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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신비 체험을 한다. 신비 체험이라 하면 우리는 무언가 초자연적 기적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비란, 촘촘히 짜여진 일상의 틀을 벗어나 좀 더 크고 근본적인 것을 대면 할 수 있는 그런 시각을 얻는 것, 혹은 그런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수난하는 메시아를 바로 알아보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 이야기를,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는 대목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본다는 것은 주의를 요구한다. 언젠가 영성지도 양성 프로그램을 함께 가르치던 동료가, 자기의 아들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는 그 아이는 손으로 내 동료의 얼굴을 돌려 자기에게 향하게 하고 수화를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신비의 첫걸음임을 강조하면서. 나는 종종 그이가 들려준 그 일화를 기억하는데,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 신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순절에 나는 시몬 베유의 영성을 정리한 조그만 책을 나의 영적독서로 정했다. 고통 속으로 다가간 그의 삶이 너무 불꽃 같아서, 너무 화려해서, 감히 가까이 두지 않았던 그의 삶을 누군가가 정리한 것이라 조금 부담 없었던 것 같다.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질문하고, 도전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번에 그를 읽으면서 새롭게 안 사실은 그가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임”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그리스도인에게 학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기도를 위한 훈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좋은 학점을 받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또 어느 부분을 이해하지 못 했는지를 알아 가는 것이 기도의 연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나에게 있어서, 이 부분이 그를 신비가라 부르게 하는데- 시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잃어버린 것을 보는 것을 “주의를 기울임”이라고 보았다. 공장 노동자의 잃어버린 인격을 주의 기울여 보는 것, 그리고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의 잘 보이지 않는 품격을 보는 것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공장 체험에서, 공장 노동자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가를 강조하면서.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안에 숨은 인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해, 사람들 안에 숨은 인격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고, 또 돈을 내기도 한다. 마치 루오가 미제레레에서 새겼던 ‘천당을 예약하는 부자님 마나님’처럼. 사순절이 되면, 우리는 이런저런 결심을 한다. 주일학교 교사 시절, 나는 내가 가르치는 어린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약속을 했었다. 금요일엔 절대 고기를 먹지 않고, 커피를 끊고 등등. 수난하는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이 약속이 소중한 것은,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어린이들과 함께했던 마음들, 그 어린이들 안에 담긴 보물 같은 어떤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 약속은 내게 성사가 되었고, 거기서 난 하늘나라를 보았던 것 같다. 여전히 요즈음도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초콜릿을 안 먹기로 했다, 소다를 안 마시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과연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이런 행위를 하는 건지 궁금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절기를 지나 성주간의 신비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네 본당 구역의 한 자매님이, “내 인생에 이제 몇 번이나 봄을 보겠냐”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었다. 내 인생에 이제 나는 몇 번의 봄을 보낼 수 있을까? 이 말은 내게 마치 성사처럼, 봄에 대한 모든 기억을 소환했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피어나던 목련, 그리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를 노래하던 봄날. 그리고 봄이면 어김없이 오던 성주간, 부활 달걀, 엠마오….

그러면서, 내 작은 일생에 늘 있어 왔던 이 성주간의 신비가 오늘 나에게는 무슨 의미를 주는 건가 생각하게 된다. 스승이신, 연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 속으로 걸어가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거룩한 주간에, 우리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며, 발을 닦아 주시던 그분의 마음과 손길을 만날 것이다. 배반을 맛보시는 그분을 뵈올 것이며, 고통 속에서 일생을 마감하시는 그 순간을 기릴 것이다. 그리고 침묵. 삶과 죽음의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마치 꽃봉오리가 몽우리를 터뜨리듯, 부활을 기념할 것이다. 빈 무덤은 우리 삶의 궤적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부서짐, 무너짐, 그리고 쪼개진 균열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이 주는 또 새로운 초대일 것이다.

내가 매료된 마르코 복음은 함부로 부활이나 그 영광을 입에 담지 않는다.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해 두렵고 혼란스러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단 하나, 갈릴래아로 돌아가면 거기에 그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신비는 분명, 보이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있고,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갈릴래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갈릴래아에서는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릴래아로 가서는 무엇을 볼까? 예루살렘이 권력의 중심이라면 갈릴래아는 주변부다. 정치 엘리트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냥 보통의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보통의 사람으로, 걱정하고, 화내고, 실망하고,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던 곳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깜깜한 밤 속에서 지독한 희망을 긷는 새로운 걸음을 떼는 곳이다.

내게 갈릴래아는 여지없이 서울의 미아3동 성당 주일학교일 것이다. 거기서 내가 가르치는 어린이들과 떡볶이를 먹고,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하늘나라는 참 쉬웠고, 재미있었고, 또 단순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이웃을 찾아가는 일은 내게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행복했었다. 그리고 다른 갈릴래아는 시애틀의 호수였다. 거기서 젊은이들의 부서진 꿈을 만났고, 교포들의 상처를 만났고, 나의 혼돈을 보았다. 한국 수도회에서 제명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런데 그곳이 나에게 갈릴래아인 것은, 그럼에도 기쁠 수밖에 없는 하늘나라의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꽤 여러 번 파스카의 신비를 발견하는 순간을 체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성주간의 신비 앞에 서 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그래서 파스카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상의 구조를 깨고,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지평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그리고 내 영혼의 갈릴래아, 그 오래된, 낯선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1.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2.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3.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4.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5.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6.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7.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8. ⓒ박정은
파스카 신비 앞에서.... '갈릴래아로 돌아가기' 9.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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