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다. 그리고 고요하다. 사순절이면 늘 불안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대단한 희생을 해야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주는 뻔뻔함인지, 막연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이번 사순절은 마음이 편했다. 그냥 매일을 허덕허덕 코 박고 사는 내 일상에 깊이 수긍이 갔다. 그래서 숙제를 제때에 올리지 못하는 내 학생들,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동료들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주간 화요일,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재가 허무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틀을 잠 못 이루다, 예수의 수난이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 깜짝 놀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주, 수업에서 그는 혼잣말로, “아 재미있는 주제다”라고 중얼거렸는데, 나는 그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지 못한 채, 수업을 마쳤다. 그때는 다음 주에 수업에 들어오면, 뭐가 재미있었는지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그는 이미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버렸다. 아직 사랑한단 말을 다 하지 못했는 데, 수난과 죽음의 신비 속으로 성큼 걸어가신 그분처럼. 그리고 그런 아픔 속에 다시 부활을 맞았다.
부활의 아침, 여전히 새는 울고, 또 꽃은 더욱 피어나는데,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묻는다. 나는 부활의 새 아침이 기쁜 건가 하고. 극적인 사순절을 보내고 나면, 내심 주님의 수난에 머물고 싶은 적도 많았던 것 같다. 달콤한 슬픔이랄까? 세상으로 다시 나가 일상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고단함 속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웠다고 할까? 그런데 이번 부활은 조금 다르다. 부활의 의미가 내게 그다지 극적이지 않으면서, 담담하다. 그냥 꽃나무 아래를 산책하는 친구의 등 위에 진 꽃 그림자를 보면서 길을 걷는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지치지 않는다. 아직 한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문이 든다. 그럼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 부활이 내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어야 하는 걸까?
전례는 기뻐 용약하라고 하지만, 최소한 나의 일상은 그다지 기쁨으로 넘쳐흐르지는 않는다. 특히 내가 사는 이곳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가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이민사를 돌아보면, 대륙 횡단 철도를 놓는 데 동원되었던 중국인의 이민으로 아시아인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유럽이나 라틴계 사람들이 유럽계 미국인의 삶으로 쉽게 동화되었지만, 아시아인들은 유독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했다. 미국 어느 도시를 가도 차이나타운이 있고, 아시아 음식, 아시아 언어는 그대로 남았다. 어떤 중국계 미국인들은 의도적으로 중국인 억양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번 증오범죄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왜 증오범죄가 일어났느냐고 물으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우선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차이나 바이러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작년에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 공공연히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면서, 중국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노골화 되었다. 그러니까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은 미국과 중국과의 불편한 외교 문제가 그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아시아계 노인들에 대한 공격은 문명의 거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정신 보건 문제, 그리고 정신병자를 수용하는 정책의 실패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아시아인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거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가난하고, 홈리스이며, 폭력적인 전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힘들어지고, 어디에도 자신들의 실망과 분노를 표출할 곳을 잃은 사람들이 행사한 무조건적인 폭력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루오의 연작 미제레레에는 '중국인들이 대포 화약을 발명해서 백인들에게 선사했다고 한다'라는 제목의 판화가 있다. 특히 서구인들에게 타자를 대표하는 중국인들은 모든 불편함의 씨앗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중세의 흑사병도 중국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고(사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독을 부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대인들을 몰살한 마을도 더러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고, 왜 21세기에조차 그 잘못 표현되는 분노의 타겟이 아시아 사람인가 하는 점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더구나, 희생이 되는 아시아 사람은 부유하고, 자신의 자원을 갈취해 가는 그런 아시아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보통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고 공격하는 이런 미국의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럴 때면, 그냥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며 괴로워하는 제자들의 심경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부활 사화들을 보면, 하나같이 문을 나오는 데서 시작된다. 특히 모든 복음서는 베드로가 ‘아 안되겠다. 이젠 그냥 고기잡이나 해야겠다’라고 하는 말을 다 전해 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갈릴래아로 돌아갔다. 이 부분을 묵상할 때면, 조금 황홀해진다. 꽃 향기 날리는 어느 봄의 아침 바다를 생각하다 보면, 잊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복음의 향기에 취해 사랑하는 친구와 걸었던 봄날의 호숫가도, 그리고 함께 하던 아침 식사도. 이젠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에게 생선을 구어 주는 주님을 명상한다. 생선을 구워 발라 주는 누군지 모를 그분은 나의 어머니 같다. 한참 반가워하다, 그 초로의 여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폭력과 미움의 거리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건네줄 생선을 구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이제 다시 일상의 그물을 치기 위해 엠마오 거리에 나선다. 하여, 누군가 낯선 이가 다가오거든, 내 안에 복닥이는 설움과 안타까움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냥 저만치 모른 채 거리를 두고, 걸어가면 세상 편하겠지만, 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에 나선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 올 때, 정답게 답변하며, 나의 욕심이 가져다 준 아픔을 기꺼이 꺼내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와 우정의 식탁을 차리기 시작하거든, 그가 주인이 되어서, 빵을 떼게 해야 한다. 그런 일상을 우리는 부활이라 부른다.
그럼 그런 일상이 정말 온 천지가 들썩이도록 기쁜 것일까? 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부활의 기쁨이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알면서 하지 못했던 것, 실패할까 두려워 구겨 놓았던 마음들을 찾아내어, 다시 한번 꺼내 보는 새로운 다짐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또 다시 한번 시도해 보는 용기다. 그 다짐 속에서, 바뀔 것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의 꽃은 지고, 그 자리에 잎은 피어 나고, 그렇게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만나는 학생들의 마음은 한없이 깊고 맑아져 나에게 인생을 설교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인형과 신나게 놀다가, 오래되고 낡은 인형과도 기꺼이 놀아 주는 세 살 박이 내 대녀는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나에게 신앙의 부활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소박하고 편안하게 그분 부활을 노래하며, 우리 모두 우리의 상처를 세상에 내보이며, 밖으로 걸어 나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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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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