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늦잠을 자지만 일요일엔 더욱 늦잠을 잔다. 새벽녘 잠에서 깬 아이가 어스름 창을 배경으로 기도하는 엄마 모습에 안도하며 달콤한 잠에 다시 빠져드는 유년 시절을 선사하고 싶지만, 자기들보다 더 늦게까지 자는 엄마를 겨우 깨우면 기름진 얼굴, 떡진 머리, 눈꼽 낀 얼굴로 일어나곤 하는 엄마 모습이라는 추억을 선사하는 중이다. 메리와 내가 꼴찌를 다투는데 그래도 메리보다 일찍 일어난 날은 기분이 좋다. 외갓집에 가면 마당에서 나는 개 짖는 소리, 창호지를 통과해 번지는 햇살, 바깥에서 들리는 어른들의 말소리, 아궁이 불 때는 냄새에 깨고, 집에서는 아빠가 틀어 놓는 전축 소리에 시끄러워 깨고, 할아버지 댁에 가면 방문을 연 데다 이불마저 걷어 가 추워서 깼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자다, 자다 더 이상 잠이 안 올 때 깨는 것 같다. 나에겐 잘 들리지 않지만 옆집 할아버지 경운기 시동 거는 소리, 뒤뜰 앵두나무 주변에서 와르르 떠드는 참새 소리, 새벽에 일어난 아빠가 공부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픈 나는 얼른 내가 먹을 밥을 차리는데, 나 빼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아침엔 한참 동안 입맛이 없다고 밥을 사양한다. 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수도 안 한 채 푸짐하게 아침을 먹으며 살펴보면 우리 집은 법도도 규칙도 없는 집안 같다. 정갈한 아침 풍경은 나부터 글렀지만 아이들도 제멋대로다. 구도가 안 나온다. 한 명은 누워 있고 둘은 뛰고, 때론 한 명은 책을 읽고 둘은 치고 박고 씨름을 하고. 일요일이지만 늦게라도 출근(작은 동네 책방을 열었다. 이건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해야 하는 남편은 음악을 틀어 놓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SNS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났던데,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다가 금방 뭘 보냈다고 하고 나선 출근 전까지 마당을 배회하곤 한다. 마당을 훤하게 치우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목장갑이나 떨어뜨리고 다니는 것 같은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보강하고 있다고 믿는다. 햇볕에 바랜 개똥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마당 한 켠을 심각하게 쳐다보지만 결코 내가 나서는 일은 없다.

맨날 놀면서도 일요일엔 좀 더 확실히 놀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진가 보다. 텔레비전도 핸드폰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심심해 하면서도 다른 걸 하고 놀 줄 안다.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시합을 하거나 블록을 맞추거나 싸우거나 울거나. 그래도 아침엔 평화로운 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주 싸우는데 싸움의 빈도가 5분에 한 번꼴이 되면 나는 아까부터 앉아 있던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머리를 감으러 간다. 머리를 감는 동안(보통 5분이 걸린다) 꼭 무슨 사단이 나고야 마는데,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화장실 문을 벌컥 열며 ‘엄마!’ 하고 일러바치러 오는 거다. 평균 세 번. 그럴 때마다 “엄마 머리에 거품 있어서~” 하거나, “뭐라고? 물소리 때문에 안 들려!” 하거나, “응응. 그럼 안 돼지~ 이따 나가서 얘기하자~” 하면 씩씩대던 애들이 문을 닫고 나간다. 머리를 감고 나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어서 아까 일을 두고 다시 논쟁할 일은 거의 없다. 아이들 사이에선 계속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곤 하니까.

문방구 앞에서. ©️김혜율<br>
문방구 앞에서. ©️김혜율

오늘은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메리가 뭘 사야겠다고 한다. 일명 뽁뽁이라고 하는 건데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다. 문방구에 꼭 가야 한다니 가 보자. 덩달아 욜라, 로도 따라나선다. 그런데 일요일에 문방구 문을 열려나. 일요일에도 열 가능성이 높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를 향하여 출발. 집에서 차로 20분이 넘게 달려갔다. 문방구에 도착해 보니 안이 어둡다. '문 닫았나!' 했는데 셔터가 위로 올려져 있고 안쪽으로 동그란 하얀 전구 불이 보이길래 '열었구나' 하고 안도했다. 아이들을 이끌고 문방구 안으로 들어가니 와! 애들이랑 몇 번 왔었다던 남편 말대로 물건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내부 구성을 자랑하는 곳이다. 출입구를 제외한 벽면 전체가 물건으로 가득 차 있고 중앙엔 온갖 잡동사니로 구성된 거대한 직육면체 모양의 섬이 있었다. 어른 키 만한 섬이었다. 그 섬에는 먹을 것과 장난감이 면마다 가득했고, 바닥부터 대략 10층 정도의 선반과 물건 상자로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물건이 쓰러지지 않도록 아래는 넓고 올라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탑과 같은 구조였다. 맨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불량식품 종류도 최고였다.

우리는 일단 용건부터 말했다. “뽁뽁이라고 있어요?” 두리번거리는 나와는 달리 메리는 이미 물건을 알아보았다. 있다. 뽁뽁이가. 계산대 근처에 준비된 색색의 뽁뽁이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문방구 아저씨가 신나게 말씀하신다. “애들이 다 이것만 찾아요. 하하하!” “아, 네.... 이게 뽁뽁이구나. 얘들아, 하나씩 골라 봐~” 고무 비슷한 말랑한 재질로 된 뽁뽁이는 한 개에 3000원이라고 했다. 학교 앞 문방구 치고 꽤 비싼 편인데 한숨이 나올 만큼 조악해 보이진 않는다. 뽁뽁이를 고르면서 아저씨와 대화를 했다. “이게 요즘 애들 사이에서 인기인가 봐요?” “아이구, 그럼요. 오늘도 문 열자마자 애들이 7명이 줄을 서서.... 하핫. 아니 줄을 선 건 아니지만 하여튼 간에 다들 이거 사러 온 애들이야. 어떤 엄마는 애랑 이거 사러 20분이나 걸어왔대요. 허허허.” ‘아저씨.... 저희는 차로 20분이어요.’ 우리 사정을 알면 아저씨가 놀라실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뽁뽁이를 고르는 동안 아저씨는 계속 이야기를 하신다. “이걸 내가 늦게서야 들여놨어요. 애들이 학교 마치고 들러서 맨날 찾길래 나는.... 저! 그게 그건 줄 알고.... 괜히 저 비싼 걸 사다 놨지....” 아저씨는 건너편 선반 맨 꼭대기를 가리킨다. 물건 포장할 때 완충제로 쓰는 진짜 뽁뽁이(에어캡)가 두툼하게 말려 있었다. 이 문방구에 전혀 안 어울리는 뽁뽁이 한 두루마리! 저건 어떻게 파시려나.... 기억해 뒀다가 겨울에 창문에 붙일 뽁뽁이를 사야 한다면 이 아저씨네 문방구에 들러 좀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서로의 뽁뽁이 구경 중. ©️김혜율<br>
서로의 뽁뽁이 구경 중. ©️김혜율

아이들은 이미 맘에 드는 모양과 색깔의 뽁뽁이를 각자의 물건 바구니에 담은 뒤 과자섬을 탐험 중이다. 로가 흥분한 얼굴로 소다맛 크림, 라면과자, 드래곤 총알 사탕을 담고 있다. 내가 “로, 총알 리필하려면 이것도 사야 하지 않아?” 하며 콜라맛 사탕을 들자 “아! 맞다” 하면서 얼른 바구니에 담는다. '맞긴 뭘 맞아 이 녀석아' 하고 꼬집어 줄 만큼 귀엽다. 아이들과 같이 하는 게 많지 않은 나도 문방구에 오면 동참한다. 이번 기회에 내가 먹을 ‘먹는 색종이 과자 딸기 맛’을 고르고 뽁뽁이를 내 것도 하나 사기로 한다.

하트 모양 무지개색 뽁뽁이를 어루만지며 “이게 그렇게 재밌나요?” 하자 아저씨는 카운터를 둘러싼 듯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섬(문방구 중앙의 메인 섬보다 작은 크기) 저 건너편, 카운터 구석 한 켠을 보여 주신다. 거기에 놓여 있는 작고 네모진 분홍색 뽁뽁이 한 개. 아저씨가 직접 시범을 보인다. “요렇게, 요렇게 하고, 이걸 이렇게, 요렇게 한다네요. 애들이 이걸로 스트레스가 풀린다고요. 하하하.” 비닐 뽁뽁이보다 뾱뾱 터지는 맛이 덜했지만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제품이었다. 게다가 다른 애들이 그렇게 탐내는 것이라니 왠지 사고 싶다.

그렇게 내가 고른 물건(뽁뽁이 포함)과 아이들이 고른 걸 계산하였다. 다 합쳐서 만 육천 원 정도 나왔다. 아이들이 야심 차게 준비한 지갑을 열고 각자 계산한 물건을 봉지에 담아 나오는 길은 너무 행복하였다. 잠깐 탱탱볼 뽑기 기계 앞에서 천 이백 원을 썼지만 탱탱볼 4개밖에 못 뽑는 출혈이 있었어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탱탱볼 뽑는 메리와 지갑에서 동전 꺼내는 로. ©️김혜율<br>
탱탱볼 뽑는 메리와 지갑에서 동전 꺼내는 로. ©️김혜율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서 일요일은 좋으면서도 싫은 감성이 공존하는 요일인 건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로는 “내일 유치원에 가야 하지?” 하고 확인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욜라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이제야 한다고 머리를 뜯고, 나는 ‘아, 내일 출근이네’ 하며 아쉬워한다. 그래도 그 와중에 뽁뽁이 가지고 생색을 내는 친구한테 이제는 뽁뽁이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는 메리를 보면서 '그래, 일요일은 아쉬움보다 좋은점이 훨씬 크지!' 하고 결론 내린다. 일요일에는 늦잠도 자고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마당의 개똥을 봐야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문방구 가서 종이과자 사 먹고 뽑기 기계에 동전을 많이 넣어 주는 그런 즐거움이 있어서 힘이 난다고 말이다. 썩 명쾌하진 않지만 질기게 이어지는 소소한 기쁨. 그건 바로 고무 뽁뽁이 같은 즐거움일 것이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워킹맘이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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