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유하 감독의 영화, 강남1970
새로 다듬어지기 전의 시편 구절을 옮겨 적어본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시편 130) 더 알아듣기 쉽게 풀이된 새 성경보다 입에 익숙한 이 말이 먼저 떠올라서다. ‘위령기도’의 대표적 구절인 이 간절한 기도, 살아있음과 죽음의 고비에 놓인 어떤 영혼의 절박함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이 ‘깊은 구렁’임을 알고 있는 이가, 자신을 구제해 줄 분이 누구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가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있다. 얼마나 크고 간절한 소리로 빌기에, 그 소리가 깊은 구렁을 넘어 저 높은 곳까지 닿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을까.
어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이 구절이 머리에 스쳤다. 우리들의 이 ‘깊은 구렁’, 이 구렁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형성되었나. 지금은 그 구렁 속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여전히 그 속에서 울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부르짖음으로 자비를 구해야 하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 ‘개발’이 대체 왜 필요했으며, 난데없는 개발 이익은 다 무엇에 쓰였는지를 영화가 극히 단순화시켰다는 점이다. 도식적일 수도 있지만 이 단순화는 어쨌든 ‘강남’이라는 욕망의 용광로 전체를 보게 한다. 군사독재가 무엇으로 유지됐는지 느낄 수 있다. 유하 감독은 너무 거대하고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진 지금의 미로 같은 강남은 잊고, 정치와 돈과 땅의 삼각구도라는 핵심만 보라고 한다.
강남의 시초부터 지금까지의 ‘불패 신화’를 관통하는 그 비정상적인 생명력과 미친 성장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도 충분했다고 본다. 결코 국민 다수의 행복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결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원주민들이나 원래의 주인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짐짝처럼 물건처럼 마구 이용당하고 수용당하고, 급기야 떼로 버려지고 관리 됐다. 권력은 그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고 앗아갔다. 권력자와 끄나풀의 관계망 속에서, 자기들끼리 ‘돌리고 돌려’ 땅값을 풍선처럼 잔뜩 부풀렸다. 이미 ‘원안자들’에게 돈 궤짝들이 배당된 후의 폭탄 같은 땅은 말없는 다수의 삶을 평생에 걸쳐 철저히 혹사시켰다. 내 집 한 칸 마련하고픈 소망은 천정부지로 오른 땅값에 저당 잡힌지 오래였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탱크 몰고 한강다리 넘어온” 후에 내내 이 나라를 장악한, 처음엔 혁명으로 나중엔 이름뿐인 선거를 통해 영화를 누린 ‘혁명동지’ 3인방이 실제 주인공이다. 스토리 상 주인공은 고아에 넝마주이 출신인 의형제 김종대(이민호 분)와 백용기(김래원 분)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용도대로 사용되고 폐기물처럼 버려진다. 움막 같을지라도 ‘내 집’이 있어 살 부비고 살았던 그들은 포크레인 한 방에 지붕이 뚫리고 오갈 데 없어지고 만다. ‘개발’의 와중에 동네는 수용되고, 정치 깡패들의 행사에 끼여 한 버스를 타고 간 우연으로 그 세계에서 남보다 더 지독하게 밥벌이를 한다.
피와 황토, 흙 범벅의 아비규환 속에서 칼을 비롯한 연장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겨누는 것은 서로의 가슴이고, 찌를 곳은 늘 상대의 급소다. 처음엔 작은 이익을 위해 시작한 일이 점점 욕심이 커지고 각 인물들은 탐욕의 화신이 되어가면서 피와 복수의 쳇바퀴에 갇혀버리고 만다. 살기 위해 은인도 형제도 베어야 하지만, 결국 그 칼끝을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이 또한 권력자들의 ‘의도’대로다.
이 영화는 관객을 꽤 비감에 젖게 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라는 번안 제목이 더 어울리는 ‘아낙Anak'이 흐르는 장면에서는 전율마저 느껴진다. 개인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불행한 역사를 밟고, 여전히 건재하며 끊임없이 재기하는 권력자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인사청문회에 왜 매번 강남을 둘러싼 불법 재산증식 논란이 등장하는지도 영화를 보면 지당해 보인다.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고 실현되는지의 답은 하나다. 강남은 그들의 입맛대로 세워졌다. 적어도 영화 속의 1970년대에는 말이다.
김원 /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