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미국에서,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가을을 떠나 보내는 것은, 짧은 오후 햇살에 마른 빛을 발하는  잎새들을  만난다는 것이며, 커다란 호박이 주는 넉넉함을 즐기는 것이며, 집집마다 핼러윈을 준비하며 장식한 캐스퍼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온갖 종류의 유령과 해골들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즈음이면 나도 모르게 스티비 원더의 노래 한 구절 “No Libra Sun, No Halloween.…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흥얼거리게 된다. 핼러윈(Halloween)은 All Hallows’ Eve, 즉 모든 성인들의 축일 전야에서 온 말로,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름 모를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음을 기억하는 그런 시간이다.

핼러윈에는 유독 해골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14세기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유럽에서 유행했던 주제인 죽음의 춤(Danse Macabre)을 상기하게 된다. 죽음의 춤은 해골들끼리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하고, 해골들은 낫을 들고 히죽거리며 우아한 사람들에게 죽음의 길을 안내하기도 하며, 산 사람들에게 와인을 권하기도 하여, 일상의 삶에 닮긴 죽음의 모습을 강조한다. 죽음의 춤이라는 주제는 인구의 반이 죽어 나갔던 흑사병의 참혹한 체험,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부패한 종교에 대한 반응으로, 삶의 본질은 죽음에 있고, 또 사회적으로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 사고를 담고 있다. 불확실성, 죽음, 재앙 그리고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의문은 시민의식이 싹트게 되는 동기로 작용했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14세기의 유럽은 과도기의 축복과 재앙을 함께 배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종교 권력의 부패, 난민, 자연재해, 가난 앞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생각해야 하는 21세기의 인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즈음 라틴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죽은 자의 날'(Dias de los Morados)이라고 해서 축제를 한다. 우리의 위령의 날과 같은 의미인데, 우리 조상을 위해 미사들 여러 번 드리는 한국 교회와 달리 화려한 축제로 지낸다. 올해는 이민을 주제로, 미국 정부의 이민 정책을 반대하는 정치적 정서를 강하게 반영하며, 죽은 자를 위한 제대에 “이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혹은 “이민하면서 죽은 사람”이란 제목으로 제대를 장식했다. 들여다보니,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는 이민자를 인도하는 해골들의 그림도 많이 눈에 띈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마님. ⓒ박정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만화영화 '코코'에서 보여 주듯이, 돌아가신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그날이 그들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각 가정에는 제대가 차려지고, 죽은 가족들의 사진이 올려진다. 이 저녁에 초대받은 모든 가정에서는 좋은 음식과 함께, 각자 자기들이 기억하는 돌아간 친구나 가족의 사진을 올려 놓고, 그 사람을 기억한다. 어제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선생님이 된 마리아 쿠에바 양의 집에서 기도모임을 했는데, 그 친구의 제단에는 마리아의 친척들과 함께 올해 돌아가신 내 동료 수녀 크리스의 사진도 있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기억 속에 모두 다 연결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11월은 자연스레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가지고 있는 잎들을 다 떠나보내고 발가벗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는 우리에게 이젠 돌아갈 곳, 하느님의 품, 그리고 하느님의 맘으로 돌아오라는 손짓 같다.

그래서 11월에 우리는 잠깐 잠잠히 생의 의미를, 이 세상 사는 것, 그 너머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아름다운 시에서, 이 세상은 소풍이며,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했는데, 11월은 내게 생은 소풍처럼 가볍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속삭인다. 바람을 가르며 초연히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생은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거라고 일러 준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삶은 “순례”라 가르친다. 세상의 물질에, 덧없는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소박하게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족하는 순례자로 살라고 가르친다. 클라라 성녀가 살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이 그렇게 내 마음에 깊이 남는 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그 수도원의 텅 빈 공간이었다. 다음 세대 누군가를 위해 남겨 놓은 그 공간이 참 넉넉하다고 생각했었다. 자꾸 살면서 가벼워져야 할 텐데, 나의 삶의 무게는 커져만 가는 것 같다.

그런 자책이 들던 밤, 친구가 보내 준 카톡을 들여다보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죽음에 관하여’이다. 그중에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이 다름이 아니어서”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다가온다. 열심히 그러나 가벼이 (허욕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이 죽음을 적극 맞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결국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삶의 의미를 헤아리다가, 다 못 헤어도 그래도 좋다는 생각, 그리고 사랑하는 벗들과 강가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바다로 가는 것이 피안이라는 생각도 든다. 

노란 호박과 유령으로 꾸민 핼러윈 장식. ⓒ박정은

힌두교에서는 강과 바다와의 관계를 진정한 자아와 궁극적 진리(the Ultimate Being)로 설명한다. 즉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아트만), 내가 궁극의 진리(브라만)가 된다는 이론이다. 나에게 있어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금인형 이야기다. 바다의 깊이를 재러 바다로 간 소금 인형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다 자신이 바닷물 속에서 사라져 가는 순간, 자신이 바다임을 깨닫는다는. 사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자신의 존재를 강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비유했었다.  

이즈음 나의 화두는 “나는 어떤  죽음을 맞게 될까”이다. 사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임종도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 드리지 못해서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치매로 점점 작아져 가실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린 나의 발을 매일 닦아 주셨듯이, 아버지의 얼굴에 향기로운 로션을 발라 드리는 일이 고작이었다. 13세기의 신비가 메히트틸트(Mechthild)는  하느님께 무엇이 착한 죽음인지를 물었는데, 하느님은 나의 숨을 너에게 드리워 줄 때, 너의 숨이 마치 자석이 딸려 오는 쇠붙이처럼 그렇게 나의 숨과 하나가 되는 거라고 설명해 주셨다고 그의 책 "하느님 신성으로부터 흐르는 빛"(Das fließende Licht der Gottheit)에 적고 있다. 나의 숨이 하느님의 숨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나의 숨과 신의 숨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착한 죽음이라면, 결국 그것은 착한 삶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학생들과 피정을 하고 있다. 자신의 느낌과 삶의 경험을 솔직히 내어 놓는 내 학생들의 영적 나눔을 들으면서, 다가오는 세대 안에 계신 하느님의 얼굴 뵈옵는다. 저 젊은이들의 영성이 계속 깊어지면 얼마나 세상은 더 아름다울까 생각하다가, 나이 드는 자의 가벼움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그저 말을 줄이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만든 발자국을 지우는 일을 시작해야겠다. 불편해도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덜 망가지도록,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도록, 가볍게 입고, 가볍게 먹고, 소음을 줄이면서 살다 가려고 노력해야겠다. 다만 이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릴케가 “가을”이란 시에서 “잎이 진다. 멀리에 선 듯 잎이 진다. / 하늘의 먼 정원이 시들어 가는 듯 /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들 낙하를 / 한없이 너그러이 그의 양손에다 받아들인다”라고 고백하듯, 아직 다 이루지 못한 사회의 정의를 완성하시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그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용서하지 못한 자, 그리고 아직 용서 청하지 못한 자들과 함께 그 한 분- 하느님의  자비 앞에 설 것이다. 그러니 그저 영원을 사모하며 이 부서지고 아픈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친절한 맘과 행동으로 가벼이 살아갈 일이다.  

오클랜드의 프루트베일에서 열린 죽음의 날 행사에 세워진 제단. 올해는 이민을 통해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특별한 주제로 다양하게 꾸며졌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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