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홀리네임즈 수녀원 경당에 장식한 대림환. ⓒ박정은

나는 알고 있다. 학생들의 마지막 페이퍼를 읽고, 점수를 다 매기고 나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은혜의 시간이 내게 올 것이라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내게 대림은 학기를 끝내고, 혼자 집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침묵하는 고요를 맞는 시간이다. 오후 네 시가 지나면 어느덧 사방은 도둑맞은 것처럼 어둠에 잠기고, 발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저녁 산책을 할 때면 좀 멀어도 온통 불을 켜 장식을 한 동네까지 걸어가서 빛의 축제를 즐기고 돌아온다. 반짝반짝 불을 켜 놓은 집 앞을 지나면 왠지 마음이 다 환해지는 것 같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기에, 성탄을 비롯한 여러 축제에는 빛이 주제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대림환에 초를 밝히며, 어둠을 밝혀 줄 빛이 되어 오시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 사실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을 기리는 겨울 축제일이었다. 동지를 지나 점점 빛이 길어지는 것을 기념하던 로마 축제일에서 의미를 빌어, 빛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게 된 것이다. 추운 겨울날 수녀원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며, 사람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의 가난은 참 추운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릴 적 내 친구 수녀님이 아르헨티나에 선교 가서 보내 준 편지에는 “추운 성탄절, 바람 부는 마구간 같은 것은 이곳에 없어. 한여름에 맞는 성탄절이 내겐 낯설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받은 내 친구 수녀의 그 편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거긴 성탄이 여름이라고? 하긴 뭐 여름일 수도 있지. 성탄은 아니 12월 25일이 꼭 북반구의 시간일 이유는 없지. 결국 성탄은 예수가 탄생하시는 우리 마음의 첫자리이고 또 첫시간인 거니까. 그러기에 내가 예루살렘의 성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동네 베들레헴에서, 뜨거운 5월의 어느 날 드린 낮기도는 설레임이었고, 목동들의 환호였고, 그리고 희망의 성탄이었다고 추억한다.

이즈음, 유대교에서는 하누카(hanukka)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성전을 짓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는데, 9개로 된 촛대(menorah)에 하루에 하나씩 불을 밝혀 나간다. 또 이즘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민들이 관자(kwanza)라는 축제를 지내는데, 자신들의 뿌리인 아프리카를 추억하고 삶을 감사하는 축제로 이때에도 일주일간 하루에 하나씩 초를 밝힌다. 어둠이 길어지는 시간의 길목에서 사람들은 빛을 희망하며 한 해를 마감하고 또 새해를 맞이한다.

그런데 빛을 찾는 마음이 어디 계절적인 것이기만 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또한 어둠이 깊어, 빛을 그리는 것 같다. 새벽이 오려면 어둠은 더 깊다고 하는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는 걸까? 그러기에 이 대림은 우리를 더욱 설레게 하고 또 기다리게 한다.

사실 21세기는 어떤 세기보다 가난의 문제, 억압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글로벌 자본주의 앞에, 많은 사람이 빈곤층으로 떨어졌고, 환경오염, 자연재해, 폭력 등으로 많은 사람이 살던 터전을 잃고, 떠돌이 난민이 되었다. 지금 남미의 많은 난민이 무리 지어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에 놓여진 벽 앞에 몇날 며칠째 서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더 이상 억압하지 말라고 혁명을 주장하는 “노란 조끼” 데모가 4주째 계속되고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의 시대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 그러고 보니 내 학생들도 “혁명을 꿈꾼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가 꿈꾸는 혁명은 어떤 혁명일까? 성탄이 나를 초대하는 혁명은 너무 조찰하고, 부드러우며, 또 너무 연약하다. 그 초대를 받은 나는 여전히 또 너무 세련되고, 내면이 화려하며, 또 너무 바쁘다.

멕시코 벽. (사진 출처 = washingtonagnetwork.com)

또 수도자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하늘이 사람이 되시는 이 신비로운 혁명을, 또 이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혁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대림의 내 기도는 눈을 뜨게 해 주시리란 확신 속에서 “나자렛의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 고백했던 두 맹인(마태 9,27-31)의 외침이다.    

난 지난 봄방학에 학생들과 미시시피에 봉사 갔다가 주일 오후 공원에서 그들과 이야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물가에서 죽은 거북이를 건져 내었다. 거북이의 살과 내장은 이미 부패해서 사라졌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비록 다 사라져 버리고 껍질만 남았음에도, 왠지 거북이의 품위는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미래의 수도생활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 중이어서였을까- 새로운 멤버들은 거의 들어오지 않고, 나이 들어 가는 회원들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활동수도회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는 중이어서였을까. 껍데기만 남은 거북이는 마치 지나간 시대의 찬란한 유물처럼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도무지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학생들에게 이 거북의 껍질 속에 담겼던 삶의 질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잘 묻어 주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AAR(미국 종교학회)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덴버 공항에서 거북이의 껍질로 만든 드럼을 보았다. 미국의 원주민들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이 드럼은 거북이의 껍질만 남은 빈 몸을 통해 소리가 울려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갑자기 수도생활의 비전은 이렇게 껍데기만 남아 남을 위한 북이 되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상하던 살아 있는 거북이로서의 품위가 아니라, 죽음으로 속을 다 비우고, 거기에 누군가의 노래가 연주되도록 도구가 되는 삶. 그런 자세가 수도생활이라는 생각에 처연함마저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수도생활을 시작하던 그 첫날의 아찔하고 두려웠던, 그러나 황홀했던, 죽기까지 예수, 그분을 따르리라던 젊은 날의 내 가진 모든 것을 다 비워 낸 그 열정으로 돌아가라는 초대일지도 모른다. 처음 그분을 따라 나서던 날, 우리는 모두 그저 단순하게 무화과 치는 농부였고, 가난한 아나빔이었다. 그렇게 예수, 그분과의 혁명을 시작했었다.

미시시피 강가에서 주운 껍데기만 남은 거북이. ⓒ박정은

그래서 나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밤을 기다리며 타고르의 '기탄잘리' 첫 시를 노래한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너머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당신의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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