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만주 평화 순례’ 2
순례는 굵직하게 안중근 의사로 시작해 안중근 의사로 마무리되지만, 이 지역에서 전개된 우리 민족의 치열한 항일 투쟁사와 중국 동포(조선족)의 끈질긴 민족애, 그리고 삶의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1870-1900년대, 조선인들은 이곳으로 이주해 한인 사회를 이루었다. 이 사회는 민족 운동의 기반이 되어 처절한 항일민족운동을 이어 갔다. 한때 한반도에 함께 살았던 한 민족이 타국에서 터를 잡으며 국적도 달라졌지만, 결국 그 뿌리는 하나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조선족과 핑구어리
2005년 설날 특집 드라마인 ‘핑구어리(苹果梨)’를 봤던 기억이 난다. 중국 연변 처녀가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불법체류자가 되지만, 차차 한국에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린 작품이다. ‘핑구어리’는 ‘사과배’로도 불리는데, 조선의 사과나무와 중국의 돌배나무를 접목해 만든 과일이다. 척박한 북간도 땅에 정착한 조선족들이 개발해 중국 과일 시장을 평정했다고도 한다. 한국의 조선족들도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며 즐겨 찾는 과일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는 중국에 뿌리내린 조선족을 상징한다. 언젠가 꼭 맛보고 싶은 과일이다.
김민기 선생이 연출하고 장기간 공연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도 주인공은 젊은 연변 여성이었다. 과거 드라마에선 중국 동포가 남한 사회에서 어우러져 가는 모습이 종종 있었지만, 요즘 드라마에선 끔찍한 법죄 집단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중국 동포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확산되는 지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일이다.
예전에 우리는 대만을 ‘자유중국’이라 부르며, 그곳을 통해 중국을 들여다보고 공부했다. 1992년, 우리가 중국(중공)과 수교하면서 비로소 중국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이때 같은 언어와 풍습을 공유한 조선족은 중국과 교류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한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도록 돕는 한편, 양국 간 문화 교류 활성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 주덕해 선생
지금과 같은 ‘조선족’ 개념은 사실,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인 주덕해 선생이 그들의 현실적 지위 향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시작되었다. 주덕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며, 중국에 사는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불러야 하고, 다른 소수 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될 때 그는 주석으로 임명되어 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1952년 8월 9일 자치구가 설립되자, 조선족은 크게 기뻐했고, 지금도 이날을 경축일로 기념한다.
(참고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1955년 자치주로 변경되는데, 이는 행정구역상 위상이 격하된 것이다. 자치주는 성 안의 하위 단위에 해당하고, 자치구는 성과 동급인 제1급 행정 구역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항일 무장 투쟁에 헌신했다. 원래 이름은 오기섭이었으나, 한 여인의 도움으로 살아나 그 여인의 성씨를 따르기로 하면서 주덕해로 이름을 바꾼다. 비록 중국의 공민이었지만, 그는 굳건한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민족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망을 가졌다. 조선족의 삶을 챙기고, 연변대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초대 교장(우리 식으로 총장)으로 취임했다.
1957년에는 연변예술학교를 세워 조선족의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확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훗날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때 그를 ‘지방 민족 분자’로 낙인 찍는 빌미가 되었다. 온갖 곤혹을 치르고 병까지 얻은 그는 1972년, 저우언라이에게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3일 연변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인 호북성에서 생을 마감한다.
문혁이 끝난 뒤인 1978년, 주덕해는 복권되었다. 1984년, 총서기 후야오방은 연변을 방문해 주덕해 동지의 기념비 건립을 지시했고, 비문을 직접 썼다. ‘주덕해동지기념비’는 1986년 연변대학 서북쪽 산등성에 세워졌다.
안내원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덕해는 당국에 조선족은 장을 담가야 하니 콩을 두 배는 더 주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추정되며, 두만강 유역을 비롯한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콩 탄화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리 음식 중에 장과 두부, 콩나물 등 콩을 재료로 한 것이 무척 많은 걸 보면, 우리는 ‘쌀의 민족’이면서 동시에 ‘콩의 민족’이기도 하다.
주덕해 선생의 백두산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 초에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된 역사인물 찾기 기획물 중 하나가 “주덕해”였다. 이 책의 부제는 “중국 조선족의 큰 별, 백두산을 지켜낸 민족 지도자”인데,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근거가 다소 약해 보인다. 당시 <한겨레> 신문에서도 주덕해를 소개하며, 백두산이 완전히 중국에 넘어가는 걸 막았다고 전해졌지만, 주덕해는 이를 결정할 위치까지는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 한다.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위대한 예술가, 정율성 기념관
순례 둘째 날, 하얼빈을 떠나기 전 ‘정율성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정율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다. 한반도 이남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과 중국에서 음악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중국의 국민 노래인 팔로군 행진곡과 ‘연안송’을 작곡했다. 그는 의열단 간부 학교인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난징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하며, 일본인의 동향과 밀정을 파악하는 비밀 업무를 담당했다. 1935년부터는 김원봉의 허락을 받아 난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일요일마다 음악 수업을 들었다.
정율성은 난징에서 일생의 동지이자 친구인 김산을 만났다. 1980-1990년대 많은 이의 애독서이기도 했던 "아리랑"은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의 한때 아내였던 님 웨일스가 김산과 인터뷰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위대한 항일 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율성과 김산 모두 조선의 독립운동가로서 중국과 연합해야 했고, 중국과 조선은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함께 싸웠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중국 공산당과 협력했고, 일부는 아예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김산은 첩자로 의심받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공산당, 일제 사이에서 의심을 받다가 무고하게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김산은 이후 덩샤오핑 집권 시기인 1983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의 결정으로 복권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정율성은 연안으로 떠난다. 그는 가창과 연주에도 뛰어났지만 점차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곳에서 루쉰 예술학원 음악부에 입학한다. 1938년 작곡한 연안송은 항일 의지가 가득 담긴 서정적인 노래로,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1939년에는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은 훗날 공식적으로 ‘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된다.
정율성은 중국 최초 여성 대사인 저우언라이의 양녀 정설송과 결혼했다. 해방 이후, 고향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북으로 가서 인민군 공식 군가가 되는 ‘조선인민행진곡’과 ‘조선해방행진곡’을 작곡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인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귀화한다. 전쟁이 끝난 뒤 정율성은 중국 소수 민족의 음악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작업을 이어 갔지만, 1966년 문혁 때 창작이 금지되어 10여 년간 작곡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문혁이라는 광기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는 그 무렵을 세상을 떠난다.
2023년 10월경, 광주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동상이 부서졌고, 정율성 공원을 비롯한 기념 사업은 2018년부터 추진되었으나 여러 이유로 중단된 상태다. 여기에는 그의 행적을 둘러싼 이념 논란이 한몫했다. 분단은 우리 역사에도 엄청난 왜곡과 손실을 초래했다. 김원봉 선생 서훈을 둘러싼 논란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이제는 낡은 이념적 틀을 벗어나, 보다 합당한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항일 운동의 요람 용정 - 3.13 반일의사릉과 15만 원 탈취비 사건
용정시는 길림성 안에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도시로,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조선족이다. 안중근 의사가 3개월 정도 머물기도 했던 이곳에서, 항일 투쟁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됐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 이후, 같은 해 3월 13일 용정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대대적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간도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이르러 시위가 격렬해지자,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순식간에 13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00여 명이 체포됐다. 순국한 13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3.13 반일의사릉은 원래 용정 개신교인의 공동묘지였으나, 급하게 이 터에 안장되었다. 이후 용정 시민들은 1990년부터 해마다 3월 13일 이곳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현재 용정시 인민정부 청사로 사용되는 간도 일본총영사관의 지하 감옥에서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이 혹독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그 처절한 고문의 현장을 재현해 놓았는데, 중국 당국은 항일 운동과 일제의 잔학상을 교육의 장으로 잘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었다. 올해가 전승절 80주년이어서 그런지,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틀다 보면 항일 투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심심치 않게 방송된다.
용정의 3.13 만세 시위를 계기로, 이전에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었던 독립운동은 무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애국단체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은 이듬해 또 다른 거사를 준비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젊은 단원들은 거사에 앞서 3.13 반일의사릉에서 눈물의 술잔을 올리며 결의를 다졌다.
1920년 1월, 철혈광복단 6인은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보내는 철도 공사대금 15만 원을 탈취했다. 탈취한 돈은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고자 했으나, 한 배신자의 밀고로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들 중 일부는 경성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고, 일제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용정을 떠나 새로운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항상 적보다 한때 동지였던 배신자가 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 상황은 멀리 떨어진 리비아 저항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1981년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서 앤소니 퀸이 분한 리비아 저항군 리더 오마르 무크타르는 붙잡혀 처형을 당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알라시여, 적의 손에 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0여 년 전 그 대사를 떠올리면 독립운동 과정의 어둠이 함께 떠오른다. 독립 투사들에게 배신자에 대한 응징은 아주 철저했고 단호했다.
우리가 빚진 민족 종교, 대종교와 삼종사묘
양지바른 곳에 있던 삼종사묘는 대종교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 그리고 김교헌과 서일이 나란히 묻혀 있다. 원래는 단군교로 시작되었으나, 일제의 민족 종교 탄압을 피하고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자, 대종교 지도부는 1914년 길림성 화룡현 정호촌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출신이었다. 1919년 무오-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한 대부분이 대종교 사람이었고, 1920년 청산리 전투도 사실상 대종교의 성과였다. 대종교는 무력 독립 투쟁은 물론 한글 운동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신채호, 주시경, 정인보를 비롯한 우리 역사의 빛나는 인물 중에도 대종교 관련자가 꽤 많다. 또 대한민국의 몇몇 대학이 대종교에서 비롯되었고 하니, 민족 종교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많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도, 사는 동네에 있는 대종교에서 만들었다고 하니, 대종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싶다. 천도교만 해도 3.1운동을 주도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의 정신을 키워 나간 ‘개벽’을 비롯한 잡지를 창간하고, 여러 학교의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종교와 같은 민족 종교가 자칫 사이비 종교처럼 비치기도 하는 인식은 문제가 좀 있다. 억압받던 시절에 조국을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민족 종교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배은망덕에 가깝다.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은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생가를 찾아 그의 시를 하나씩 읽어 나가 보면, 명동촌이 우리말의 보고 같은 곳임을 느낄 수 있다.
<사상계> 주간을 지낸 오리 전택부 선생(1915-2008)은 1980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랑방 중계’에서 구수한 말씀으로 친숙했는데,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명동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 등 학생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난 점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한다. 문익환에게는 성서 번역을 권하기도 했다.
결국 윤동주는 위대한 민족의 시인이 되었고,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 성서 구약의 상당 부분을 탁월한 우리말로 번역했다. 중국에서는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으로 표현하는데, 굳이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윤동주는 우리말과 영혼을 빛낸 위대한 시인이니까.
생가 주변에는 윤동주의 시비와 연환화(連環画, 20세기 초 중국에서 시작된 만화 양식으로, 이야기를 삽화 한 장과 해설문으로 담은 손바닥 크기 그림책)풍으로 새긴 비석도 볼 수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생체 실험 때문에 사망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윤동주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는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는 동갑내기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에게 눌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송몽규라는 인물도 조명된다. 요즘 출판사를 운영하는 배우 박정민 씨가 영화 속 송몽규 역을 맡았는데, 촬영 당시 송몽규의 묘소를 찾았다고 하니, 그 정성과 성의를 높게 평가할 만하다.
대학 1학년 때, 예비역이던 동기 형이 낡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몇 마디를 적어 선물해 주었는데,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잘 몰라도 그의 영혼이 얼마나 맑은지 느낄 수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영인본이 출간되어 큰 인기를 얻은 걸 보면, 그가 얼마나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시인인지 잘 알 수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공원
한낙연은 용정시에서 태어난 화가로, 용정 3·1운동(이른바 3.13운동)을 주도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제국 일본의 탄압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해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고, 그들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이동했다. 1923년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는 창조파와 함께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한낙연은 192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최초의 조선족 당원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 프랑스 리옹에 유학해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결합한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선보였다. 프랑스 유학 중이던 1937년 <파리만보> 사진 기자로 일제의 중국 침략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 운동과 국공 내전에 참여하며, 조선인의 애환과 풍속을 사실주의 작품으로 남겼다. 국공 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49살에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던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중국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낙연공원에서 그동안 잘 기억하지 못했던, 조국의 독립과 반제국주의 투쟁에 헌신한 예술가 한낙연을 다시 만난다.
비암산 일송정
말로만 듣던 일송정에 올라서야, 그것이 정자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소나무 한 그루가 있던 그 정자에서 독립 투사들은 감시자의 눈을 피해 밀서를 주고받았다. 엄중하고 두려운 일을 수행했겠지만, 그 정자에서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숨통이 트이고 호연지기가 키워졌을 듯하다. 투사들은 그런 기운 속에서 스스로 더욱 굳게 다짐했으리라.
그런데 일송정을 알게 해 준 노래 ‘선구자’는 원래 제목이 ‘용정의 노래’였다. 노래 자체가 용정의 풍경을 아주 생생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항일 노래로 알려진 ‘선구자’를 만든 작사가 윤해영과 작곡가 조두남의 친일 행적이 밝혀졌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여러 정황상 반박은 힘들 듯하다. 일송정 앞 노래비에는 ‘고향의 봄’과 ‘선구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이원수마저 친일파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두 노래의 가사는 시멘트에 덮여 지워지고 바위만 남아 있다.
돌아보면, 순례단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척 묵직한 자리로 향했다. 순례는 찢겨지고 잊혀진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이자, 닿는 곳마다 고도로 압축된 역사의 현장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6박 7일은 정말 숨 가쁜 일정이었다. 그 원대한 역사의 흐름을 짧은 시간에 담아내기엔 벅찼지만, 강렬한 빛이 마음속 깊이 스며든 순례의 시간이었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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