의사를 유해를 찾아 효창공원에 모신다면 아주 기쁜 일이다. 그 또한 쉽지 않을 일일 텐데, 설령 유해를 찾지 못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미 우리 민족에게 크고 드넓은 민족혼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 공동묘지. ⓒ2025 만주평화순례단<br>
안중근 의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 공동묘지. ⓒ2025 만주평화순례단

한국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영웅’(2022), ‘하얼빈’(2024) 같은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조선에서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은 한국 못지않다. 1979년 꽤 공들여 만든 대작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촬영 사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출생 125주년 기념 우표와 기념 주화까지 나왔다.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우생의 묘까지 있다.

2022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113주년을 맞아 북한 선전 매체들은 그의 업적을 집중 조명했다. 대외선전매체 <류경>은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단순한 개인 복수가 아니라, 일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정의의 애국 투쟁”이라며, 안 의사의 의거가 아시아 평화를 지향한 의미 있는 행동임을 강조했다.

반면 일본 당국은 여전히 침략과 역사적 범죄에 대해 온전히 사과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 중국까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확정한 상태다. 언젠가 남과 북이 결정적으로 가까워질 때, 안중근 의사는 의미심장한 ‘한 뿌리 인식’의 근거로, 한반도 통일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과서에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로 들었던 안중근 의사는, 역사 현장을 직접 보니 내 머릿속 세상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다. 그가 민족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 가치인 평화를 위해 성큼성큼  걸어간 선각자였음을 절감하게 된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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