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평화 순례 - 독립운동가들의 혼과 숨결을 좇아서

평화로울 수 없는 그리스도인

‘평안하냐?’

고요한 아침, 부활한 예수가 건넨 이 말. 평안하고 평화롭고 싶다. 하루 살기에도 벅찬 현실에서 주변 것들엔 눈 감고 싶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극렬한 싸움을 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휴전 협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는 때 되면 반복되는 건국일 논쟁 중이다. 한반도는 서로를 주적이라 한다. 시끄럽고 복잡하다. 불 꺼진 성당, 조그맣게 빛나는 감실. 그 아래 머물고 싶다.

허나 평화가 오는가? 눈을 들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나체가 마주 온다. 성경을 펴 보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웃음이 아니라 ‘분노’를, 풍요가 아니라 ‘가난과 질병’, ‘피땀과 매질’ 심지어 처절한 ‘죽음’이 다가온다. 예수는 부활과 평화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한다. 숨을 불어넣으며 ‘평화를 주겠노라’한 그는 평화롭게 살지 않았다.

첫 여정지 뤼순에 도착한 만주평화순례단. ⓒ2024만주평화순례단<br>
첫 여정지 뤼순에 도착한 만주평화순례단. ⓒ2024만주평화순례단

첫 만남, 안중근 앞에 무릎 꿇다

2024 만주평화순례 '안중근은 살아있다-안중근과 독립운동가들의 혼과 숨결을 좇는 평화의 여정'이 시작됐다. 제주 강정마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올해 처음으로 기획, 주관한 행사로, 8월 16일부터 21일까지 5박6일 동안 만주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항일하며 젊음과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길을 따라갔다. 그 중심에는 조국 독립과 동북아 평화를 가슴에 품었던 청년 안중근 토마스가 있다.

안중근을 흠모하는 나에게 이 순례는 그 공간만으로 설렘이었다. 여정은 뤼순에서 시작됐다. 중국 요동 반도 끝자락에 있는 뤼순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빚은 참극의 현장으로 수많은 이의 피가 스며든 땅이다. 또한, 열렬한 항일의 자리며, 항일운동가들이 핍박받은 장소다. 이 지역에서 안중근은 의거 이후인 1909년 11월 3일부터 순국할 때까지 수감되어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일본관동도독부 관동법원을 오가며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3월 26일 순국한 뒤 뤼순감옥 주변 어느 묘지에 묻혔다. 순례단은 역사적인 이 세 곳 모두를 방문했다.

안중근과 그의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사형 선고를 받던 관동법원 내 고등법원 공판정에 들어섰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네 사람의 자리가 보였다. 안내자인 양운기 수사님이 어떤 이는 안중근, 우덕순 또 어떤 이는 마나베 재판장이 되어 앉아 보자고 제안했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을 때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한 아이가 이곳 재판장 자리에 서서 "안중근은 무죄! 땅땅땅" 하고 외쳤다고 한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용기에 다들 경탄했지만 여전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판정을 나오며 그가 앉았던 자리를 가만히 매만져 볼 뿐이었다.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장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도록 마련한 장소. ⓒ2024만주평화순례단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한 장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도록 마련한 장소. ⓒ2024만주평화순례단

관동법원 한쪽에 마련된 추모 자리에 들어섰다. 양쪽 벽면마다 안중근이 생을 마무리하며 써 내려 간 유묵이 걸려 있고, 국화꽃 화환들 가운데 하얀색 수의를 입은 안중근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묵념하며 각자 기도하자고 초대받은 우리는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때 순례단에서 최고령인 참가자가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꺼이꺼이 울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한참을 그대로 일어서지 않는 그에게서 "안중근은 무죄!"라 외쳤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스쳤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향년 31살 꽃다운 나이였다. 그가 섬기던 예수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그 앞에 무릎 꿇은 80세 노장은 무슨 기도를 올렸을까? 소리 내어 울며 무슨 말을 삼키고 있었을까?

그는 순례단의 좌장이 되었고 이틀 뒤 하얼빈역 안중근기념관에서 대표로 방명록을 남기며 이렇게 썼다. “안중근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조국의 후예로서 신앙의 후예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하얼빈공원을 함께 걸으며

안중근을 따라가는 이 여정에서 유난히 기다렸던 장소 중 한 곳은 자오린공원이었다. 이전에는 하얼빈공원으로 불렸다가 1946년 중국 항일전쟁 영웅 리자오린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면서 명칭을 바꿨다. 자오린공원 곧 하얼빈공원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머문 11일 동안 수시로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던 곳이다. 안중근의 유언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할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을 회복하면 고국으로 옮겨 안장해 다오." 안중근이 잠시나마 머물고 싶었던 그 역사적 장소가 여기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 도착한 자오린공원은 출입구가 화려했다. 한 음악가의 즉석 연주가 흐르고 있었고 자오린 장군의 비석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어머니와 아이도 보였다. 날씨가 화창했고 산책하기 좋게 잘 단장한 공원이었다. 스치면 모를 법한 자리에 안중근의 유묵비가 있었다. 못가에 푸른 풀이 돋아난다는 ‘청초당’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남았다. 시편 23편의 일부가 떠오른다는 안내자의 소개 뒤로 죽음을 목전에 둔 1910년 3월 좁은 감방에서 붓을 들었을 그가 떠올랐다. 신앙인 안중근 토마스는 진정 생을 다하는 그 날 영원한 푸른 풀밭에서 누워 쉬게 할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며, 마지막 시간을 참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그는 천국에 대한 확신에 차 있었고 가족에게도 끝까지 신앙하기를 권면한다. 교회로부터 일종의 배신을 당한 처지에서도 그는 믿었다.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자신의 신앙이었다. “天與不受反受其殃耳”(천여불수반수기앙이,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유묵에 나타나듯 안중근의 신앙과 애국은 하나였다.

청초당 유묵비에 새겨진 단지(斷指) 낙관에 손을 마주 대었다. 1906년 동의회 의병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승리했던 그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를 풀어준 이후 역습을 당해 대패했다. 절치부심하여 단지동맹으로 무명지를 자르던 그때의 다짐. 나는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가 거닐었던 그곳을 함께 거닐 뿐이었다. 의거를 앞두고 동지들과 들른 이발관과 사진관은 사유지가 되어 찾아갈 수 없었다. 안내 책자에서 동지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을 보았다. 유난히 앳되었다. 뤼순감옥에서 본 수의 입고 찍은 모습보다 서글펐다. 누구도 그에게 이 길을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랬다 해도 비난할 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거사 장소와 송화강변 그리고 하얼빈공원을 오가며 걷고 또 걸었다는 기록만이 그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청초당 단지 위에 손을 다시 대었다. 죄책감에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신앙과 책임감으로 다시 일어선 그에게 용기를 청했다. 인간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계 시민으로서 해야 할 몫이 내게도 있다면 한 걸음이라도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왼쪽부터) 김성백의 집터에서 안중근과 김성백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단. 자오린 공원에 있는 안중근의 유묵비로 ‘청초당’이라 새겨 있다. ⓒ2024만주평화순례단
(왼쪽부터) 김성백의 집터에서 안중근과 김성백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단. 자오린 공원에 있는 안중근의 유묵비로 ‘청초당’이라 새겨 있다. ⓒ2024만주평화순례단

청년 안중근과 동지들

하얼빈시 자오린공원과 가까운 거리에 김성백의 집터가 있었다. 김성백은 안중근 의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얼빈 국민회 만주지방회 회장이며 중국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재력까지 두루 갖춘 이였다. 안중근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주소가 바뀐 까닭에 다른 블록에서 한참 헤맸다. 다행히 미리 도착해 기다리던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찾아왔다. 김성백의 집터는 단층집이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주상복합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문 앞 언저리에 서서 김성백의 집에 들렀던 안중근 일행의 이야기를 들었다.

1909년 10월 22일 저녁은 매우 추웠다. 하얼빈의 겨울은 길고 매섭다. 추운 날씨에 들어선 동포의 집. 행여 그들이 피해를 입을까 의거 사실도 밝히지 못한 채 가족이 당도하기 전까지 잠시 머물겠노라 이야기했다. 김성백의 아내는 말없이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준다. 안내자 양운기 수사님은 이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안중근은 차마 그 밥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기로 마음먹고 하얼빈에 온 그였지만 30대 젊은 청년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파르르 떨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따뜻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있었다는 것, 밥 한 그릇 내어 준 이웃이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었을까?

차려진 밥을 내려다보며 차마 수저를 들지 못했던 안중근. 이 대목에서 나는 안중근이라는 인간 자체가 그대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제국주의의 잔혹함, 암울한 조국의 현실, 고통받는 이들의 호소를 느끼며 독립과 평화를 위해 자신을 단련했던 안중근은 동시에 밥 한 그릇에 담긴 사랑 앞에 무너졌으며, 결국은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안중근은 거사를 앞두고도 돈이 부족했고 동지들의 노자를 걱정했다. 김성백은 집도 내주고 돈도 내준다. 김성백은 쓰러진 이를 구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안중근의 의거로 인해 러시아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행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눈물 속에 한참 서성였다.

김성백의 집을 떠나면서 들은 유동하의 이야기는 특별했다. 유동하는 안중근의 거사 여정에서 통역을 맡았다. 하지만 그 역할이 다른 동지들에 비해 미미했고 거사와 직접 관련성이 적다는 평도 있다. 특히 유동하는 공판 중에 자신이 거사에 참여한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고 고백하며 혐의를 모두 부인한다. 그랬음에도 1년 6개월 동안 수감된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유동하는 출옥 후 18세 나이로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대한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다. 1918년 가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26세였다. 어린 나이에 민족 역사의 거대한 흔적을 남긴 의거에 함께했으나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중근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조국을 위해 남은 생을 내놓았다.

인간적이다. 안중근, 김성백, 유동하 그리고 알게 모르게 안중근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동지들의 이야기다. 안중근이 잠시 머물렀던 용정마을의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안중근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자신들과 함께 정을 나누었던 젊은이의 숭고한 죽음 앞에 한참을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그리 평화롭지도 못했다. 안중근은 가족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점이 의거 이후이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가족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길에서 그들도 고통스러웠고 살 떨리게 두려웠다. 동지들과 뜻이 갈라지고 배신당하고 오해도 받았다.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며 아버지의 뜻 앞에 섰던 것처럼 그들도 번민했으리라. 예수의 고뇌가 창피함이 되지 않듯 그들의 인간적임이 그들의 영웅적 면모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거룩한 인간성 앞에서 평화를 향한 단초를 찾은 것만 같았다.

강소진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 사람이다.
역사와 철학,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꿈꾼다.
예수살이공동체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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