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8]

신자들의 신앙의식을 조사할 때 주요 교리(예를 들어, 하느님의 천지 창조, 예수님의 부활, 성모 교리 등)에 대한 신앙 여부를 물으면 거의 대부분이 ‘믿는다’고 답한다. 그것도 ‘매우 확고하게 믿는다.’고 답한다. 그러나 윤리 문제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교회 가르침과 생각을 달리 하는 신자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진다. 사회정치적 쟁점으로 들어가면 사회교리를 가진 교회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반대가 거세진다. 왜 그럴까?

미국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 네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신학적, 사회, 문화, 정치적 쟁점에서 신자들의 입장이 둘로 갈라진다. 사제, 수도자도 예외는 아니다. 혹자는 이를 미국 교회가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로 분열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다.

미국교회 연구자들이 말하는 쟁점은 크게 다섯 가지다. ‘가난한 이들과 주변화된 이들에 대한 원조(교회는 이들에 대한 적극 지원을 지지한다), 사형(교회는 반대), 국제 관계(교회는 전쟁과 군대 사용에서 대부분의 미국 보수주의자들 보다 더 자유주의적이고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 낙태(교회는 반대), 그리고 동성애(교회는 인공 피임, 동성애에 대해 보수적 입장)’ 등이다. 미국 교회 신자들은 이 다섯 가지 이슈에 대한 찬반 입장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어떨까? 그동안 진행했던 신자의식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한국 교회 신자들은 사회정치적 이슈를 제외하고는 미국 교회처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진 않다. 이를 테면 신자들은 교회가 낙태를 반대한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교회가 이 주장을 하는 데 거부감이 적다. 사형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데 신자들의 절반 이상은 사형제 존속을 지지한다. 그래도 신자들은 교회에 별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 예를 들어 대북 지원, 교회의 예언적 활동(예,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쌍용차 해고자 지원 활동,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활동, 세월호희생자 지원활동 등)에 대하여는 개인적 불만 표시를 넘어 적극적인 반대 행동도 불사한다. 이러한 활동을 반대하는 신자들은 교회가 예언직무가 아니라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여기에 일부 성직자들도 가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미국 교회처럼 첨예하진 않지만 한국교회에도 내부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미국 신자들과 다르게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하여만 과민반응을 보일까? 혹시 그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신앙화한 것은 아닐까?

나는 이 현상이 한국교회의 독특한 역사 전개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교회는 전래 뒤 팔십 년간 박해에 시달렸다. 강한 국가(교회에 대하여)가 약한 교회를 지속적으로 탄압하는 과정에서 교회 지도자를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에게 ‘박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때 놀란 가슴은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지배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졌다. 교회 지도자들이 신자들을 3.1독립운동에 참여치 못하게 막은 일, 신사 참배를 허용한 일, 일제 말기 전시동원 체제에 협력한 일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호의로 친미, 친 이승만 노선을 따랐다. 그들의 친 그리스도교 노선이 우리에게 유리하였을 뿐 아니라, 1930년대부터 가톨릭교회 전체가 반공주의 노선을 취해 왔던 탓에 이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익숙하던 국가의 통제, 지배와는 반대로 호의와 지원을 얻는다.

전쟁이 나고 전쟁 중에 북한으로부터 교회가 직접 피해를 당하게 되자 교회는 반공에 반북의식까지 더해 분단을 고착화하는 일에 앞장선다. 이후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면서는 적극적으로 정치 세력화에도 나선다. 그 결과 제2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교회는 다시 강한 국가에 눌려 침묵을 강요받는다. 이 기간이 5-6년간 계속 된다. 그러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교회의 예언직무를 통해 저항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교회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십여 년 동안 민주화, 인권, 노동, 농민, 빈민, 학생, 통일 운동 영역에 활발히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움직임에 국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국가는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물리적 탄압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병행하였다. 이때 국가는 한반도가 분단 상황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이를 테면, 1960-80년대 까지 교회의 이런 움직임은 용공으로 간주되었다. 공산주의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의 적화를 돕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이데올로기 공세에도, 남한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터라 국민들은 국가 대신 교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 현상, 천주교 사제들의 높은 공신력, 전체적으로 한국 천주교의 높은 사회적 위신은 대체로 이 시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이전 시대에 나타났던 교회의 움직임이 대폭 위축된다. 생명 윤리 문제를 제외하고는 국가와 직접 충돌하는 일이 적어졌다. 형식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고,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진 탓도 있었다. 그러나 2007년 들어서부터 강우일 주교를 필두로 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이 시작되면서 1970년대와 같은 교회와 국가 상황이 재현되었다.

그에 따라 국가의 이데올로기 공세도 본격화되었다. 이들을 고립화시키기 위해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은 이들이 신앙이 아니라 정치활동을 한다고 신자와 국민들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을 종북 혹은 친북으로 몰아 국민들의 반북, 반공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활동 참여자들의 일부를 구속하는 물리적 탄압을 병행하여 저항을 약화시키려 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예언직무에 나서면서부터 일관되게 이 활동을 반대하는 이들도 교회 안에 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필자는 이들을 이데올로기를 신앙화한 사람들이라 평가한다.

1970년대 초반 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였을 때 사제단을 반대하는 구국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유신정권에 복무하던 신자 고위 공직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교회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시도도 활발했다. 이러한 방식의 개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도 이어졌다. 다만 이때는 이전과 달리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교회 안 정권지지 세력을 이용해 예언직무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물리적 탄압은 김영삼 정부 때 일시적으로 부활하였다가 잠복기를 거쳐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본격화되었다. 어떤 경우든 이 시기 이후부터 내내 일부 신자들은 이데올로기를 신앙화하고 교회보다는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야기가 장황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간단하다. 한국교회는 230년 역사 가운데 거의 80퍼센트 정도를 강한 국가에 눌려 살아왔다. 전체 역사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것도 교회가 시작할 때 겪은 모진 박해는 교회사 전 시기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하였다. 강한 국가가 지배할 때마다 교회는 대립보다 타협과 순응 전략을 선택해 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하여도 직접 입은 피해 경험에 근거하여 적대적 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런 오랜 역사적 경험이 신자들로 하여금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비정당화 전략을 쉽게 수용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교회 안에 늘 존재해 오던 성속 이원론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예언직무가 활발했던 시절에도 일부 신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요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신자들이 크게 늘었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에는 1980년대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계층구성이 달라진 점이 영향을 주었을 터이다. 1980년대 이후 전개된 신자 계층구성의 변화는 1990년대 이후 교회의 대사회적 발언, 활동 위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와 이후에 실시된 신자의식조사 결과들에서 신자들이 대사회적 활동을 예언직무로서 보다 정치활동으로 이해하는 비율이 높아진 경우가 이를 증명한다.

신자들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산층(실제 활동비율에서는 더 높게 나타난다)은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였으나 신앙경력은 짧고 신앙의식은 낮아 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보다 이데올로기를 더 믿었다. 이들이 신봉한 이데올로기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치적으로는 반공(북)주의, 엘리트 독재, 국가 안보주의였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이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중하층 소속 신자들도 동기와 이해의 정도는 다르지만 이들 못지않게 신앙보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였다. 남한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교회 안에 그대로 이어졌던 셈이다.

여기에 신자들이 늘어나고 이들 가운데 다수가 신앙생활에 소극적이 되면서 교회는 이들에 대한 통제 보다 타협을 선택해 왔다. 다수를 품어 보자는 전략이었는데 아쉽게도 이 방법이 오히려 신자들을 교회로부터 더 이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만큼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규정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지난 삼십 년 동안 중산층의 자원동원 덕으로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도 원인이다. 본당 활동에서부터 교구 운영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다 보니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이들의 이해 관계와 충돌하는 주장과 행동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이 주장과 행동이 남한의 주류 이데올로기와 상충하는 것이라면? 이들이 신앙보다 이데올로기를 더 신봉하는 경우라면? 이들이 실제로 교회를 우습게 알 만큼 힘을 가진 경우라면? 무엇보다 이들이 이데올로기화된 신학과 신앙을 신념화하고 있다면?

▲ 2014년 2월, 대수천(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 모임) 회원들이 서울 예수회센터에서 열린 남녀 수도자 시국미사에 항의하며 센터 진입로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한상봉

나는 대수천에서 150인의 성직자들을 친북인사로 규정하고 신자들에게 불복종을 선동하는 성명서를 보면서 이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들이 수호하려는 것이 대한민국이니 아마도 이들은 교회의 공식입장인 ‘민족의 화해와 일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 확실하다. 교회의 예언직무를 굳이 친북활동으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신앙 대신 국가안보주의를 더 신봉하는 것일 터이다. 이미 근거 없이 종북과 친북 딱지를 붙이는 일이 명예훼손으로 판결된 것임에도 이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계명도 모르는 사람들이겠다. 게다가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특정 정당의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권안보를 교회와 신앙보다 우선하는 셈이다.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만 정치적이라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일방적이다. 그들의 주장을 포함하여 이미 의도를 갖고 하는 주장들은 정치적 담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안타까운 일은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성경과 신학에서 찾으려 하나, 이미 약자의 처지에서 출발한 유대교와 그 품 안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에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성경과 신학의 토대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현대교회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이들이 신봉하고 싶어 하는 점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일반인이라면 할 수 있지만 신앙인으로서는 부적절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리라.

성장의 은총인지 대가인지 모르겠으나 한국교회는 이들의 주장이 황당해도 없애진 못할 것 같다. 변변한 신학 논쟁 한번 없이 살아오다 보니 교회 안에서 비상식을 상식으로 여기게 된 것이 한둘이 아닌 까닭이다. 무엇보다 교회가 중산층의 생활양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 그들의 물질적 시간적 자원동원에 기대고 있으니 이들의 원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제이, 제삼의 대수천이 등장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터이다.

예수님도 늘 반대자들을 달고 다니셨고 그러다 십자가의 험한 죽음을 맞이하셨으니 우리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반대를 우리가 선택한 길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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