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아 매주 건조했던, 내가 사는 알라미다에 비가 내린다. 내가 늘 애정하는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 동네를 촉촉히 적시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은 이런 거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 비 내리는 풍경을 다락방에서 보는 것은 지루하다. 하늘로 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아름답지만, 부엌 식탁에 앉아 동네 사람들의 지붕이 젖어가는 모습, 그리고 젖은 잎새를 바라보는 것이 훨씬 정겹다. 그래서 다락방 책상에 놓아 둔 컴퓨터를 가지고 내려와서 창 밖을 보며 장미 주일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문득 그래서 하느님도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걸어 오셨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코로나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 당장 집세를 낼 수 없어 길거리에 나서야 하는 많은 보통 사람 사이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먹먹해진다.

이번 학기 중세 수업을 하면서,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학생들은 이 팬데믹 시대가 준 의미는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지친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학기 마지막에는 그들은 화면을 켤 기운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나도 화면을 끄고 서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나도 한결 피로감이 덜해짐을 느꼈다. 이 학생들과 소리로만 소통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의 피로감 속으로 함께 들어가, 그 피로를 공유할 때, 알 수 없는 위안이 왔다. 식료품점이나 식당에서 캐셔로 일을 하기도 하고, 밤에 건물 청소를 하는 내 학생들의 지친 일상을 그냥 받아 안자, 알 수 없는 위로가 나를 채웠다. 그리고 지금 나는 창 밖으로 조용히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지치고 건조한 우리 일상을 촉촉히 채워 주는 이 비가 누군가를 너무 춥게는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 집 식탁에 난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 지붕들과 나무들이 선물처럼 내리는 비에 젖어 가는 광경. 창을 타고 흐르는 비가 우리의 맘을 촉촉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박정은
우리 집 식탁에 난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 지붕들과 나무들이 선물처럼 내리는 비에 젖어 가는 광경. 창을 타고 흐르는 비가 우리의 맘을 촉촉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박정은

그러고 보니, 지난 삼월부터 시작된 다락방 줌 수업은 나의 삶을 조용히 바꾸었다. 가능한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수업 외에도 줌 라캉 세미나, 줌 새 회칙 스터디 그룹, 줌 기도 모임, 줌 피정들을 시도했는데, 컴퓨터 속 그 공간엔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생각지 못한 지구 저편 어느 중심에 살고 있는 누군가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기적이 놀라왔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공간이어서 더 깊이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수십 년 전 혜화동 청소년 회관 조그만 경당에서 드리던, 그 작고 친밀한 우정의 성사가 이곳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온라인 미사나 기도모임 후에도 여러 시간 동안 내 맘에 일렁이는 기쁨을 통해서였다.

올해, 온통 세상은 기후 변화로 고통받았다. 우리 동네는 이상 고온과 건조한 기후 때문에, 산불이 계속 이어졌고, 에어컨을 설치할 수 없는 많은 보통 사람은 코로나 경고에도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아니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도 바닷가 가장자리에 발을 묻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했었다.  그 전에는 바로 곁에 있는 알라미다의 초라한 바닷가가 그렇게 위안이 될 줄 몰랐었다. 그런데, 한국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겨울이 그리워진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은 참 힘든 계절이지만, 눈이 온 밤에, 그저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지던 온기가 내 기억들을 소환한다. 물론 거기에는 대림의 기억, 그리고 발이 시리던 성탄의 자정 미사 혹은 주일학교의 아기별 잔치가 있다.

행복한 기억 속에 한 것은 없어도 그냥 좋은 대림의 시간. 이때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일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훌륭한 것들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이 시기에 누가 혹시 잠깐 들른다고 하면, 집안을 다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작은 아이템들을 포장하고 카드를 적는다. 그러면서 선물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루이스 하이드의 “선물: 어떻게 창조성이 세상을 바꾸어 가는가”라는 매우 흥미 있는 책인데, 그는 선물이란 움직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중한 것은 자리를 옮겨 가면서 생명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성탄이 우리에게 선물인 것은 소중한, 아니 소중함 그 너머로 소중한 하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로 오신, 그 움직임에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분은 선물로 오셨고, 계속 움직이셨다. 그렇게 그분은 춤을 추신 것이다. 그분이 그러하시니, 우리도 우리의 죄스러움과 부족을 잠시 내려놓고, 서로 다른 이해와 다른 견해도 내려놓고, 가장 소중한 것, 귀한 것들을 좀 움직여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소중한 것은 값없는 것들이다. 어제는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소중한 한국인 동료 루시아가 오기로 했다. 그를 생각하며 옷장을 뒤지다가, 나자렛 시장 통을 기웃거리다, 소년 예수를 키우시느라 힘든 마리아가 물 길으러 오가며 썼을 법해서 샀던 스카프를 찾아냈다. 나와는 다르게 늘 참하고 조용하게 자기 일을 잘하는 그에게선 나자렛의 젊은 엄마 마리아가 느껴졌는데,  포장을 하면서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많은 젊은 엄마들의 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게 건네주는데, 내 마음에 성모 노래 마니피캇이 떠오른다.  젊은 여성의 존재가 선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 삶의 자리가 엘리사벳의 시간이어서겠지.

어둠이 짙어가는 12월에는 성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은 집안보다 집 앞을 멋지게 장식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둠이 내리면 찬란한 빛과 함께 캐롤도 울려 퍼진다. ©️박정은
어둠이 짙어가는 12월에는 성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은 집안보다 집 앞을 멋지게 장식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둠이 내리면 찬란한 빛과 함께 캐롤도 울려 퍼진다. ©️박정은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잘 챙겨 먹지 못하는 나를 걱정해 집 앞에 음식을 배달해 준 친구, 마당의 포도를 따다 준 친구, 무화과 잼을 전해 준 친구, 초콜릿을 놓고 간 친구, 멀리서 마스크와 책을 보내 준 친구, 그들의 움직이는 친절만큼 나는 많이 움직이지 않았구나 하고 반성하게 된다.

이번 성탄 밤 미사는 아마도 온라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별을 찾아 나섰던 삼왕도 마스크를 챙겨야 할 것이고, 구유의 누우신 예수님도 마스크를 써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고 추웠을, 그리고 밤에도 깨어 있어야 했던 목동들이 만났던 그 놀라움을 우리는 알기에, 선물로 오시는 그분을, 초라한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신 그분을  맞는다는 것은, 우리의 반감, 몰이해를 잠깐 내려놓고, 그리고 얼어붙은 우리의 맘이 움직이도록 하늘의 별도 잠깐 보고, 바람도 느껴 보고, 추위도 만져 보면서, 모르는 누군가에게 정답게 목례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성탄의 기쁨이 온전히 기쁨만 있어서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 성탄 한가운데는 슬픔이 있고, 죽음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쁨을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은 선물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또 움직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그렇게 탄일종은 울리기를 기도한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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