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주일 복음 묵상

5월 3일 /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 (요한 15,1-8)
지행일치
나는 그동안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못된 습관이 들었다. 말하는 걸 실제로 살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나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을 ‘자아팽창 환자’라 하는데, 실제보다 자신을 한껏 부풀려 보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 잘 걸린다.
늘 마음은 말하는 대로 살고, 사는 만큼만 말하고 싶었는데 이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카톡 자기소개에 ‘지행합일, 사는 것이 아는 것’이라 적어 놓았다. 반평생 이상 예수를 추종하겠노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적어도 겉모양은 나도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였다. 하지만 ‘말과 혀로만 사랑을 나불거렸을 뿐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1요한 3,18 참조)을 보여주지 못하다보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쳐내시고 사람들이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리기에 마땅한 열매를 못 맺는 가지’(요한 15,1.6 참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남은 삶 동안 조금이라도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겠다는 각오로 ‘지행합일’을 좌우명으로 정했다.
늘 마음은 있는데 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애초에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일치돼있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그분께 마실 물을 찾아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다른 일들에만 신경을 써왔던 것이다. 그 결과 기형적으로 큰 머리, 가슴은 새 가슴, 손은 조막손, 발은 전족이 되어 버렸다.
이왕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으니, 그 가르침의 정수를 조금이라도 살다 가는 게 도리일 터. 해서 어느 순간부터 말씀을 깊이 새기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사랑이 말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행실로 옮겨지는 만큼만, 또 그 행실이 사심이 아니라 진리에 동기를 둘수록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내(참 포도나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5월 10일 /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믿음보다 실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첫 신자 공동체에서 실천한 아름다운 나눔의 모습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사도 2,42~47) 오른 뺨을 맞고 왼 뺨마저 때려 달라고 돌려대는 일도 그렇다.(마태 5,39)
철없던 시절 스승 예수님은 그저 믿으면 되는 분이었다. 전능하시어 내가 청하는 일들을 모두 들어주실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당시엔 ‘믿습니다’가 능사였다. 대신 나는 이 믿음의 징표로 전례와 성사 의무를 철저히 준수하려 했다. 그 결과 좋은 일을 많이 경험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리 살지 않는 이들을 단죄하는 자신의 모습도 보아야 했다.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예수님이 당신을 믿는 대신 당신처럼 살라고 가르치셨음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분처럼 살면 누구나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텐데, 과연 그리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살려 곤 하지만 늘 최선은 아니다. 그저 체면치레 정도만 할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그분을 택한 게 아니라 아예 ‘당신이 나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참조)며 결단을 요구하셔서 힘들다. 그러면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실천하는 친구’(요한 15,14 참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신다. 이제는 그저 믿기만 하는 ‘종’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길을 가는 ‘친구’가 되자 시면서 말이다.
결정적인 건 이 세상을 아무리 살아 봐야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모두를 친구로 여기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요한 15,13 참조) 만큼 좋은 길이 없다고 못을 박으시는 것이다. 오호라!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데도 없고, 시험 삼아 살아 볼 날도 얼마 많지 않았으니 결단을 미루지 말라는 뜻일 터.
5월 17일 /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마르 16,15-20)
신앙적 확신
인생의 여러 중요한 선택의 계기마다 그분이 확실한 표징을 보여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면 망설임 없이 그분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음이 부족했는지 그분은 내게 그런 호사를 허락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매번 고뇌와 기도를 통해 그나마 확신이 드는 방향을 선택해왔다.
물론 그분의 이끄심이라 믿어지는 작은 표징들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남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큼 확연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였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난 특별한 표징 보다는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길을 찾아 왔다. 그동안의 탐구 결과 내가 도달한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나의 수십 년 신학공부는 이 명령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누구에게나 명석 판명한, 그래서 한 번 사는 삶에서 후회 없는 길 말이다. 돌이켜보니 이 길이 내겐 너무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어서, 아는 게 많아진 만큼 모호해진 측면도 많아졌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아는 게 많아질수록 피하는 잔머리도 따라 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당신의 지상 삶,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의심 없이 믿고, 담대하게 이를 널리 선포할 수 있을 때까지 승천하지 못하셨다. 자세히 보면 그분이 승천해서 제자들이 확신을 가진 게 아니다. 점진적이긴 하였지만 제자들이 확신을 갖게 되고 나서야 ‘그분이 떠난 세상, 곧 그들 스스로 영위해가야 하는 가시밭길 세상’인 그분의 ‘승천’이 열렸다.
그러니 그분을 따르는 삶에 확신이 부족한 나 같은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코 승천시켜 드리지 못할 터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기도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승천시켜 드릴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또 남은 생은 그런 믿음을 사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5월 24일 /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성령강림, 어떻게?
나는 성경에 나오는 성령 체험을 해 본적이 없다. 물론 시도를 많이 해보긴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런 체험만이 신앙을 보증해주는 유일한 수단인가?
내가 얻은 결론은 ‘아니다’ 이다. 그동안 성령체험을 했다는 이들을 만나 보면서 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위안을 얻었다. 첫째는 체험이 영속적인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 같지 않아서였고, 둘째는 체험했다는 이들의 모습이 대체로 비 복음적이어서였다.
대신 나는 성령의 존재를 다른 차원에서 경험한다. 미국의 저명한 평화 운동가이자 저술가인 파커 파머는 ‘평화 운동가들은 질 걸 뻔히 알면서 왜 저항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인간의 고귀한 영혼은 어떤 폭력으로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파머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 영혼의 숭고함을 잃지 않기 위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제2의 예수들’이 성령의 임재를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다.
성령을 체험하면 누구든 일시적으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려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온유’(갈라 6,22) 같은 열매를 맺는데 까지 이르지 못한다. 단 한 번의 체험으로 확고하고 영구적인 방향 전환이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다.
작은 오류들을 범하더라도 끊임없이 오류가 더 적은 방향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우리네 신앙생활이다. 그분이 다 지시하면 우린 로봇이지 인간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믿는 이들 스스로 깨닫고 선택하기를 바라셨다. 성령은 그분의 영이시니 마찬가지실터. 그러니 내가 먼저 인간 영혼의 숭고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제2의 예수가 되어 성령 강림이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어야 할 밖에.
5월 31일 /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마태 28,16-20)
끊임없이 쇄신하는 교회
나는 20대 때 부활을 예수님의 삶이 그를 따르려는 이들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 재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금도 이 믿음은 변함이 없다. 굳이 이렇게 믿는 데는 나름의 이점이 있어서다. 남들이 믿지 않으려는 초자연적 기적을 굳이 앞세우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실제로 나에게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중요하지 않다. 그분이 보여주신 지상 삶만으로도 나에겐 너무나 벅찬 탓이다.
나는 삼위일체도 이렇게 이해한다. 아들(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지상에서 완벽하게 실현하였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삶이 완전하였음을 아들의 부활과 승천으로 보증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이 온전히 자신이 되는 방법’을 보여준 아들의 삶이 지상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셨다. 이렇게 삼위가 뜻으로 일치하고 있으니, 굳이 예수님이 남기신 가르침 외에 더 이상 따로 구할 게 없다.
묵상을 거듭하다 보니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쇄신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요청하는 사자후로 다가온다. 역사, 전통, 제도, 교리 같은 외적인 것에 매달리다 정작 하느님을 배척하게 된 유대인들의 운명을 반복하지 말라는 경계의 뜻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이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거의 전적인 사랑을 받았음을 전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반하고, 끝내는 하느님 자신을 죽이는 비극적 운명을 전한다. 신앙의 방향이 잘못되면 적이 아니라, 궁극에는 어떻게 자신을 해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파견사’(18~19절)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교회에 희망이면서 동시에 엄중한 경고로 다가온다.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겠지만, 이스라엘처럼 역사, 전통, 제도에 안주해 정작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면 그분의 사랑이 진노로 바뀔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박문수 /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