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그에게 아내는 무엇이었을까. 그를 현재의 자리까지 뒷바라지 한 사람,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사람. 그런 아내의 암이 재발한다. 아내는 다시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수술과 투병에 들어가고,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원에서의 일상을 이어 간다. 몸이 자동반응 하듯 움직인다. 이전의 수술과 오랜 투병 그리고 간병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호자 침대에서 먹고 자고 일어나고 출근하고 아내를 돌보는 생활에 그는 최적화된 몸처럼 보인다. 그렇게, ‘예의바른’ 생활이 시작된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Revivre, 2014) 얘기다. 해외 제목인 레비브르(Revivre)는 프랑스어로 ‘소생하다’의 뜻이다. 화장품 회사 마케팅 상무인 오정석(안성기 분)은 아내 정진경(김호정 분)의 임종을 확인하고 장례를 준비한다. 딸의 오열을 들으며 오 상무는 암이 재발했음을 알고 통곡하던 아내를 떠올린다. 오 상무는 헌신적이고 충실한 간병인이자 남편이었다. 장례식장은 손님들로 가득하고, 부하직원들도 결재 서류를 들고 와 일을 거든다. 문상 온 직원들 중에는 오랜 기간 오 상무가 연모해 온 추은주(김규리 분)도 있다. ‘화장’은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화장’(火葬)과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갖고 있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모두 몸을 맞대고 있다. 두 여자를 다 아끼는 한 남자. 죽어 가는 여자와 피어나는 여자. 그 사이의 긴장과 갈망, 슬픔이 모두 한 데서 피고 진다. 절망의 정수리와 절정의 아름다움이 동시에 그를 떨게 한다. 어쩌란 말인가.

아내의 재발은 치명적이었다. 그건, 투병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죽어 가는 일이었다. 말이 치료지 아내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품위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 병원에 결박당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술을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던 것일까. 수술을 거부하는 게 더 나았을까. 어차피 부질없다. 아내의 암은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고, 예정된 고통스럽고 잔혹한 ‘무너짐’의 과정을 또박또박 밞으며 생명의 소진 쪽으로 흘러간다. 이 소멸의 과정이 분명해지자, 오 상무는 비로소 생각에 잠기게 된다. 모호하지만 강렬한 생기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새로 입사한 추은주 대리를 본 뒤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다.

오 상무가 가장 깍듯이 대하는 사람은 아내다. 그런데 어딘가 거리감이 있다. 직접 통화하는 일도 없이 처제를 통해 바꿔 달라고 하는 관계다. 자신의 일정이나 곧 들어간다는 보고 따위도 간병인들에게 말하게 된다. 그게 중환자를 가족으로 둔 ‘보호자’의 일상인지도 모른다. 원래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아닌 듯하다. 그래도 서로 헌신하고 아꼈다. 사랑하지 않지만 예의 바르게 마지막까지 돌보고 최선의 예우를 갖춰 떠나보내는, 그런 관계처럼 보인다. 그 최선의 예의는 참 중요한 과정으로 보인다.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보내 주기 위해서는. 그래야 어른이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 ‘화장’을 통해 제시한 깊은 통찰로 보인다. 아마도 사랑은 그처럼 예의 바르고 예측 가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무례하고 서로를 더럽히고 책망하고.... 불쑥 그 삶 속에 끼어들어 망치고 그런 쪽에 가깝지 않을까. 그의 반듯함은 그래서 아내를 서글프게 한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결국 무례할 수밖에 없었던 은주에 대한 태도와는 다르다.
오 상무처럼 성공하고 점잖고 예의 바르고 그럼에도 대단히 매력적인 초로의 남자는, 사실상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영화 ‘화장’ 속의 그 남자 딱 한 명뿐이다. 멀리 앉아 있는 실루엣만으로도 너무나 멋있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그런 남자는 곧 배우 안성기가 그려낸 어떤 이상적 형상일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원숙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걸 그 여자 은주는 “중후함”이라고 표현한다. 오 상무의 행동이나 고뇌는 거의 관념의 형상화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내를 포함해 거의 모든 그의 ‘현실’은 메타포에 가깝다.

그는 모든, 준비한 장례 과정을 차근차근 해 나간다. 취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묵묵히 응시한다. 예의를 다하고 난 뒤 스스로에게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순간까지다. 그리고 나서 오 상무는 일터로 돌아간다.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그의 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살게 하는 힘 쪽으로.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어찌 거스를 수 있으랴. 소멸과 소생의 자리가 과연 따로 있을까. 꽃이 진 자리에서 다시 새 움은 돋아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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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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