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기다리며
이제 열흘 뒤면 사순이 시작되는데, 올해처럼 가슴 두근거리면서 재의 수요일을 기다려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코로나로 모든 수업은 비대면이고,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은 여러 미팅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엉켜 버린 탓인 것 같다. 이제는 영으로 예배하기를 배워야 하는 때라고 위로하며, 산책과 여유를 앞세우면서 지내 왔는데, 내 삶의 리듬을 부여할 전례가 그리워 온다. 그래서 함께 생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그런 시간이 몹시 그립게 다가온다. 머리에 재를 바르고, 40일간의 행진을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
요즈음의 세상은 욥의, “나의 인생은 바람과 같음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은 코로나 예방 접종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백신을 맞으려고 야단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솔직히 난 매일 힘들게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젊은이들보다 먼저 맞고 싶은 마음이 없다. 생의 유여를 생각해 보는 지점이다. 지난주에는 국제장상연합회(USIG) 주관으로 신학자 모임이 있었는데, 아르헨티나의 한 수녀님이, “수녀들은 이런 팩데믹이 있을 때마다,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돌보아 왔던 걸로 안다. 우리는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일갈했다.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이 시간도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질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앉았으며, 사람들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 간다. 젊은 수녀님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행려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요리를 하기도 하지만, 노쇠한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수녀님들은 매사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가 같이 떠나가는 이 사막으로의 여정을 기다린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사막은 어느 봄의 데스 밸리(죽음의 계곡)였다. 이른 봄, 사막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사막이 피어낸 꽃이라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나에게 처음 수도생활을 가르쳐 주셨던 수녀님과 함께여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사막아 꽃을 피워라’라는 이사야서의 탄성처럼, 온통 꽃들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40일의 긴 여정을 하는 것도, 이처럼 사막에 꽃이 피어나는 그런 아름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눈이 내리고 얼음은 깊은 곳에 흐르는 물소리를 뱉어 내지만, 어디선가 나무는 움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학교 미사에서 신부님이 읽어 가시는 복음서의 예수님은 마음이 바쁘신 것처럼 보인다. 마르코 복음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활기찬 모습을 그리는데, 이 바쁜 역동적인 젊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이 결국 죽음의 길이어서 마음이 짠하다. 그럴 때면, 나는 조르루 루오의 '미제레레'를 꺼내어 본다. 특히 이번 사순을 기다리면서, “여러 면에서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아름다운 부르심”을 두고 묵상해 본다. 정말 루오가 살았던 시대 못지않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척박하다. 그런데,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일이 왜 아름다울까? 이 말을 묵상해 보면, 척박한 땅이어서 꽃을 피워 내지 못해도 좋다는 어느 신앙인의 각오가 느껴진다. 영광이 없어도 좋다는 신념이 배어 나오는 메시지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서, 최선을 다해 씨를 뿌리는 일은, 꼭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좋다. 효율과 소비에 길들어진 우리의 삶에 잠깐 제동을 거는 것 같아서, 나는 이 메시지가 참 좋다.
하늘나라를 보고 싶어도, 혹은 하느님의 얼굴을 만지고 싶어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언뜻언뜻 그것을 마치 콜라주처럼 다가왔다 사라진다. 그래서 오직 얼핏 보는 것이다. 그러니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일처럼 분명히 하늘나라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조용히 제 자리에서 움을 틔우는 나무의 노래를 만나는 순간들을 생각해 본다.
내가 이 학생을 만난 것은 2년 전이었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이 학생은 나이도 나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25년간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를 돌보면서 살았다고 했다. 늘 열심히, 공부를 하는 그녀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녀가 남편을 떠나, 보스톤으로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다. 괜찮겠냐는 나의 말에, 그녀는 이젠 정말 내 삶을 좀 찾아도 될 때가 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나와의 개인 수업을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 그녀의 용기, 그리고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꿈은 중국에 돌아가 노인들을 돌보고, 다른 여성들을 돕는 데 있다. 그의 사람 좋은 웃음에서 나는 씨 뿌리는 농부의 얼굴을,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을 얼핏 본다.
그의 얼굴을 보다, 내가 뿌린 씨앗들을 생각해 본다. 효율적일 필요가 없다는 내가 세워 놓은 이 정의가 내 스스로를 위안한다. 생각해 보면, 난 별로 한 일이 없다. 그냥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박수 치며 바라본 것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다. 그래서 조금 부끄럽다. 이번 사순절도 내가 영웅적으로 보내지 못할 것에 대해 새롭게 실망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내 안의 어둠과 부족 속에서도 새 생명의 움이 틀 것을 기대하고, 또 이 우주에 깃들 새 생명의 움을 기대하는 이 시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잘라지고, 쪼개진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온전히 보아 내지 못하더라도, 그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며, 여전히 척박한 대지에 씨를 뿌리고 싶다.
어제 영적 지도 시간에 만난 한 자매의 깊은 묵상이 마음에 남는다. “요즘 시편의 'Blessed the Lord'를 묵상해요.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을 축복하다니, 이게 가능한가 생각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는가를 생각해요.” 사실 축복하는 말은 구부리다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서 구부려 머리를 낮춘다는 뜻이다. 내 온몸을 구부리고, 마음을 낮추는 것이 축복을 주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에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도 이와 같이 온몸을 구부려 씨를 뿌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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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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