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평화 순례 - 독립운동가들의 혼과 숨결을 좇아서
죽은 자를 찾아다닌 시간, 잊힌 이름들
순례 참가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죽은 사람만 찾아다니고 무덤만 헤치고 다니고 있어요.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사실 그랬다. 5박6일 여정 중 많은 곳이 무덤가였으며, 400페이지에 달하는 안내 책자에도 무덤과 묘비 사진이 빼곡했다. ‘안중근은 살아 있다’라는 만주평화순례의 슬로건 뒤에는 죽은 이들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다 하여 무덤을 헤매고 다니며 부산물을 탐하는 하이에나가 되거나 삶의 포기를 배우는 길을 걷고자 함은 아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소개한 순례 안내 책자의 말처럼 삶의 여정을 마친 독립운동가들에게서 생을 바라보는 자세를 배우고 우리가 사는 현실을 살아낼 방법을 찾고 평화로 향하는 길을 만나려는 헤맴이었다. 예수를 이 시대에 부활하게 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 앞에 머무는 그리스도인도 같을 것이다.
안중근이 묻혀 있는 곳-뤼순감옥구지묘지
안중근은 조국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그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순례단은 가장 유력하게 안중근이 묻혀 있을 것이라 지목되고 있는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찾았다. 뤼순감옥에서 1.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아파트가 즐비한 주택가로 들어서니 수풀 사이 비석 하나가 나타났다. 비석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뤼순감옥에서 사망한 이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그중 안중근의 것도 있을 것이다. 여러 연구 결과 안중근의 유해는 소나무관에 안치됐고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있을 것이라 한다. 황망했다. 이곳 어딘가에 그의 유해가 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개발의 속도를 어찌 막을까. 모기들만 오랜만에 포식한다. 잠깐의 묵념도 참지 못하며 모기를 쫓는 나약한 육신을 한탄했다.
1년 전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의 가묘를 찾아뵙고 언제가 이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염원과 현실은 이리도 멀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동북아의 평화를 원했던 안중근은 일제에게 사형당해 중국 땅에 묻혀 있으나 중국은 조선의 눈치를 살피고 조선과 한국은 서로가 껄끄럽다. 언제까지 이곳이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유해를 옮겨 오지 못한다 하여 안중근의 정신이 파묻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중근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시대의 먹구름을 걷어내는 도전이다. 평화는 그저 원한다고만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안중근이 원했던 동양의 평화, 세계 평화는 이 논리와 대립해 있다. 그래서 그는 이토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피가 산과 바다를 이룬 곳, 203고지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서 5분 정도를 걸어가니 자그마한 언덕에 커다란 위령탑이 보였다. 203고지는 러일전쟁 당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일본은 이곳을 손에 넣고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았지만 일본 1만 7000명과 러시아 6000명의 군인이 피를 흘렸다. 올라서면 한눈에 보이는 언덕, 그야말로 피로 산과 바다가 뒤덮였다. 고개가 뻐근할 정도로 높은 위령탑은 당시 탄피를 모아 세운 것이다. 지독한 싸움이었다. 이 전투의 배후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안중근 의거가 있기 전 하얼빈을 향하는 길에서 특별히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전장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 하얼빈을 향했던 그는 죽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람만이 솔솔 불었다.
일전에 어떤 순례객이 우리와 무관한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사실상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러일전쟁에 국내의 일진회가 협력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타국에서 일어난 전쟁이니 우리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남의 일인 양 구경하는 이들이 있다. 공공연히 전쟁을 지연하거나 대리 전쟁을 일으키고 무기를 판다.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기다리는 자도 있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봉분 없는 무덤, 203고지가 잊히면 안 되는 이유다.
서로에게만 힘을 얻었던 시절- 3.13반일의사능, 15만 원 탈취 사건
하얼빈을 떠나 용정에 도착해서 묘지 세 곳을 찾아갔다. 그중 두 곳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와 ‘3.13반일의사능’은 1919년 3월 13일에 있었던 용정 만세 시위와 연관이 있다. 용정은 조선족이 개척한 도시로, 독립운동의 핵심지였다. 삼일 만세운동 이후 용정에서도 3월 13일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일제와 중국 군벌이 진압을 위해 합동 작전을 펼쳤고, 시위에 나섰던 19명이 순국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급하게 13명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3.13반일의사능’이다. 삼엄한 감시 속에 가족들의 접근조차 쉽지 않아 70여 년 동안 관리되지 못했다. 묘지 앞에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파리가 말라 건들기만 해도 흩어질 듯했다. 순례단의 좌장이 묘비 앞에 절을 하고 술과 안주를 올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양운기 수사님은 이곳으로 오기 직전 들렀던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와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15만 원을 탈취하기 하루 전, 청년들은 이곳 3.13반일의사능을 찾아왔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순례단 모두 일순 정지했고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다. 거사 하루 전, 1920년 1월 3일 몰래 이곳을 찾아 선열들 앞에서 용기를 청하며 성공을 다짐했다. 이들의 가슴 속에 울렸을 이야기를 어찌 짐작이나 할까.
‘15만원 탈취 사건은’ 용정 3.13 시위 이후 채 1년이 되지 못한 1920년 1월 4일에 일어났다.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혈광복단 소속 청년 6명이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송되는 현금 15만 원을 탈취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15만 원은 현재 150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은행원 전홍섭을 포섭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운 이들은 결국 운송 마차를 습격해 15만 원 탈취에 성공한다. 그러나 무기 구매 논의를 위해 만났던 엄인섭이 이를 일본에 밀고한다. 엄인섭은 한때 안중근과도 의병 동지였으나 변절하여 밀정이 됐다. 가장 먼저 은행원 전홍섭이 체포됐다. 그는 실질적인 관련자가 아니었음에도 일제의 모진 고문을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 15만 원이 안전하게 연해주까지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2주가 지난 20일이 되어서야 사건의 전말을 자백했다. 관련자 대부분은 사형을 당했다.
일제가 발칵 뒤집혔다. 조선 청년들에게 습격당해 거금을 탈취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같은 해에 일어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까지 대패했다. 일제의 복수로 용정은 불바다가 된다. 1920년 10월부터 5개월 조선인 대학살 경신참변, 간도참변이다. 상상 못할 만행이었다. 무참히 죽어 갔다. 그런데도 용정의 항일은 꺾이지 않았고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도 끊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용정으로 들어오는 문턱에서 독립운동가들은 ‘3.13반일의사능’을 찾아 예를 표했다. 그곳엔 이미 죽음의 자리도 원망도 공포도 복수의 그림자도 없었다. 다만, 그들을 뒤따르려는 이들의 존경과 굳은 결의만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은 그렇게 서로만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맥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묘비 앞을 물러 나왔다. 순례를 시작하며 받은 배지를 ‘3.13반일의사능’ 묘비 앞에 꽂아 두고 왔다. 죽은 이들이 건네는 위로가 다가왔다. 순례는 깊어졌고 걸음의 이유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찾았다.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1시간 이상을 헤맸다. 현지 가이드도 처음으로 가 보는 곳인데다 안내자도 어느 시점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오전부터 내린 비가 잠시 개었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일행의 뒤를 쫓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간도참변의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윤동주는 한국에서 이미 유명인이며 일본과 중국에서도 소수나마 추종하는 이들이 있다. 송몽규도 늦긴 했지만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에도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명동촌을 찾아간 이가 많았다. 그러나 ‘3.13반일의사능’과 ‘15만원탈취사건기념비’를 찾는 발걸음은 적었다. 다음에 올 때는 벌초할 장비를 챙기겠다고 말한 한 참여자의 말에 웃으면서도 다음을 이어 줄 누군가가 있으면 싶었다.
괜히 슬퍼지는 중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의 묘지 위치를 여쭈었더니 잘 안다고 하며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조금전에는 ‘3.13반일의사능’에도 다녀왔다고 말씀드리니 그곳까지 다녀오셨냐며 순례단에게 고마움을 연신 표현하셨다. 연길에서 용정까지 운동하러 걸어왔다는 순박한 노인 덕에 어둑해지기 전에 묘소를 찾았다. 그는 진짜 천사였을까? 아님, 윤동주가 안중근이 보내준 사람이었을까? 나에게는 하나의 답으로 다가왔다. “걱정 마. 내가 그리고 여기 사는 우리가 아직 그들을 기억하고 있어.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그들이 서로를 기억하고 위안했듯이 그렇게 위안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렇다. 그들의 혼은 숨결은 마냥 흩어지지 않았다. 기억하기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디아스포라, 끝나지 않은 이념 논쟁
하얼빈에 들렀을 때부터 송화강변에 가서 꼭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안내자의 유혹(?)에 이끌려 하얼빈에서의 첫 공식 일정을 마치고 송화강변에 왔다. 짙게 깔린 어둠에 검은 강물이 조용히 흘렀다. 중국 공산당 설립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독립운동가 허형식에게로 이어졌다. 송화강을 건너면 닿는 도로변 들머리에 외로이 서 있는 비 하나. 허형식 그는 안동에서 북만주로 망명해 항일에 몸 바쳤다.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해 일제를 놀라게 했던 그는 치열한 전투 끝에 발각되어 중국에서 죽었다. 동지 둘 대신 자신을 내어 주고. 해방을 3년 남겼던 때, 예수가 생을 다했던 그 나이 33살이었다. 중국 근현대사 3대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도 마찬가지다. 19세에 고향 광주를 떠나 중국 전역을 떠돌며 의열단에서, 조선의용대에서 일본에 맞섰다. 음악을 무기 삼아 전열을 불태웠던 그도 죽는 날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조국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고 그들의 투신은 이념 논쟁에 시달리며 폄훼됐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과 하늘이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일송정에서 바라본 해란강도 그랬다. 일송정에 모여 독립의 꿈을 키우고 미래를 논했던 젊음들이 있었다. 해란강을 내려다보며 고국의 어딘가를 흐르고 있을 고향의 강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다. 친일 노래가 되어버린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말 달리던 선구자의 모습은 아득한 소망이었다. 타국에서의 삶은 여유롭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일제를 피해 숨어다니고 게릴라전에 나섰으며 숱한 날 목숨의 위협에 시달렸고 먹을 게 없어 풀을 뜯었다. 이역 땅에서 외로이 외로이 살았다. 해란강을 내려다보며 다 함께 ‘선구자’를 크게 크게 불렀다. 그들이 품은 꿈만은 친일의 얼룩이 덮을 수 없기에.
우리는 현재도 수많은 이유를 달아 이들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영원한 디아스포라로 남아야 하는 걸까. 그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에게 중국 땅은 항일을 위한 유일한 공간이었고 중국과 연합하는 것은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은 선택이었다. 최근 불거진 정율성에 관련한 이념 논쟁이 가슴 아픈 까닭이다. 송화강변 위에 동동 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송화강변을 거닐며 의거를 준비했던 안중근. 허형식, 정율성....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수많은 얼굴. 그 무게가 내려앉았다. 조촐한 안주와 맥주 한 잔을 넘겼다. 강변을 메운 연인들의 웃음 속에 강변을 수놓은 폭죽 속에 낯설게 그렇게 취하고 있었다.
강소진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 사람이다.
역사와 철학,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꿈꾼다.
예수살이공동체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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