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 축일이 되면, 축제 같았던 성탄 시기가 끝난다. 팬데믹으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걸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올겨울 유난히 불빛을 밝혔었다. 나는 저녁에 어둑어둑한 거리를 걷다 불이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즐거운 함성을 지르며 걸어 다녔다. 고맙게 받은 성탄 카드, 조촐하다못해 초라한 내 구유를 치우면서, 이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동방박사를 생각한다. 이제 마음의 별을 따라갔던 순례자 세 명은,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삼 왕의 이야기를 적은 성서는 오직 마태오 복음인데, 복음사가는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2,12)라고 기록했다.
언제나 이 지점에서 서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함께 순례를 하는 걸까? 아니면 돌아가는 길은 그저 뿔뿔이 흩어지는 걸까?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삼 왕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 다음의 생략된 구절은 우리가 써 나가야 하는 거다.
어릴적 성당에서 본 구유의 이국적인 모습의 삼 왕은 분명 각자 다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였었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는 말이, 이젠 헤어진다는 것처럼 들려서 사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시린 구절이었다. 친구가 되어 함께했던 여정 자체가 즐거웠을 것 같은데, 이제 각각 자기 나라로 간다는 것은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별을 따라가는 여행 중 삼 왕은 길벗이 되어 자기가 어떻게 처음 그 별을 만났고, 왜 그 별을 따라가는지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행 중, 때로 아주 싼 가격으로 멋진 저녁을 먹기도 했고, 가다가 비를 만나 고생을 함께 하기도 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이 멈추어 선 그곳에서 그들이 준비한 선물을 드리는 기쁨을 함께 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또 그 훌륭한 장면을 뒤로하고,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맘은 어떤 걸까? 연꽃 만나러 가는 맘이 아니고 연꽃 만나고 가는 맘은 도대체 어떤 걸까? 조금 가벼울까? 조금 허전할까? 연극이 끝나고 난 무대 같은 마음일까? 잘 모르겠다. 분명히 천사는 “너희가 온 길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한다. 페루에 살고 있는 시몬 페드로 수사는 경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이제는 내 맘속의 별을 따라가야 하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럼 그 길은 어떤 길일까? 우리는 모두 팬데믹 후에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거라고 한다. 아마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가난해질 것이고, 부유한 사람들은 더욱더 부유해질 것이다.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우울하고 불편한 상황이겠지만, 병들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지치는 시간일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은 매우 불편한 실재를 목도했다. 폭도들이 의회를 점거했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아주 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손상되었다고 모두들 걱정을 했다. 또 많은 사람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 그룹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분노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사는 사회의 기본 가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일하는 홀리네임즈 대학도 존폐 위기를 맞았다. 사는 게 어려운 많은 학생이,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무척 아끼는 한 여학생이 문자를 보냈는데, “수녀님, 교실이 너무 그리워요. 내 생이 아무리 힘들고, 내 가족 문제가 아무리 복잡해도, 일단 교실에 앉아 있으면 안전 했어요. 당신이 내 어깨를 툭 치면, 나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수녀님, 꼭 교실에서 만나길 고대해요.” 집에서 편안하게 줌으로 수업을 할 여건이 안되는 많은 학생은 주차장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기도 했고, 어린 동생들을 안고 수업에 들어오기도 했었다. 또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학생들은 기계처럼 흘러가는 온라인 수업의 속도를 바로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아 절망했었다. 그들의 힘든 환경을 지지할 수 없는 한, 온라인 수업은 그들에게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벽이기에, 이번 학기 등록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나 또한 할 말이 없다. 그저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밖에는, 그리고 또 교실에서 만나자는 확신 없는 말밖에는.
내일 이면 또 새 학기가 시작인 이 상황에서 도대체 전혀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일까? 청년 예수는 오늘 당신의 길을 나섰다. 많이 외롭지만 많이 사랑하는, 그 길을 걸어가신다. 가난은 여전하고, 내 학생들의 절망도 여전한데, 내가 온 길과 다른 길은 그럼 어떤 길일까? 아마 그 길은 내가 경배드리며 받은, 그래서 내 가슴에 빛나는 별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아기 예수님을 뵙고 오는 길에 내가 얻은 선물, 조촐함, 상처받기 쉬운 나약함, 그리고 부드러움이 주는 힘을 품고 가는 길. 그래서 조그만 꽃을 피우는 길. 그 길이 내가 일하던 학교의 대문을 닫으러 가는 길이든, 어느 숲속에 새로운 미션을 만나러 가는 길이든, 함께 온 친구들과 이 별을 고이고이 품고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삼 왕이 돌아간 나라에 대해서 나는 생각한다. 삼 왕이 애초에 길을 나선 것도, 슬픔과 절망 속에서 무언가 빛을 찾아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이고, 반짝이는 별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는 자신의 나라는 여전히 희망이 없어 보이고, 청년들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 울고 싶어지는 그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 젊은 여행자 시절, 미국에서 처음 미사를 드리는데, 낯설었었다. 그래도 성체를 영하는 순간은 별을 따라가다 멈추어 선 시간이었다. 그때 낯선 영어 가운데서 정확하게 들려왔던 구절은 “I will bring you home.(내가 너를 조국으로 데려 갈 것이다)”였다. 안 그래도 힘든 와중에, 그 구절에 서러움이 차 올라 나는 한참을 울었었다. 그럼 나의 조국은 어디일까? 글로벌 지구, 어느 작은 곳이어도 좋을 것 같다.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고, 내 가슴에는 별이 빛나고 있고, 그리고 가다 못 가면 함께 쉬어 가도 좋고. 이렇게 적고 나니, 주저없이 성탄의 밤을 밝히던 별을 뗄 엄두가 난다. 자, 사막으로 이제 나가 보자. 약한 사람들의 나라로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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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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