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머리는 알고 가슴은 모르는 것들

사랑에 대해 떠올릴 때 우리가 코린토 전서 13장을 비껴갈 수 있을까. 그 모든 구절이 다 감명 깊지만 특히 이 구절은 정말이지 절절하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고린 13,8) 사랑은 스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쓰러지지 않기를 우리는 바란다. 비록 풍파에 쓰러질지라도,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게 해줄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유난히 큰 울림을 준다.

영화 <이다(Ida)>는 폴란드 영화로 201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작품이다. 흑백 필름의 짧은 영화다. 가톨릭과 관련된 영화이면서 폴란드의 (아픈) 역사를 되짚는 작품이다.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은 극히 절제된 화법을 구사한다. 화면은 줄곧 담담하고 담백하다. 너무나 간결하다. 하지만 그 말해지지 않은 뒤안길에 뭉쳐진 비극의 응어리들은 형언 못할 참사들이다. 내리는 눈발의 아름다움 하나하나에도 슬픔이 새록새록 스며 있는 영화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안나는 곧 서원을 앞두고 이모를 만나러 간다.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처음 본 순간 대뜸 듣는 말은 출생의 비밀이다. “유대인 수녀네. 너 유대인이잖아. 네 이름은 이다야.”

▲ <이다(Ida)>,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2013.

이다는 로자와 하임의 딸로 태어났지만 부모는 2차 대전 때 살해당해 묘지조차 없다. 이다는 ‘부모가 묻힌 곳’을 찾아 나선다. 그게 영화의 주요 내용인데 1960년대 상황에서 폴란드의 과거 1940년대를 돌아보게 된다. 전쟁과 인면수심의 시절을 말이다. 이다와 완다. 조카와 이모. 수녀와 판사. 성녀와 탕녀. 모든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려는 자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단죄를 그것도 ‘피의 복수’로 행해온 자. 둘은 심한 이질감과 강한 유대감, 비탄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며 대단히 의미 깊고도 혼란스러운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사실 여행은 혼돈 자체였다.

자신만만하던 완다는, 여행 말미에 자신이 헛살았음을 고백한다. “뭘 위한 전쟁이었는지...” 정작 ‘피의 완다’는 숱한 사형선고로 ‘인민의 적’들을 처단했으나, 가장 간절한 해원(解寃)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살아왔다. 이다가 왔을 때 완다는 비로소 그 아픈 상처의 진원지로 차를 몰아갈 수 있었다. 마치 평생 그 순간과 ‘가족’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차마 혼자서는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 구덩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겠는가.

‘수소문해본’ 끝에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떡할래?”라는 질문은, 사실 완다가 이다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완다가 스스로에게 평생 했던 질문은 아닐까. 가장 아픈 비밀의 상처인 ‘남자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봉인이 풀린다. 완다가 스카프로 감싸안은 그 작은 유골의 머리. 아무런 소리도 색도 없는 필름 안에서도 뚝뚝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순간이었다. 아이를 배에 끌어안고 프레임 밖, 아마도 숲 어딘가로 사라져 홀로 울고 있을 완다가 그려지는 듯했다. 로자 부부에게 아들을 맡기고 전쟁터로 가야 했던, 일가족 몰살을 막지 못한 무정한 세월. 아이는 어미에게 “제대로 알 시간”도 못 주고 완전한 백골이 되는 시간 속에 버려졌다.

알고 나면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완다와 이다는 그것을 확인했다. 전쟁과 살육이 그리고 종교가 ‘명분’ 때문이 아니라, 말하자면 ‘집’과 ‘땅’을 차지하기 위해 타인을 밀고하고 제거한 것이 진실이었다.

기다림이란 어쩌면 서로 잡아당기는 팽팽한 긴장이 아닐까. 이모를 간절히 기다린 조카만큼 이모도 자신의 진정한 순례에 동반해줄 조카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또한 양가적이다. 기다림의 끝에서 더는 기다릴 무엇이 없음을 봐버린 사람에겐 거기가 세상의 끝이다. 새처럼 날듯 이승을 하직한 완다의 마지막 몸짓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경험해보지도 않고 희생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말하던 완다의 옷을 입고 이다는 잠시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다. 알토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는 청년과의 에로스는 분명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될 것임을 관객은 기대하게 된다. 남자의 말 뒤에 “그다음에는?”을 연거푸 묻는 이다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호기심일까 막막함일까.

이다는 로맨스마저 뒤로하고 ‘일단’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듯이 보인다. 관성인지 회귀인지, 정말 목적지가 수도원이긴 한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이다의 표정에서는 어떤 맑은 기운 외에는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다가 무엇을 선택하든 분명 더 좋은 쪽이 될 것임을. 수도 생활이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게 되든 이다는 최선을 살 것이다. 그 선택에 신의 가호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호의와 선의만은 가득하기를 빌고 싶다. 침묵하시는 신께서는 늘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법이니, 우리는 결국 사람 안에서 사랑을 배워야 하는 존재들이다.

 
김원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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