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예술가 지망생들의 가장 흔한 좌절은 ‘천재가 아니다.’라는 낙망이다. 자기가 천재일지 모른다는 헛꿈에 취하지 않고서야 들어설 수 없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잔인한 이분법이 판치고 정당화되고 널리 퍼져 있다. 사람을 버리는 기준이 아주 단순하다. '보통 사람'이니까 버려진다.

낭만주의 시대의 유물인 동시에 자본의 농간인 이 ‘천재’ 개념이 상당히 불합리하다는 걸 알지만 여전한 통념이다. 그러나 만일 ‘천재’가 정말 말 뜻 그대로라면, 그 많은 예술학교들은 다 소용 없는 것들이다. 전혀 쓸모없지 않은가. 천재가 학교 교육 혹은 지도 편달로 만들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알아서 크는 것이라는 환상마저 작용하는 단어가 아닌가.

▲ <위플래쉬(Whiplash)>, 데미언 차젤 감독, 2014.

영화 <위플래쉬(Whiplash)>를 보고 나면, 예술에 대한 그 모든 전설 혹은 강박들이 다 떠오른다. ‘채찍질'이라는 제목은 극중 밴드가 연주하는 재즈곡인 동시에 영화를 함축한다. 악기든 연주자든 하나의 도구처럼 보이도록 배치돼 있다. 한 음, 한 박자가 지나치게 완벽하다. 혼돈과 광기를 넘어 마침내 도달한 일치까지 정교하지만 극도로 통제돼 있다. 매혹적이면서 한없이 슬프다. 미친 학생과 폭군 선생, 무섭기까지 한 ‘일방(一方)’에의 몰입이다.

음악대학 신입생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 뭐든 할 각오가 돼 있다. 폭군으로 악명 높지만 탁월한 조련사인 플렛처 교수는, 어느 날 앤드류를 그의 밴드에 부른다. 학내 실력자들이 발탁된 대신, 한계 없는 폭언과 학대가 일상이다. 좌절과 성취가 매순간 엇갈린다. 기준은 선생의 마음에 드느냐 못 드느냐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은 줄을 섰다는 게 이 교실의 명제다. 플렛처는 늘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 야!”

학생들은 스승의 얼굴 찡그림, 눈빛의 변화에도 민감하고 격렬하게 반응한다. 가슴이 졸아들고 피가 말라붙을 지경이다. 시작은 선택 받음이었다. “꿈이 있어서 왔잖아. 그렇지?”라는 권위자의 나직한 말에 실린 힘. 햇병아리가 그걸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는 지옥의 시작이다. 플렛처의 지독한 변덕과 폭언은 '내 귀'를 만족시켜라, 나의 '템포'에 너를 맞추라는 요구로 귀결된다.

▲ 플렛처 교수의 선택을 받은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 지옥을 감수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플렛처의 주름살, 그 결들이 자아내는 변덕스레 들끓는 표정이 선명하게 남는다. 그 결의 움직임에, 수많은 청년들이 울고 좌절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연습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영혼이며 목숨까지 바칠 태세다. 플렛처의 승인을 받은 자는 ‘제2의 찰리 파커’이며 링컨센터라는 꿈의 무대를 차지한다는 불문율 때문이었다.

“어떻게 음악에 우열을 가려? 음악은, 주관적인 건데.” 사촌은 말하지만, 플렛처의 방식에 중독된 앤드류에겐 들리지 않는다. 셰이퍼 음악학교의 19세는, 90세까지 심심하게 사느니 34세에 약물중독으로 찰리 파커처럼 요절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나이일 수 있었다. 지망생들의 ‘원대한 꿈’에서 나오는 착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라도 말이다. 기대도 칭찬도 무관심도 무시도... 모두 견딜 수 없는 것들이었으리라. 너무나 위대한 천재들의 ‘녹음’과 전설의 ‘기록’들... 그 속에서 먼지보다도 작은 나. 그 먼지들끼리 어떤 ‘자리’를 놓고 피를 튀기며 다퉈야 하는 상황들, 그게 연습실 풍경이었다.

플렛처는 독재자다. 이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무대의 신’은 바로 “(내가) 신호를 주겠다.”는 절대 권력의 말에서 비롯된다. 말미에 관객은 보게 된다. 스타 탄생 혹은 재능이 폭발한 무대 이후, 권력은 플렛처에서 앤드류로 넘어갔다. 앤드류가 끝내 제 힘으로 자리를 따냈다기 보다는, 그 변덕스런 독재의 망령이 앤드류의 광기 속으로 스며들어 감으로써 이루어진 ‘접신’인 듯했다.

다짐해본다. 이제 한 자락의 음악을 듣고도, 연주자들의 그 숱한 땀과 눈물을 기억하겠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결국 ‘링컨센터’는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다 해도, 피나는 노력의 순간만큼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음악 자체를 사랑한 모든 음악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피나는 노력에 반대한다. 제2의 무엇 무엇이 되라는 요구에 반대한다. 끝내 만족 못할 영혼의 허기로부터 똬리를 틀고 갈망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그 모든 피나는 노력의 갈 곳은 심연뿐이다. 영화 속 ‘요절한 천재’들의 비극이다. 모든 예술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비추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혼자서 이루었다는 착각,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그래서 결국 모든 책임조차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부당한 억압에 반대한다. 그 피의 제단이 요구하는 맹목에 반대한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만 유독 크게 흥행했다는 뉴스마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코린토 전서의 말씀으로나마 위로를 삼고 싶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코린 13,1)


김원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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