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오늘부터 매달 네 번째 월요일에 하영유 수녀의 '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를 연재합니다. 시대 속의 미술 작품들을 통해 지금의 세상과 교회를 들여다보고 재조망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하영유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조르주 드 라투르. (1635-40) (이미지 출처 = 미국 국립 미술관 홈페이지)

그림 한 장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를 지내는 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던 그림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 한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불빛이라고는 그림 정면의 무언가에 가린 촛불 하나뿐입니다. 어른거리는 촛불에 비치는 여인의 조용한 시선을 따라가 봅니다. 마주보는 거울에 비친 것은 여인의 얼굴이 아닌 의외의 물체입니다. 깜짝 놀라 다시 그 검은 물체가 무엇인가를 봅니다. 해골입니다. 마주하듯 가만히 손을 대고 깊이 생각에 잠긴 이 여인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프랑스의 화가 라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가 이 그림을 그리던 17세기 전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회개한 죄인의 상징으로서 많은 화가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중 상당수의 작품들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풍성한 머릿결(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림을 의미)이나 외적인 아름다움의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이거나, 비탄에 빠진 얼굴이나 몸동작을 통해 그 의미를 직설적으로 그려 내던 것에 비교하면 라투르의 이 그림은 ‘깊은 침묵’과 ‘빛과 공간’이라는 특이점들을 보여 줍니다. 

당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삶의 무상함을 정물화의 방식으로 그려내던 ‘vanitas’ 양식에 등장하는 해골과 거울이 여기에서도 현세 삶의 유한성과 무상함을 일깨우는 상징으로 등장한다는 또 다른 장르적 공통점을 걷어내 보면, 그림 한가운데 유일한 광원으로 존재하는 촛불은 더 그 의미를 찾게 합니다. 실제로 라투르가 그린 몇 점의 성화에서 촛불은 유일한 빛이신 하느님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이 그림의 바탕이 되는 복음(요한 8,2-11)에 바로 이어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신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로 인해 세상에서의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여인입니다. 그 사이, 즉, 옛 생명에서 새 생명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 자리할 깊은 숙고의 시간이 이 장면 속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숙고는 성찰, 반성과 그 뜻을 공유하면서도 ‘생각이 깊이 익다’는 의미를 더 갖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의 생각이 익어 가도록, 이 불빛 앞에 머물러 앉아 있도록 했을까요? 이 여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요?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성전 광장의 한낮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끌려온 여인과 그녀를 끌고 온 이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은 그들이 대답을 종용하는 동안 바닥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의를 거듭하고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살기는 사실 이 여인이 아닌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바닥에 무엇을 쓰셨는가를 복음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을 쓰고 계시던 자리에 모여 서 있던 이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직면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말씀에 그 돌을 버리고 ‘나이 많은 이부터’ 하나둘 떠났다는 것은 그 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이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확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타난 이들에게 일어난 이 내적 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은총이지요. 회개와 새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의 초입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에게도 그 시간 같은 은총 속에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후 이 여인과 이 여인을 죽이려 하던 이들의 길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더 철저한 모의를 하기 위해 한밤중 모입니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무지하다’와 ‘마귀 들렸다’로 치부하고 묵살하며 대중들을 동원해 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홀로 방에 앉습니다. 어두운 방의 유일한 불빛은 먼저 여인 자신의 삶을 비추어(해골과 거울) 그 유한함과 세속적 추구의 무상함을 돌아보게 합니다. 파스칼(1623-62)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인들과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들” 두 종류의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한다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분명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회개는 깊은 통회 안에 사랑으로 돌아섬입니다. 사랑을 향해 존재를 돌리는 것(회두, 回頭)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 불빛, 그 사랑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분이 나를 살리셨고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경험한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살리신 분입니다. 목숨을 바쳐 용서와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아직 어두운 방 안 유일한 불빛이 되어 여인을 머물게 합니다.

저의 성찰을 돌아봅니다. 성찰과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많은 행위와 기도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 하나만을 향하고 있는가 질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내면의 방 안에 켜져 있는 온갖 불빛들이 저 참 빛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 저에게 진정한 회개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리 만무합니다. 교회와 사회 안의 각종 분야에서 ‘내 잘못’이라는 고백을 듣습니다. 그중 참된 뉘우침도 있을 테지만, 여론에 할 수 없이 밀려 나온 고백, 혹은 전략적 토로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과 행동의 여정에 따라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일 터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회개의 길에는 그 하나의 빛을 향하여 홀로 머무는 긴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이 다름 아닌 기도일 것입니다.

그림 속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거울에 비친 해골 아래 놓인 것이 닫힌 성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이 그려졌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그림에 해골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성경이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 회개와 숙고의 시간에 이어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진정한 제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아직 성경이 덮여 있다는 것은 그 ‘알고 따름’을 위해 이 시간이 필요함을 뜻합니다. 그 성전 광장의 사건 이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대중을 선동하고 빌라도를 협박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의 부활을 감추기 위해 경비병을 매수하고 거짓을 퍼뜨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간 이후에도 성모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를 지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뛰어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바닥에 무언가 쓰시던 성전 그 자리 어딘가에 자리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주신 이성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영원하고 유일한 빛이신 예수님만을 내 안에 모신 저 숙고의 자리, 예수님과 나만이 홀로 머무는 자리에서 그 은총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시도록 내어 맡겨 드리는 선택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이 절정으로 드러나는 성주간, 이 자리에 머물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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