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자화상’, 케테 콜비츠, (1933) (이미지 출처 = 미국 워싱턴 국립 미술관 홈페이지)

공대에 막 입학했던 해에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일생과 작품들이 실린 책을 보았습니다. 미술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이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며, 나아가 연대와 투신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그녀의 삶과 작품들에 스무 살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미술을 전공하게 된 데에는 더 구체적인 체험과 또 다른 깊은 고심이 있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저의 마음 깊은 곳을 깨웠던 것은 분명합니다.

수녀원에서 어느 날 자료를 찾다가 그때는 눈여겨보지 못했던 작품 이미지를 발견했습니다.(위의 그림) 케테 콜비츠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미술가에게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자 표현이며 새로운 자신으로 이동하는 마디입니다. 제가 스무 살에 만났던 그녀의 자화상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래 지나 새로 만난 이 작품은 그녀의 여느 자화상과 무척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위안, 위안이었습니다. 왜일까. 최근에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이 그림은 작가가 자신을 그리고 있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는 것인지, 그 ‘과정’이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지 그 둘을 다 생각하게 합니다. 그녀가 많은 자화상을 남긴 판화 방식이 아닌 목탄으로 종이에 직접 그린 이 작품에는 목탄을 세게 문질렀을 때 종이 표면이 보풀처럼 일어난 자국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과정’ 속의 ‘지금’이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유난한 불안을 갖고 이로 인한 지속적 신경증에 시달렸다고도 하는 콜비츠에게 죽음은 평생 삶과 함께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권위와 특권에서 벗어나 참 하느님을 믿는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던 신학자 외할아버지와, 보장된 변호사의 길이 아닌 노동자들과의 건축업을 선택한 아버지, 그리고 빈민가에서 진료소를 연 의사 남편과의 삶은 그녀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이미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술에 일찍부터 재능이 특출했던 그녀가 일찍이 자기 이웃들 프롤레타리아의 삶 안에서 발견하고 그린 진한 ‘인간다움의 아름다움’에는 지독한 가난과 고통, 죽음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것을 그린 방식은 단지 대상으로서의 묘사가 아니라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의 연민으로 그 삶 속에서 살며 드러낸 진하고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콜비츠의 작품은 당대의 많은 이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고 영향력 또한 컸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도, 보호할 수도 없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라도 하고자 한다는 그녀의 바람은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현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된 여정을 좀 더 들여다보면, 다시, 그 ‘죽음’과 그녀의 더 깊은 고통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국과 세상을 위하는 전쟁이라 믿은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처럼 아들이 자원 입대하고 곧 전사합니다. “나는 그때 나의 힘을 다 내려놓았고 늙어 버렸다. 그리고 무덤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꺾인 채로 나는 다시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기록한 그녀는 아들의 스물몇 번째 기일에 작은 조각을 하나 만들며 씁니다. “노인의 조각상을 하나 만들고 싶은 데서 이 작업이 시작됐다. 마치 피에타와 같이 되었다. 어머니가 앉아 있고 그녀의 죽은 아들이 그녀의 무릎 사이에 누워 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고 오직 성찰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아들, 그리고 외롭고 힘겹게 생각 속에 잠긴 어머니에 대한 성찰.”

‘피에타', 케테 콜비츠. (1937-38) (이미지 출처 = 독일 쾰른 케테 콜비츠 미술관 홈페이지)

이 작은 작품은 오래 지나 독일이 통일된 뒤 크게 재제작되어 그동안 독일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겪은 모든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에 단독으로 전시됩니다. (아래 그림) 오래전 베를린 시내의 대로를 걸으며 이 기념관을 찾다가 갑자기 이 입구로 들어선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놀라서 입구에 멈춰 조각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각자 구석에 서거나 앉아 오래 바라보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공간 한 켠에 앉아 무엇을 깨달았는가는 좀 더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이에게도, 침략을 당한 이에게도 참혹했던 이 모든 폭력의 역사를 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품고서 성찰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 위에 뚫린 원형의 천장은 비와 눈과 바람과 햇볕이 그대로 내려오게 합니다. 성찰의 공간이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풍파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죽은 아들(피에타)’, 케테 콜비츠. (1937-38, 1993년 재제작) (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이 글의 시작에 소개한 자화상은 콜비츠가 이 조각상을 만들기 몇 년 전에 그린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아들 사망 후 쓴 일기는 그녀의 절망을 아주 조금이나마 엿보게 합니다. 이후 그녀가 절망과 비탄으로 주저앉고 싶었던 자신과 얼마나 싸웠는지를 기록한 글들이 있습니다. 그 싸움의 방식은 그 기간 동안의 그녀의 작품들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지 않고 세상의 고통 속에 더 깊이 들어가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나오는 과정은 그녀의 매 순간, 지금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의 과정이 그때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자화상을 그리고 몇 년 뒤 그녀의 유일한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종전 보름 전, 이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죽는 그날까지 그녀는 매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 자화상의 진한 목탄 선과 그 선 자락으로 아직 그려지고 있는 중인 그녀의 몸과 뒷자락, 그리고 다시 그 목탄을 쥐고 있는 손 부분에 강한 힘으로 그은 자국에서 그 선택 순간들 중 어느 ‘지금’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 고백을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선 하나를 긋는 매일 안에서 그녀는 자신을 대면하며, 무엇보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갈망하고 질문하며 좇아가는 삶을 산 것이 아닌가 알아들어 볼 따름입니다. 아, 이 그림에서 느낀 ‘위로’가 이것이었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자신을 매몰되게 할 수도 있는 가장 약한 자리들에서 선택을 해 나가는 것. 진정한 자신으로, 이웃을 향해, 하느님께로 사랑의 선택을 하는 그 순간들이 언젠가 이 그림의 완성일 하느님을 만나게 될 날일 것이라고. 여전히 저는 그림을 잘 못 그리지만, 콜비츠와 함께하셨던 하느님께서 그녀의 작품들을 통해 제게 이야기해 주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이 계약을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신 것이다.”(신명 5,3)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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