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의 ‘만주 평화 순례’ 3
만주 지역엔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온갖 생채기가 깊이 남아 있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깊은 함정이다. 인간은 동물보다 잔인하고 탐욕스럽게 전쟁으로 영역을 넓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흔적을 톺아보면서 자성하고 평화를 갈망하며 계획하기도 한다. 순례가 깊어질수록 그 의미는 점점 더 ‘평화’로 귀결되었다.
러일전쟁의 상흔, 203고지와 백옥탑
인천시립박물관에는 러일전쟁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있다. 바로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함에 걸려 있던 깃발, 성 안드레이기다. 바랴크함은 러일전쟁 초기인 1904년 2월 9일, 제물포항에서 일본 전함 10여 척의 집중 공격을 받았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자폭을 선택했다. 러시아인들은 러일전쟁을 자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바랴크함의 항전과 선택을 ‘러시아의 영혼’이라며 영광스럽게 여겼다.
바랴크함의 깃발 또한 러시아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송영길 당시 인천시장은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 회담 때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이 깃발을 러시아에 2년간 대여하기로 합의했다. 일부에서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상징인 깃발을 대여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지만, 러시아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는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깃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꽤 우호적이었다.
우리가 먹는 약 중에도 러일전쟁과 관련된 것이 있다. 바로 배탈 설사 약의 대명사로, 예전엔 텔레비전 광고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정로환’이다. 러일전쟁 당시 많은 일본군이 만주의 열악한 위생 환경과 오염된 수질 때문에 설사와 복통으로 고통받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면서,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의미의 한자인 ‘정로환(征露丸)’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배경 때문에, 현재는 ‘정벌할 정(征)’ 자를 ‘바를 정(正)’ 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마는데, 사실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미국과 영국의 막강한 지원 그리고 쇠락해 가는 러시아 정세가 있었다. 러일전쟁은 한민족의 운명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본격 침탈하기 시작했고,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싸움터로 만들어 버렸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는 뤼순이 있는 요동반도를 잠시 점령했지만,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서구 열강 앞에 굴복하고 만다. 1898년, 요동반도는 러시아 손에 넘어가는데, 항상 부동항 확보가 절실했던 러시아에게 요동반도는 매우 귀중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곳에 러시아는 천혜의 요새와 해군기지를 구축했다.
요녕성 다롄시에 있는 203고지는 러일전쟁 당시, 1년간 이어진 뤼순항 포위 작전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뤼순 전체에서 병사 3만 병이 전사했는데, 그중 203고지 전투에서만 1만 명이 죽었다. 일본군은 203고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승리함으로써 요동반도를 다시 확보했다. 러시아의 난공불락 요새를 함락한 일본은 이 전투를 계기로 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요동반도는 이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03고지에서 희생한 일본 장병 약 1만 7,000명을 위로하기 위해 고지 정상에 위령탑을 세웠다. 이 거대한 탑은 러일전쟁 이후 수거한 포탄의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 이토는 1909년 10월 16일 시모노세키 항구를 떠나 10월 18일에 다롄 항에 도착해 203고지에서 참배했다. 그리고 하얼빈을 향했는데,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간 백옥산에서 바라본 뤼순 앞바다는 매우 평온하다. 백옥산 탑의 정식 이름은 ‘표충탑’(表忠塔)으로 일본군의 봉안당이다. 1907년 6월에 착공해 1909년 11월에 완공됐으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여기에 유골 2만여 함을 보관했다.
러일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했다.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이루어진 비공식 합의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민국 지배를 사실상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필리핀 통치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합의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6년 필리핀을 식민지화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혹자는 "유럽에서는 독일이 강해지면 평화가 깨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약해질 때 평화가 깨졌다"고 한다. 세력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견해다. 조선의 몰락 이후, 동아시아는 격랑의 파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731부대와 한국전쟁 세균전 의혹
731부대의 비극은 일본의 중국 침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은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을 가리킨다. 훗날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을 사실상 통치하며, 관동군 사령관이 만주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일본 관동군은 끊임없이 중국을 침략했는데, 731부대를 통해 세균전을 준비했다.
최근 중국에서 영화 ‘731’을 만주 사변이 일어난 9월 18일에 맞춰 개봉했다. 개봉 당일 영화표 매출이 3억 위안(한화 약 587억 원)을 넘어 중국 내 개봉 첫날 흥행 1위에 올랐다. 영화는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 실험으로 3,000여 명의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영되자마자 중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주중 일본대사관은 자국 교민들에게 주의령을 내렸고, 일부 일본인 학교는 휴교까지 했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이렇게 불거지지 않았겠지만, 731부대의 악행은 잔혹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로, 민간인을 위협하는 일은 자제해야 마땅하다. 역사적 죄악을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가 이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한 점도 기억해야 한다.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역사박물관, 정식 명칭 ‘침화 일군(侵華日軍,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죄증 진열관’으로, 731부대의 만행과 전쟁 범죄 증거를 전시하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말로만 듣던 반인륜적 생체 실험이 어떻게 자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자료가 보존돼 있다.
난징 학살 기념관과 마찬가지로, 731부대 역사박물관 같은 역사 유적지는 중국에서 ‘애국 교육 기지’로 활용된다. (‘애국 교육 기지’는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애국주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정통성을 대중에게 교육하고 고취하기 위해 지정, 운영하는 시설과 장소를 통칭한다.) 중국 당국은 일제의 잔악한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두어, 이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쓰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 민중은 일제에 겪은 고통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최근 참으로 어이없는 혐중 정서가 팽배하지만, 적어도 일제에 맞서 함께 싸웠고, 일제의 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순례 둘째 날인 일요일에는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이 박물관을 찾았다. 2번째 이야기까지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는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드라마로 재현하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731부대는 비밀 생물전 연구개발을 위해 1936년 흑룡강성 하얼빈에 설치된 관동군 예하 부대로, 공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였다. 일본 범죄자들은 생체 실험의 희생자를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丸太)’라고 불렀다.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조선인이 마루타로 희생되었으며, 그중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온갖 실험을 자행했는데도, 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해 상당수 부대원은 생체 실험 자료를 미국에 제공한 대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 자료는 세균전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던 미국의 생물학 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귀중한 정보로 활용되었다. 731부대원은 전후에 각자 승승장구했으며, 생체 실험으로 얻은 연구 결과는 일본 의학계 발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731부대의 범죄를 괴뢰 정권 만주국이 저질렀다며 꼬리 자르기를 하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꼴일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731부대의 연구 자료가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에도 활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조선은 미군이 일본 731부대의 기술을 활용해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전쟁 당시 한겨울 흰 눈밭에서 세균에 감염된 각종 벌레가 우글거리는 영상을 공개하며, 국제조사단의 조사를 요구했다. 영국, 스웨덴,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온 ‘국제 과학자 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이 조선을 방문해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단을 이끈 영국의 조지프 니덤이 작성한 600쪽 넘는 보고서가 바로 ‘니덤 보고서’다. (조지프 니덤은 생화학자로 중국 과학사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세기의 명저로 평가된다.) ‘니덤 보고서’는 세균전이 분명히 있었다고 결론 내리는데, 그 과정에서 731부대와 관련성도 언급한다.
이와 관련해 2000년 7월 2일 <MBC>에서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 비밀 미국의 세균전'에서는 여러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다각도로 비췄다. 미국은 이를 전면 부인하며 공산주의의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세균전 의혹은 정황상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맨해튼 계획을 진행하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감행한 미국의 행태를 볼 때, 세균전을 시도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쨌거나 731부대의 만행은 생체 실험의 희생으로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항미원조기념관, 미중 패권 경쟁의 상징
일본과 전쟁 그리고 국공 내전을 마무리하고 1949년 신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오랜 전쟁에 지친 중국은, 그러나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는 한국전쟁에 명장 팽더화이를 앞세워 참전한다. 중국군은 오랜 훈련을 거친 뛰어난 병력으로, 그들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른바 ‘인해전술’처럼 단순히 쪽수로 밀어붙였다는 주장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항미원조기념관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중국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였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는데, 마오쩌둥은 “중국인의 의리의 표본이다. 아들의 시신을 조선 반도에 그냥 두라”고 명했다. 이 명령대로, 마오안잉의 시신은 지금도 조선 땅에 묻혀 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유엔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이에 맥아더는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에게 중국에 핵폭탄 사용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모두 34개의 핵폭탄을 요청했다고 한다. 핵을 사용하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수 있었기에, 트루먼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한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계속해서 핵 사용을 요구했고, 결국 하극상을 저지르고 만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했고, 이 결정으로 트루먼의 지지율이 폭락하며, 민주당 대선 후보를 포기하게 된다. 맥아더는 전역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꽤 멋진 말을 남겼지만, 그 배경은 이랬다. 맥아더는 대통령 선거를 노렸으나, 그의 부관이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었다. 큰 인기를 잃은 트루먼은 훗날 재평가가 이뤄졌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죽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과 미국은 중국의 개혁, 개방과 미국의 소련 견제라는 이해관계가 잘 맞아, 관계 개선의 기반을 마련했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4월에는 미국과 중국 간 탁구 경기, 이른바 ‘핑퐁 외교’가 열리며 양국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기 시작했다. 정식 수교는 1979년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이후 최근 미중 패권 경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40여 년간 양국 관계는 무난했다. 2023년 세상을 떠난 헨리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미중 관계 정상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키신저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1814년 오스트리아제국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체제’를 연구했다. 빈 체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흔들린 유럽 군주제 질서를 세력 균형으로 복원한 체제다. 이러한 연구가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 이론의 바탕이 되었고, 미중 관계 개선에도 활용된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다양한 경제적 특혜를 주었으며, 중국은 고도성장기를 맞았다. 한국도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으니, ‘안미경중(安美經中: 중국과 경제 협력과 미국과 안보 협력 병행)’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천성의 속담에서 유래한 ‘흑묘백묘론’을 거론하며, 중국의 개혁,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자신의 재능이나 힘을 함부로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며 힘을 기른다’는 뜻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유훈으로 남겼다. 하지만 중국의 가파른 성장과 미국의 불안감이 맞물리면서, 미중 관계는 패권 경쟁의 시기로 접어들고 만다. 미국의 소련 견제에는 성공해 소련은 해체됐지만, 그 공백을 중국이 채우면서 양대 강국의 대립은 세계적 불안 요소로 떠올랐다. 현대 미중 관계를 보노라면, 역사는 얼마나 의도치 않게 흘러가는지 절감하게 된다.
이제 미중은 수십 년간의 순탄한 관계에서 다시 한국전쟁 시기의 긴장 관계로 환류하고 있다. 최근 ‘항미원조’가 부각되는 이유다. ‘패왕별희’로 유명한 천카이거 감독조차 최근엔 ‘지원군: 존망의 전투’ 같은 국뽕적 항미원조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항미원조기념관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국군의 기록을 고스란히, 혹은 약간 과장되게 담아내면서, 조선과 중국의 동맹 관계를 상징하는 내용물도 다수 전시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중국이 미국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미국 또한 중국에 두려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청나라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부터 중국은 점차 쇠락했고, 아편전쟁 이후 강대한 제국에서 서구 열강에 물어뜯기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곳곳에 군벌이 난립해 내전이 이어지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중국 본토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오늘날 패권국으로 발돋움한 중국을 경계의 눈초리로 볼 수 있지만, 과거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받았던 수치스러운 역사가 안겨준 두려움 또한 여전히 있을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관련해서는 많은 말이 오간다. 한쪽에서는 미국의 몰락을,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의 몰락을 이야기한다. 지금으로선 세계가 어디로 흘러갈지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단,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하는 파국을 막기 위한 인류의 지혜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평화 중재자 역할도 기대해 본다.
압록강에서 멀리 위화도와 신의주를 바라보다
비가 많이 내려 자칫하면 유람선을 못 탈 뻔했으나, 다행히 비가 그쳐 탈 수 있었다. 압록강을 따라가며 머지않은 위화도와 신의주를 바라본다. 위화도 쪽을 보는데, 군인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질통을 메고 대오를 이루며 일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머지않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디딜 수도 있으면 좋겠다.
이제 남과 북은 이미 두 국가임을 인정하자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미 유엔에 동시 가입한 사실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 예전에 유엔 가입에 반대했던 이유는 분단을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미수복 지역으로 규정한 지금의 애매한 상태가 관계 회복의 발목을 잡는다.
서로를 ‘대한민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한국’과 ‘조선’으로 부르며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늘려 가야 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면 얻을 수 있는 구체적 이익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꼼꼼히 살펴보면 무척 많을 것이다. 남도 계속 변하고, 북도 계속 변하며, 그 변화의 지점이 그동안 벌어졌던 이질성을 동질성으로 전환하는 긴 과정을 만들어 간다.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현실적으로 통일은 당장 물 건너간 듯 보이지만,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그 전에 최선은 서로 싸우지 않는 항구적 평화를 유지하고, 사안마다 함께하며 이로운 일을 계속 늘려 가는 것이다.
일행 중 한 분이 저 멀리 북녘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종종 파주 지역에서 바라보던 북녘의 땅도 그랬지만, 압록강 저 너머로 보이는 북녘땅은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한다.
며칠 전에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우리가 바라보았던 위화도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와는 다르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는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았다. 그러나 현재의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에 있어 수심이 깊고 강폭이 넓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섬이다. 결론적으로, 이성계의 회군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지형과 상황에 맞는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이 또한 다시 살펴볼 일이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한 바퀴 돈 뒤, 곧바로 압록강 단교를 찾았다. 조선의 신의주시와 중국 단둥시를 잇는 이 다리는 일본의 대륙 침략 수단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유엔군이 폭파시켰다. 이후 복구되지 않은 채 끊어진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이곳 또한 ‘항미원조’를 기념하고 교육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평화의 사도로서 안중근을 부르며
쭉 돌아본 동북 3성 지역은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는 그동안 유지된 평화 때문이리라. 하지만 과거의 흔적은 이 평화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점을 상기시킨다. 정세가 급변하면 동아시아가 또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장담할 수 없다. 과연 동아시아 평화는 가능할까? 전 세계적으로 만만치 않은 생산력과 군사력을 갖춘 한중일은 어떤 선택을 할까? 님 웨일스의 "아리랑" 속 주인공인 항일 운동가 김산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면서도, 한중일 민중의 평화로운 공존과 연대를 꿈꾸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간 순례지는 다양한 각도에서 ‘지금 여기’ 평화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는 아주 잠깐이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뼈를 깎는 자성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잠시 철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을 잃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 많은 평자가 지금 세계는 어느 때보다 전운(戰雲)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안중근은 동아시아가 격전지가 될 것을 예언자의 눈으로 간파했으리라. ‘동양평화론’을 쓰며 한중일의 평화 공존을 꿈꾼 그의 혜안과 통찰은,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순례길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참 심부름꾼이요 평화의 사도인 안중근 의사를 불러내고 또 불러낸다. 평화, 아주 멀고 험난하지만 꼭 가야 할 길이다. 안중근은 그 순례길의 이정표였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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